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 Page13

 

4) 조선어교육관계자의인터뷰사례들

 석혜경: " 1936년 5월 25일에 조선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태어났습니다. 1943 년에 7살의 나이에 온 식구가 아버지를 따라 가라후토 오찌야이시

(현 사할린주 돌린스크)에 와서 그해 일본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2학년(1945)까지 다녔습니다. 가라후토에서 일제시대인만큼 학교에서 전적으로

일어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일본문학, 산수, 도화, 도덕적 교양을 주는 수신 등 과목이 있었는 것 같습니다. 해방 후 돌린스크시에서1946년 9월에

조선학교가 설립되어 2학년에 입학하여 1948년에 소학반 4학년을 졸업했습니다. 그 학교에서 해방 전부터 이 지방에서 거주하는 김이섭, 김지각,

석차술선생님들이 교직을 맡았습니다. 제가 소학반에 다니던 때는 바로 해방 직후라 출판된 교과서가 없이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대륙에서 온

김병하 선생님이 보내준 재료나 이곳 교원들이 구하거나 만들어 등사한 것으로 배웠으며 특히 산수같은 것은 일본 교과서를 번역하여 이용했습니다.

차후 국어독본, 문학, 역사책 등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학교가 완전히 조선학교인만큼 모든 과목을 조선어로 가르쳤다보니 조선어 발전템포가

빨랐고 또 일본학교에 다니던 학생들, 나이든 학생들이라 한자도 섞어 가르쳤기 때문에 조선어를 더 깊이 파악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처음 설립된

때에는 자지방의 유식한 사람들이 교편을 잡은 것만큼 조선어는 능통했지만 교수방법에 있어서는 부족점이 있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한 정도의

사람들, 교원들이 모자랐습니다. 차후 대륙에서 교육대학들을 졸업한 사람들이 파견되어 와서 교원들이 원만히 충분했고 그들의 지식정도도

높았습니다. 학기마다 우등생들에게 우등생 상장들을 수여하여 격려했습니다. 반면에 학교에서 규율을 위반하거나, 특히, 일본말을 쓰는 경우에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걸상을 들고 벌서든가 또는 채로 손등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드물었습니다. 당시 과목별 올림피아다나 콩클 같은

것은 없은 것같습니다. 그러나 자주 운동회, 음악회, 예술출연 등이 있었고 여학생들에게 춤도 가르쳐주었습니다. 돌린스크에 처음에는 초급중학교가

설립됐는데 학생수가 적다하여 1949년까지 소학반 밖에 없는 관계로 저는 4학년을 마치고 브이코프 학교로 넘어가 거기서 7년제를 마쳤습니다(1952).

1954년도에 사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58년에 졸업. 바로 해방 후에는 조선어 교수법이 미약했다고 볼 수 있지만 차츰 출판된 교수법, 철자법

교과서에 기초하여 교수방법이 체계성을 띠게 됐고 또 특별히 지적할 것은 한자들을 가르치면서 술어들을 파악시키다나니 우리말을 더 깊이

습득했다고 봅니다. 시청각 자료나 학용품이 매우 부족했고 교과서, 직관물, 기술장비 정도는 보잘 것 없었습니다. 많은 부족한 자료들을 교원들,

학생들이 손수 만들어서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학교 졸업생들의 지식수준은 높았습니다. 전체 과목을 우리말로 수업하다보니

우리말로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제가 돌린스크 조선학교에서 받은 조선어 지식이 충분히 깊은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사범학교에 입학할 때 특히

느끼게 됐습니다. 현재 한국어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실지와 결부되지 않은점, 수업시간 외에는 조선어를 사용하지 않는 점을 결함으로 봅니다.

