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사할린한인의운명역사, 현황과특성

 

 

 

차례

 

1. 사할린에서 한인:  형성의 역사와 문화 ……………………….………………   2

2.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역사 …………………………………………………….     22

3. 사할린 한인 귀환운동의 선구자들……………………………………………..    45

1) 사할린과 한국을 연결한 박노학………………………………….………….       45

2) 사할린에서의 한인 귀한운동과 허조 ………………………………..…………. 57

3) 박노학 기념사업회의 결성 추진 …………………………………..…………      60

4. 사할린 한인 문제: 전후 처리와 처우개선 ………………………………….….. 68

5.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민족문화정체성 형성과 변천과정 연구  –

설문조사를 중심으로 – …………………………………………………………………. 144

참고문헌 …………………………………………………………………………….          171

저자소개 ………………………………………………………………….…………          177

 1.      사할린한인: 형성의역사와문화

 

2002년 인구조사자료에 의하면 사할린에는 2,9592명의 한인이 있다(사할린 주 전체 주민 수는 54,6695명이다)[16, 120쪽][1].  한인 인구는 러시아인

다음으로 많다(5,4 %).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형성은 몇 개의 단계를 거쳤다.

1단계(1870–1905):  한인들의 사할린 이주 시작기이며, 조절 불가능한 자연 발생적 이주의 시기이다. 이 시기 한인들은 주로 더 나은 생활을

찾아 조선의 북부 지역 (함경도)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러시아에 최초로 한인들이 출현한 것은 1863 년이고 러시아는

중국과 1858년과(아이훈), 1860 년에(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고 1861년에는 상페체르부르크에서 이에 대한 의정서를 작성했고 그 결과로 연아무르와

우수리스크 지역은 러시아제국의 영토가 됐다.  1861년 러시아 행정국이 이 지역에 생기기 전까지 이 지역 주민의 민족 구성에 대한 공식적인 수치는

알 수가 없다. 연해주 영토는 한국과 인접해 있고, 따라서 이곳에 개별적으로 한인들이 출현했던 것은 인접한 함경북도(조선)와의 국경이 부재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할린에 최초로 한인이 출현한 것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본 작가인 이회성은

이것이 1860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고[17, 14쪽], 박수호는 1870년이라고 말하고 있다[7, 18족].  아. 찌.  쿠진은 박수호[11, 49쪽]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마지막 견해가 보다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869년 사할린 섬은 유배와 유형지로 공포됐지만 최초의 유형자들은 이미1858년에 있었다[8, 89쪽]. 1890년 사할린에 온 안톤 체홉은 개인적으로

주민조사를 진행했고 “사할린 섬” 이라는 책에서 ‘세묘노프의 집에서 만주인들과 고려인들, 러시아인들이 일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22, 150쪽].

1897년 최초의 전체주민조사에 의하면 28,000명의 사할린 주민 중 한인은 67명이었다.  “그들 중에는 투옥과 형기를 마친 사람이 3명, 농부 9명, 어부와

사냥꾼 53명, 의류제조인 1명, 무직 1명, 조선국적자가 54명, 러시아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이 1명이었다. 전체 한인 중 66명이 코르사코프 구와

알렉산드롭스키 구에 살고 있었다”[18, 35쪽].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광산에서 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수호의 견해에 따르면

이들은 러시아인, 일본인, 중국인, 토착민들과 함께 석탄을 채취하고 어업에 종사했다. 조선인들은 자유노동자로서 급여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왔으며

법적으로 외국인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유형자들과 마찬가지로 가혹한 노동에 동원 됐고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던 것은

거의 자명하다. 이것으로 당시 사할린에 한인들의 숫자가 적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7, 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