박승의: 소련시대의 사할린 한인의 생활 (계속)

(2) 한국에서의노력

 

1964 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일회담에 제출할 귀환요청서가 제출됐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회담에서 사할린 문제는 논의조차 하지 않은 채 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이후 한국 정부는 냉전의 벽을 핑계삼아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박승의:소련시대의 사할린 한인의 생활

3)소련시대의사할린한인의생활

 

(1) 망향의고착화:(19451959)

1945년 8월 8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남사할린을 점령한 후, 8월 23일 일본인의 출국을 금지했다. 이 출국금지조치에 의하여 당시

일본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한인 약 4만3천 여명도 함께 억류됐다. 1945년 8월을 전후로 남사할린은 북사할린에서 남진하는 소련군과 일본군이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고, 당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조선인을 "스파이"로 몰며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됐다.

사할린 한인의 운명 (귀한운동)

사할린 한인 귀환 운동의 선구자들

 

  2차대전 당시 유태인들에게 쉰들러 리스트[1]가 있었다면 강제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귀국하지

 못한 한인들에 게는«사할린 리스트»가 있다.

  박노학, 그 자신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 온 그는 서슬퍼런

 냉전의 한가운데서 미귀환 사할린 한인과 고국의 가족을 만나게 해준 사람이다.

 그가 작성한 <화태한국인 귀환희망자 명단>은 아직도 강제징용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사할린 한인 문제: 전후처리와 처우개선

1)머리말

 

   사할린 한인들을 논한다면 강제징용과 러시아 내 고려인의 이주를 빼놓을 수 없다. 사할린이란 특수적 상황도 일본시대 전후에 있어 화태

(가라후토)에는 이미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다.

사할린이주의 정착배경은 필자의 저서에서도 밝힌 바 있었지만 개방(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전후 일본의 학술기관을 비롯해 르포작가라든지

홋카이도신문에서도 여러 번 보도한 바 있었다. 한국에서는 1995년 "해외희생자 유해현황조사 사업보고서"와 2003년 "일제하 피강제동원자 등

실태조사연구"로 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보고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보고서에는 사할린이주와 강제징용에 관한 정착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담고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학술지나 논문에서도 강제징용이라든지 사할린이주 및 영주귀국에 관해서 저술한 바 있었다.

사할린 한인의 운명

 사할린한인의운명역사, 현황과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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