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 Page 4

 

1929년까지 한인주민 수는 안전적으로 약 487명이었고 1930년대에는 1767명까지 숫자가 늘었다[18, 51쪽]. 1930년대 말까지 다수의 한인들은

북사할린에 완전히 적응했으며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과 자신의 향후 운명을 결합시켰다.

1937년은 소련에 거주하는 수백만의 여러 민족들을 위협하는 대중적 테러와 탄압의 시기로서 소비에트 시기의 역사에 들어왔다. 이 해가 북사할린

한인들의 기록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이 됐다. 소비에트 한인들은 소련에서 가장 먼저 강제이주를 당한 민족그룹이었다. 1937년 9월 27일 사할린에서는

볼셰비키전러시아공산당중앙위원회와 소련인민위원회가 보낸 한인들을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사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결정문을 실행하기 위해서 공산당 주위원회 제일서기인 뻬. 엠.   울랸스키와 주 집행위원회 의장 아. 뻬. 그로모프, 소련내무성 인민위원부 주

담당국장 웨. 엠. 드레코프를 구성으로 하는 «트로이카»가 만들어졌다. 각 지역마다 지역별 «트로이카»가 만들어졌다[11, 160쪽]. 이들의 활동 결과로

사할린에서 1187명의 한인이 강제 이주됐다[15]. 이 비인간적인 조치는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한인의 대형 농민공동체의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러시아에서 고향을 발견하고 믿어온 사람들의 비극이었다. 공포와 도덕적 비하, 스스로의 가치에 대한 불신이 한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오랫동안

자리잡게 됐다. 남사할린에서 한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과정이 계속됐고 한인에 대한 강제이주와 동원 작업이 계속됐다.

최고절정은 1939–1945년이었다. 가라후토를 획득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 식민화 경험을 적용시켰다. 1907년 가라후토 총독부는 도요하라

(현재의 유즈노–사할린스크), 마오카(홈스크), 시스카(포로나이스크), 에스토루(우글레고르스크)의 4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17, 25쪽, 8, 127쪽].

식민화의 촉진을 위해 일본은 «북진» 정책을 진행했다. 천연 자원의 개발은 많은 인적 자원을 필요로 했다. 한국에서 값싼 노동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쓰비시», «미쓰이», «오지» 등의 기업들은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들은 일 년짜리 계약을 체결하고 다양한 조세감면을

제공하고 높은 임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예를 들면 1930년까지 «가와카미»(현재 시네고르스크) 탄광에는 약 500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있었다

[19, 8쪽]. 1920년 최초의 가라후토 주민 조사에 따르면 이곳에는 한국인 934명이 살고 있었고 그 중에서 도요하라 416명, 마오카 176명, 시스카 153명,

토마리오루(현재의 토마리) 97명, 오도마리(현재의 코르사코프) 92명이었다[11, 198쪽]. 북사할린에 대한 일본의 한시적 점령(1920–1925년)이 끝난

후 다수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함께 남사할린으로 철수했다. 이것은 «자발적 징집» – 주로 한국의 남부에서 독신 또는 가족과 함께 젊은이들이

왔었다. – 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징집의 성격은 매우 달라졌고 강제 이주적 형태를 띠게 됐다. 이 동원의

실행은 편의상 3단계로 나눌 수 있다[7, 38쪽]. 1단계(1939년 9월–1942년 2월)는 징집의 시기이며 일본기업들이 점령권력과 지역 관리들이 지원으로

실행시킨 «자발적 강제» 동원의 시기이다. 총동원 계획에 준하여 각 청구 기업에 대한 배당이 이루어졌다. 한국 농민들의 참기 힘든 생활 조건이 젊은

농민들을 징집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거절하는 경우 가족 전체가 불신자 명단에 들어가게 된다.

2단계(1942년 2월–1944년 9월)는 «국가의 조직적 징집»(관알선)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은 군수사업과 관련된

제철기업들에 노동력이 매우 부족한 것을 경험하게 된다. 1942년 2월 20일 «한국인의 일본 이주 소개서»가 발행됐다. 이 문서는 동원의 강제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1942년 2월 23일 일본 정부는 한국인 노동자의 사용에 관한 법령을 받아들이고 이에 준하여 정부 기관들은 파견하기 위한 노동자들을

직접 소개한다. 1941년 6월 괴뢰 집단인  «조선 노동 연맹»을 설립하여 공개적으로 대량의 «한국인 사냥»을 시작했다. 형식적으로 정부 기관의 소개를

거절할 수 있었지만 이 소개서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은 강제 후송을 당했다. 3단계(1944년 9월–1945년 8월)는 한국인들의 운명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기로 «징용»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1939년 공포된 «국민 징용에 대한» 법령은

