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 Page 6

2.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역사

 

 1)      머리말

사할린 한인의 문제가 분명히 식민지적 유산이지만, 이것은 전후 냉전질서에 의해 완전히 왜곡됐고, 이들은 적어도 47년 간은 완전히 역사의 미아였다.

2010년 실시한 러시아 인구조사에 의하면 사할린 인구는 497,973명이다. 그런데 이 인구조사는 공식적으로 민족 구분을 하지 않고 있어 현재 사할린에

몇 명의 한인 동포가 있는지 공식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사할린 주 정부 비공식 통계는24,993명으로 나와 있다. 한인은 러시아인, 다음으로 많은 전

사할린주 인구의 5.3%를 차지하며, 전체 한인의 절반 정도는 주청 소재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 살고 있다.

이 글에서 사할린 한인은 1930년대 이후 1990년경까지 사할린에 살았던 한인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할린 한인은 1870년부터 사할린에

거주했으며, 1905년 이후 1945년까지 남사할린은 일본이, 북사할린은 러시아가 지배했다. 이 기간에 북사할린에는 비교적 소수이지만 한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연해주의 한인과 더불어 최초의 사회주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조치에 의해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했다. 이 시기에 가라후토(일본령이었던 북위 50° 이남 사할린지역)에 일본을 경유하여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어업이나 광업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주로 한국의 남부지역 주민들을 여러 형식으로 이주시켜 노동을

하도록 했다. 새로이 정착한 한인들에게는 미리 와 있던 한인들이 ‘선주민’이었다. 당시 가라후토를 중심으로 1920년에는 934명, 1934년에는 5,813명이

거주한 기록이 남아있고, 1939년 이후에는 자유모집(1939.9–1942.2), 관알선(1942.2–1944.9), 징용(1944.9–1945.5) 등으로 약 43,000 여명의 조선인들이

사할린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1945년 이후 이들은 한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반면, 새롭게 소련당국은 사할린 한인의 사회주의 교육과 조직화를 위해 중앙아시아에서 한인들을

선발하여 사할린에 파견했다. 사할린 한인들에게 이들은 “큰땅배기”로 불렸는데, 이들은 1970년대에 대부분 돌아갔다. 아울러 북한은 사할린의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해방 직후부터 북한 노동자들을 파견했다. 이들 중 일부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할린에 남아 사할린 한인이 됐다. 공산당

체제하에서 대부분 한인들은 탄광, 국영농장, 건축현장 등에서 일했으며 사무직이나 공무원으로 근무한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냉전체제로

인하여 냉전기간 동안 사할린 한인은 한국으로의 귀환은 물론이고 한국 내 가족과의 의사소통이나 교통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한국과 소련의 국교가 수립된 이후(1985) 이들은 다시 고향과 조국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으로의 귀환은 이들의 희망이었다. 즉 수만 명의 한인들이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의 기쁨을 나누지 못한 채 고립된 채 살아 오다가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약간의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소련 해체

이후 극히 제한된 숫자이지만 일부 고령자들이 한국으로 귀환했다. 이와 같이 그 동안의 세월은 적어도 1세들에게는 정지한 세월이었는지는 모르나

사할린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인 2세나 3세들은 또 사정이 달랐다.

    이와 같이 사할린 한인은 어느 재외한인들보다 동직적인 역사적 경험의 공동체이지만, 내부 구성은 의외로 다양하다. 이렇게 보면, 사할린 한인은 첫째, 식민지시기에 사할린으로 이주한 집단,

    둘째, 그들의 2세와 3세 자손들, 셋째, 중앙아시아나 북한에서 1946년 이후에 유입된 소수의 집단으로 구성된다. 이들의 유입경로가 다른만큼 서로 다른 인생 경로를 거쳤고 서로 다른

    세계관를 지녔다. 이들은 ‘조국’ ‘고향’에 대한 기억의 강도가 다르다. 사할린 한인은 오늘날 1, 2, 3, 4세로 나누어지며, 이들은 상당한 정도의 의식과 정체성의 차이를 갖는다. 1세는 이주할

    당시에 자신의 노동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성인이었던 사람을 일컫지만, 맥락에 따라 그 외연이 달라지게 된다.

    사할린 한인의 경우 특히 ‘1세’의 정의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귀환정책이 이 1세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세라는 규정은 사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새롭게 규정된다. 고국방문사업, 그리고 영주귀국사업이 점차 가시화되면서 정책대상인 ‘1세대’란 누구인가에 대한 규정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개편)”

    기에 이르면 사할린 한인사회는 점차 2세들이 현실적 지위와 영향력에서 우세를 보이게 되며, 이 과정에서 1세와 2세의 분화가 명확해졌다. 1세가 심리적으로 완전히 러시아인들과 동화되지

    않은 반면, 2세와 3세는 사정이 다르다. 이것은 귀환에 대한 입장의 분화, 새로운 갈등, 나아가 새로운 이산이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실제로 사할린 한인의 귀환이 가시화된 이후

    영주귀국 및 보상문제를 둘러싸고 한인사회 내의 입장 차이 및 갈등양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94년 5월에 일본 외무부에 제출한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및 보상문제에 관한 9개 항목 기본요구’의 내용을 보면,

 

   1. 1945년까지의출생자들을 1세로취급해보상할, 1946이후출생자들을 2세로취급해보상할,

   2. 한국으로의영주귀국은연령을기준으로단계적으로실시하고 1938이전출생자들을우선적으로귀국시켜희망하는가족과동반귀국할있도록조건을조성할,

   3. 거주지는본인이희망하는곳으로개인소유의주택을보상하고 1세들에게는사망할때까지생활비(치료비포함)보상할,

   4. 이후단계적으로귀국하는 1938이후출생자들에게도같은조건으로생활을보상할,

   5. 영주귀국자들의소유재산을모두한국으로가져가는것이가능하도록하고연금생활자의연금은한국으로보내도록러시아정부에게요구하는,

   6. 한국으로영주귀국하지않고사할린에계속남는것을희망하는한인들에게는 1 1천만엔보상할,

   7. 사할린에거주하는한인들의민족문화재생을위해중앙도시에민족학교와문화센터를건설하는것을러시아정부에게요구할,

   8. 사할린거주한인들이이중국적을취득할있도록러시아와한국정부에게요구할,

   9. 일제시대, 강제연행되어사할린에거주했지만생활사정으로러시아본토에이주한한인들에게도사할린한인들과같은조건으로보상할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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