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 Page 5

 

다코베야에는 가혹한 규율이 이었다. 일본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신체적 징벌을 가했다. 환자도 일을 하게 만들었으며 손으로 끌어냈다. 기준량을

완수하지 못하면 식사를 주지 않았다. 기준량은 다른 곳의 두 배였다. 한국인들은 «한번 다코베야에 들어가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고 말했다

[11, 203–204쪽]. 가장 고되고 위험한 구역에서 일을 했지만 다코의 노동은 전혀 보장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코는 항상 채무자로 남게

되어 다코베야에서 평생을 남게 되는 원인이 됐다. 다코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서도 안 되고 수갑을 채웠으며 질서와 규칙을 위반한 자는 가혹한

몽둥이질을 당해 죽는 일도 다반사였다. 1944년 하반기 태평양에서 군사행동이 활발해졌을 때 일본은 또 하나의 강제 징집을 시작했다. 1944년 8월

11일 일본 정부의 결정에 따르면 약 만 명의 사할린 광부들이 가라후토에서 일본의 이바라기 탄광과 큐슈 탄광으로 이송됐다. 이들 중 3190명이 강제

징집된 한국인들이었다. 45명은 이바라기 탄광으로 후송되고 남은 3000명은 큐수 탄광으로 갔다. 광부들에게는 가족을 동반하는 것이 금지됐다.

해상에서의 군사 활동 때문에 가라후토에서 석탄을 유출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그래서 12개의 탄광이 폐쇄됐고 광부들은 다시 작업을 위해 일본으로

동원됐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들은 사할린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만날 수가 없었다[25, 6–8쪽].

 «이중징용»이라는 2차례 강제 동원된 한인 광부들의 자녀들로서 사할린 사회단체 대표들의 회상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진길(1944년생): «아버지의 이름은 소자근(1905년생), 어머니는 이점순(1917년생)이다. 1942년 아버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제 동원을 당해서

토로 탄광(현 사할린주의 샤흐초르스크)으로 이송됐고 그런 다음 1944년 다시 큐수 탄광으로 동원됐다. 나는 아버지가 떠나고 난 3개월 후에 태어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6]. 임태환(1934년생): «내가 7살이 됐을 때 나의 어머니는 아이들 둘을 데리고 토요하타

탄광(현 사할린주의 레소고르스크 마을)에 강제 동원된 아버지를 찾으려고 사할린에 갔다.  이때는 중일전쟁의 절정기였다. 그래서 1944년 9월

아버지는 이바라기 탄광(일본)으로 이송됐다. 가족은 사할린에 남겨졌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는 우리가 모두 전쟁 중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갔다»[5]. 하경수: «나의 아버지 하인준과 삼촌 두 명은 사할린 «미쓰비시»사의 토로 탄광(현 샤흐초르스크시)으로 강제 이송됐다. 1944년 10월

아버지는 다시 일본의 큐슈 탄광으로 동원됐다. 사할린에 가족과 할머니, 숙모가 남았다.  1945년 4월 여동생이 태어났다. 가장이 없어서 여자들과

아이들은 굶주렸고 여동생이 태어나고 한 달 반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는 아버지처럼 두 번이나 강제 동원된 사람들

세 명과 함께 밀수업자들의 배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할린에 돌아왔다. 1988년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친척들의 초청장을

받았지만 그 다음날(9월 29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26, 109쪽].

일본 식민 체제에서 한국인에 대한 동화 정책은 모든 영역에서 진행됐다. 최초시기에는 주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식민자들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인종적 동일성에 대한 이론을 확산시켰다.  그런 다음 한국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 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한국인들을

일본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름과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 정책은 민족 의식과 한국 문화, 자주성을 없애는 데 방향을 맞추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민중을 순응하는 식민지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정책은 교육 분야에서도 실행됐다. 1908년 가라후토

교육 발전에 대한 일본왕의 특별 칙령이 공포됐다. 1935년에는 학생 43.495명이 공부하는 210개의 초등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됐다.

23개의 토착민(아이누, 오로크, 니브히 등)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도 설립됐다. 하지만 한인 학교는 없었다[14, 8쪽].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왕은 라디오로 일본의 패전을 공포했다. 이를 들은 일본인들은 죄 없는 한국인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소비에트군의 공격병 중에 한국인들이 있었다는 소문이 흘러 들기 시작했다. 사실 이것은 오로크, 길랴크, 니브히 등의 사할린 토착민들이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조선인들은 러시아인들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고 이

«개»들이 그들을 도울 것이다. 그들은 러시아의 간첩들이다. 그들을 죽여야 한다»[9, 28쪽]. 그리고 실제로 죽였다.  레오니도보 마을(사할린)에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려 대한민국에서 오는 서울시 주민 김경순(78세)의 말이다: «1945년 8월 18일 가미시스카(현 레오니도보)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인 18명을 천막에 넣고 산채로 불을 질렀고 거기에 아버지 김경백(54세)과 오빠 김정대(18세)가 있었다. 사할린의 북쪽으로부터

소비에트 군의 공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 장교들이 한국인들을 소비에트군의 첩자라는 죄를 씌워 헌병대로 끌고 갔고 재판도 조사도 없이

천막에 넣고 불에 태워 죽였다»[3, 398–399쪽]. 카. 가포넨코가 또 다른 비극적인 사건을 이야기한다: «1945년 8월 20–23일 일본인들이 미주호

마을(현 포좌르스코예 촌)에서 27명의 한인 주민들을 칼로 찔렀는데 그들 중에는 여자 3명과 아이들 6명이 있었다»[9, 28쪽]. 진격해오는

소비에트군을 피해 일본군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없앴고 쌀이며 다른 음식물에 진흙을 뿌리고 저수지에 석유를 부었다[10].


 

[1][ ]  안의 번호는 권말의 참고문헌 번호에 따른 출처를 나타낸다.

[2] 1섬은 약 180킬로그램이다.

[3] 1938년에는 하산 호수 인근, 1939년에는 할힌골강 인근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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