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 Page 3

 

일본왕의 칙령 №33에 따라 1907년 4월 일본 정부가 만든 가라후토 총독체제는 이 영토에서 가능한 최대량의 천연자원을 유출하는 조치들을

실행시켰다. 예를 들면 1924–1934년 8억 2190만 엔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산업생산품이 섬의 외부로 유출됐다. 새로운 영토에서 가장 수입이

좋은 산업은 무단으로 벌채한 목재의 생산과 가공이었다. 1906–1934년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약 6천 8백만 입방미터의 목재를 생산했다. 목재의 가공이

일본제국 사할린 경제수탈의 중요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제지공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15–1934년 일본인들은 202만 6천 톤의

셀률로오스와 191만 톤의 종이를 생산했다[7, 21–29쪽]. 일본지배 초기에는 주요 탄전들이 법으로 채굴을 금지시킨 «예비용»이라고 공표됐다.

하지만 셀룰로오스제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1920년대에는 이 매장지들의 개발금지를 일부 폐쇄하고 1930년대 초에는 이미 20여 개의

임산자원채굴기업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남사할린 전체에서 30개에 달하는 새로운 탄광개발을 시작했다.

전시상황으로 1937년에는 석탄수출이 지역소비보다 많아졌고 그 이듬해에는 계속 증가했다. 1941년에는 4백만 톤 또는 가라후토 지역 연간생산량의

62%라는 가장 커다란 수치에 도달하게 됐다. 섬의 천연자원 개발을 위해 «오지세이시(임산업)», «미쓰비시»와 «미쓰이(석탄사업)»등과 같은

독점기업들의 혹독한 경쟁이 진행됐다[13, 12쪽].

1932년 이후 일본경제의 군수화가 시작됐고 통화팽창 과정이 강화됐다. 일본제국은 자신의 영향력을 아시아대륙의 내륙으로 확장시키려고 노력했다.

1931년 만주를 점령하고 1937년 중국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소비에트와 몽골의 국경지역에서 도발행위를 조직했다[3].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태평양과 인도차이나, 버마에서 미합중국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1937–1938년 가라후토에서는 시스카

(포로나이스크)와 도요하라(유즈노–사할린스크)에 군용비행장 건설을 시작했고 1936년에는 도요하라–시스카 간 철도건설이 완료됐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군사 및 경제적 상황을 첨예화시켜 노동자원의 급격한 증대를 필요로 했고 이는 한반도에서 충당했다. 초기에 일본식민권력은

과대한 약속을 하면서 «달콤한 말로» 자원 모집을 하는 형태로 이주를 진행했지만 이것으로는 필요한 인적자원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38년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총동원»에 대한 법령 №55를 공표한다. «조선과 타이완, 가라후토에서 전체동원령의

실행에 대한» 1938년 5월 4일자 일본왕의 칙령 №316에 준하여 1939년 9월부터 한국인들의 대규모 강제동원이 시작됐다.

같은 해 «국민직업능력신고»와 «노동동원»에 대한 법령이 통과됐고 이에 준하여 조선 총독부는 1940년과 1944년 가라후토와 태평양 남서부 지역의

도서에 파견할 젊은 한국인 남성과 여성들에 대한 총동원을 실행시켰다. 30년간 사할린 한인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일본인 변호사 다카키 겐이치의

말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 약 2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송출됐고 그들 약 6만 명이 가라후토로 보내졌다[7, 41쪽].

1920년 사할린 섬 남부와 북부의 한인 주민수는 일정하지 않았다. 1923년 북사할린에는 1431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고[7, 41쪽], 1920년

가라후토에는 934명이 있었다. 1933년 11월에는 5314명으로 늘어나고 1934년 3월에는 5813명까지 늘어난다[7, 35쪽].

일본점령군이 북사할린에서 철수하고 난 후 예전 한인주민들의 일부는 이곳에 남았다. 1925년 이들은 사할린 북부의 오하에서 천연가스산업과 탄광,

어업에 종사했다. 이 주민들의 일부는 거의 북사할린 전체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리브놉스크 지역 3개 촌락 – 나우모프카, 케피, 유키 – 과

서사할린 (쉬로코파딘스크) 지역 1개 촌락 – 미트냐 – 은 주민 모두가 한인이었다. 1927년에 리브놉스크 지역에 나우모프 민족촌 소비에트가

구성됐다[7, 75쪽]. 1925–1937년 북사할린에서 한인의 법적 지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1910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들어온

한인들과 그 자녀들은 능력과 무관하게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국민으로 인정됐다. 1910년 이후 러시아(그리고 사할린)에 온

사람들을 위해서는 소비에트 국적 취득을 위한 보다 단순화된 절차가 수립됐다. 소련의 국적취득과정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됐다. 자신을 외국인으로

선언한 한인들은 «거주형식»이라고 부르는 증명에 근거해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이동의 자유가 제한됐고 다른 지역, 심지어 극동지역

내에서조차 이주도 불가능했다. 그 밖의 것들에서 이들은 소련국적자와 동일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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