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 Page 2

 

  2 단계(1905–1945): 북위 50도를 기준으로 사할린이 두 개로 분리됐던 시기이며, 자발적 이주의 시기와 (1905–1939) 강제 이주(1939–1945)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시기 북사할린에 한인 주민이 형성됐던 것은 대륙(연해주)으로부터 이주와 한국으로부터의 이동(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아무르 유역의 니콜라옙스크, 또는 일본 열도를 경유하여), 그리고 자연 발생적인 증가의 결과였다. 1906년 4월 10일 사할린 유형지가 폐쇄되고 같은 해

약 5000명이 러시아 대륙으로부터 북사할린으로 이동했다[8, 100쪽]. 차르정부는 이주를 장려하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세금 감면을 내세웠다.

석탄, 석유,천연가스 매장지의 개발이 시작되고 합작 또는 외국이권기업들이 설립됐다. 1916년 이후 일본인들은 사할린의 석유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섬 북부지역의 석유, 천연가스 매장지를 개발하는데 일본이 더욱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1920년 북사할린에 소비에트 권력이 수립되고 1920년 4월에는 백군의 일시적인 승리로 일본군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1920년 7월 3일 일본 정부는

사할린 전체가 고유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일본왕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은 북사할린에 약 1,5000명의 노동자, 관리, 군인, 고고학자, 지리학자,

기자들을 파견했다[8, 107–108 쪽].

점령기간(1920–1925) 동안에는 한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사할린의 남쪽과 북쪽 사이를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었다.

1904–1905년 러일전쟁 이후 섬의 남부와 북부에 한인 주민 수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증가했다.

사할린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왔다. «1689년 러시아와 청이 체결한 네르친스크 조약에 준하여 러시아는 거의 150여 년간 연아무르

지역을 떠나야 했다. 사할린은 오랫동안 러시아의 관심영역 밖에 있었다»[8, 58쪽].

19세기가 되어서야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시모다조약(1855년)과 상페체르부르그조약(1875)에 따라 사할린은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왔다.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는 패하고 1905년 8월 23일(9월 5일)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영토를 일본에게 양보한다.

이렇게 섬의 영토는 두 개로 나뉘고 남부는 일본에게 넘어갔다.  쿠릴열도와 남사할린을 받은 일본 정부는 그곳에 행정국과 자체통치조직, 선거체계를

만들었다. 쿠릴열도는 홋카이도 총독체계로 편입됐다.  1907년 남사할린 지역에 가라후토 총독체제가 수립되고 1908년에는 도요하라시

(블라지미롭프카,1946년부터 유즈노–사할린스크)가 중심이 됐다[12, 9쪽].

새로운 땅을 얻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들도 한국인들도 갔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 식민자들은 가혹한 군사정치체제를 설립하고 경제팽창을

진행하고 국내 또는 국외에 있는 위험한 군수기업들에서 노예처럼 한국인을 부렸다. 일본식민자들의 억압과 박해, 계획적인 대량학살 정치는 다수의

한국인들을 외국으로 망명하게 만들었다.  이들 중에서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 또는 가족과 함께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1904–1905년과 1945년의 2차례에 걸친 러일 간 무력 충돌은 사할린 한인들의 영혼과 심장에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경제정책은 주로 토지몰수였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행정자원을 끌어들였다.  1912년 조선 총독부는 부동산의

소유자가 지정한 기간 내에 자기소유의 토지를 신고하고 일본재정관청이 그 소유권을 확인할 전권을 가지고 있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1910–1918년

토지대장조치를 실행한 결과 «약 1000만 정보(992만 헥타아르)의 경작지와 1,120만 정보(1,111 만 헥타아르)의 임야가 일본제국의 국유지로

추산됐으며 일본지주들의 소유로 넘어갔다 »[24, 89쪽]. 생존수단을 잃은 농민들은 소작인이나 일용노동자가 됐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마저 박탈당한

농민들은 산으로 올라가 개간농업을 하거나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해야 했다. 1912–1931년까지 이 기간에 생산량이 6배 이상 증가한 쌀을 일본으로

대량 수출했기 때문에 주민1인당 쌀의 소비량은 형편없이 감소했다. 한국에서 생산된 쌀의 48–50%가 유출됐고 매년 몇 백만 섬[2]의 쌀과 콩을

반출했다[27, 231쪽]. 1931년에 이르러서는 2백만 이상의 농민이 연생산량의 50–80%에 달하는 높은 소작료 때문에 파산했다.

일본 식민지권력에 대한 모든 비판과 선동, 파괴공작을 없애기 위해 폭동, 소요, 무질서, 언론, 일본 황실 권위 훼손, 정치범죄, 사회질서유지 등에 관한

온갖 종류의 법령과 명령이 만들어졌다. 1930년대 초 농민들은 기아의 한계에 이르렀다. 유일한 탈출구는 외국으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은 만주(19%), 시베리아(2.88%), 일본(16.85%) 등으로 떠났다[27, 203–231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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