1944년 9월부터 한국 영토로 확대된다. 1944년 2월에는 국민 징용에 대한 명령이 공포되어 총동원이 실행된다. 이것은 1944년까지 한국인 징집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계획했던 30만 명을 다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실행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과 가라후토의 근로 대중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기였고 나라 전체가 기아의 배급 상태에 있었다. 조선 총독 코이소 쿠니아키는 1943년 5월

도쿄의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조선은 지금 소나무껍질과 쑥, 다른 풀들로 연명하고 있다»[7, 41쪽]. 이 시기 사건의 목격자들의

몇 가지 증언을 들어보겠다. 전 사할린 한인 연맹 이춘현 회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한 일본인의 꼬임에 넘어가 우리 아버지는 18살 나이로 돈을

벌기 위해 사할린에 갔다. 당시 한국인들은 대부분 벌목공이나 철도건설, 광산, 군사기지건설 현장에서 일했다»[2].

유즈노–사할린스크 주민인 사할린주한인협회 전 명예회원 故 조종구(1928–2005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5년 2월 나는 18살 나이로 가라후토로

강제 이송됐다. 고향인 문경을 지나 대구와 부산을 거쳐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오타루로 이송됐다가 나이호로(현 고르노자보드스크) 광산으로 가게

됐다»[1]. «새고려신문» 편집국에서 일하는 사할린 한인 젊은 세대 대표와의 만남에서 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한인회 전 노인회 우정구 회장

(1934년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할린으로 가는 노동자를 징집한다는 것을 알고 1942년 우리 아버지는 스스로 신청을 하고 혼자 떠났다. 1930년대

우리 부모님은 한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고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적은 토지를 소유한 가난한 농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사할린에서 돈을 벌어서 집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나를 학교에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년 후 9살 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으려 사할린으로 갔다. 아버지가 광부로 일하시는 가와카미 탄광에 도착해서 우리는 천막에서 살기 시작했다»[21].

가라후토로 징집된 한국인들의 처지는 끔찍했다. 대부분 군용 비행장과 철도 건설, 탄광, 목재가공 등 고되고 위험한 조건에서 일을 해야 했다.

사할린주한인협회 전 노인회 故 박해동 회장의 이야기는 앞서 말한 내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라고 할 수 있다. «1943년 1월 나는 고향마을에서

잡혀 부산으로 이송됐다. 경찰서에서 죄수 작업복으로 갈아 입혔다. 일주일간 우리는 창고에 갇혀 있었다. 와카나이에서 배에 태웠다. 한국인 42명은

가장 낮은 선창의 철제 바닥에 짐 꾸러미처럼 던져졌다. 캄캄한 밤에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 항구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나이부치

(현 브이코프) 탄광으로 실려 갔고 즉시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우리는 석탄을 캐기 위한 기계에 불과했다.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서서 밥을 먹고 교대를

위해서는 광부 1인당 2톤을 캐야 했다. 안정 장치는 전혀 없었고 광부들이 붕괴 사고를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4].

최악의 생활 환경과 힘에 부치는 노동, 일본인 감독관과 그 한국인 앞잡이들의 천대로 인해 기아와 피로, 절망에 빠진 탄부들 중에 도망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붙잡혀 다고베야에 갇혔다. 일본과 가라후토에서 노동력을 이용하는 특성은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와 중세 시대에 널리 사용하던

일꾼들에 대한 박해를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착취의 가장 섬세한 형태 중의 하나가  «다코베야» (또는 강고쿠베야) 체계였다.  이것은 강제로 만들어진

노동자 기숙사의 종속 형태였다. 이것은 룸펜–프롤레타리아 징집을 통해 토지 건설 작업의 하청 회사들에 의해 조직됐다[13, 13쪽]. 박수호는 다코베야

발생을 설명하면서 «일본의 백과사전에서 다코베야는 홋카이도와 사할린 탄광에서 죄수들처럼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기숙사이다. 이 감금자들을

다코라고 불렀다»고 쓰고 있다[7, 44쪽]. 다코는 강제노동을 위해 다코베야 수용소에 있던 감금자들이다. 만약 1886년 홋카이도 다코베야가 탄생하던

시기 다코가 정말 죄수들이었다면 1938–1945년 이들은 강제로 이송된 한국인들이었다. 코르사코프 시 주민인 故 박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벌목장에서 일했고 우리는 나무를 베서 떠내려 보냈다. ...… 우리의 노동 조건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도주했다. 

붙잡힌 사람들은 반죽음이 될 때까지 구타당했고 다코베야에 집어넣었다»[11,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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