  저는1954부터 1958년 동안 사범전문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돌린스크 시 조선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66년부터 라디오우리말방송국, 다음

우리 신문사에서 현재까지 근무합니다. 제가 조선학교에서 전과목을 통해 조선어를 수업했고 러어시간이 적었던 관계로 러어가 약해 졸업 후 직장에

취직하거나 특히 대학에 입학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러시아에서 사는만큼 현재 1946–63년 시기의 범위로까지의 한국어수업은

필요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어교육 범위는 좀 적은 것 같습니다.»(박승의, 석혜경과의 인터뷰에서,  2002년 12월 23일, 새고려신문사)

안춘대: 1943년 5월 8일에 사할린 주 마카로브 시에서 출생했다. 1952년 부유클리 부락 조선학교 1학년에 입학했고, 당시 부교장은 김안드레이

(대륙 출신), 담임선생은 김지리(북한파견노무자였다. 한글을 능통하게 아시는 분들이 모국어와 한자를 가르쳐 주었다. 교과서로는 김병하의 «한글»,

«조선어독본»을 사용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 특히 남자 학생들이 벌도 받곤 했었다. 수업 외에 수학 올림피아드, 예술축전에도 참가했다. 1959년에

포로나이스크 시 조선 칠년제 학교를 졸업했는데,  5–7학년에 포로나이스크 시 조선학교에서 김병하, 최명길 선생님들이 모국어를 가르쳤다. 특별한

교재가 없었으나 선생님들 자체(대륙에서 오신분)가 한글을 무척 사랑했고 한자를 잘 알았다. 때문에 나는 한국어시간을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나의

한글지식수준에 대해 평가하기 어렵지만 한글을 모국어로 취급한다. 1959–60년까지 조선학교에서 10년제를 졸업한 분들은 한글지식 수준이 높다고

본다. 50년대에 교재, 학습자료들이 부족했다. 현재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제9동양어문학교, 제15호학교, 동양대학,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충분하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63년에 유즈노–사할린스크 사범전문학교 조선과를 졸업한 후 1968년에 유즈노–사할린스크 국립 사범대학교

지리자연과를 졸업했고, 새고려신문사에서 사장(주필)으로 일한다.(박승의, 2002년 12월에 진행한 앙케이트 질문에 응답)

허남훈: 1936년 4월 3일(음) 충청북도 소태면 야동에서 허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할린 토마리 시에서 1943년4월1일에 일본 소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일본어를 배웠다. 해방 후 1946년 10월 15일에 부친 허조씨가 설립한 조선학교 1학년에 다시 입학했다. 교직을 현지인인 허조,

조권식, 대륙에서 모집으로 온 남 윅토르, 김만식, 안 와실리, 북한노무자로 온 한병찬, 정선생 등이 맡았었다. 허조 교장이 손수 작성한 «한글»을

등사하여 수업에 사용했고 1946년부터는 김병하의 «조선어 문자»를 교과서로 썼다. 조선어 수업에서 한문도 배웠고 글쓰기(습자) 시간에 붓으로

글자를 쓰는 것이 특이했다. 일본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다가 막대기로 매를 맞은 적 있었는데 조선학교에서도 혹시나 일본말이 튀어나오면 회초리로

벌을 받거나 벌금까지 물었을 때도 있었다. 학교 규율이 매우 높았다. 수업시간에 장난치거나 졸면 선생님은 분필을 던지거나 지시봉으로 어깨를 탁 쳐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토마리 시에서 1952년까지 7년제 학교에 다녔을 때 매년 봄방학에는 노래시합이 있었다.  일반 러시아노래 외에 한국말로 된

노래도 불렀고 시도 읊었다. 1956년 포로나이스크 시 사범전문조선학교를 졸업하고 크라스노고르스크 시, 마카로브 시 조선학교에서 일할 때에도 예술

올림피아다에서 학생들이 1,2위를 차지했다. 현재 한국어 교수법과 비교하면 그 당시 제일 중요한 것은 각 수업시간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포로나이스크 시 사범전문조선학교 졸업생들의 한국어 실력이 높았다. 김병하 선생님의 공로가 컸다. 크라스노고르스크 시 조선중학교에서

강 미하일, 마카로브 시 조선학교에서 허일 선생님의 한국어 교수법이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만일 1963년 전처럼 오늘날 한국어교육을 실시하면

학생들이 한국어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과목을 한국어로 가르쳐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러시아어가 약해질 것이 걱정이 되지만

해도… 러시아에서 사는 것만큼 러시아어를 잘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1965년까지 조선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폐교 후 1988년까지

건축기관에서 일을 했다. 1988년 10월에 토마리 시 제1중학교에서 한국어 교사로 취직하여 2009년 한국으로 영주귀국할 때까지 한국어 교육에

종사했다.

(박승의, 2002년 12월에 진행한 앙케이트 질문에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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