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 Page 7

2) 일제강점기한국어교육실태(1906 – 1945)

사할린 지역에서 한국어를 사용되게 된 계기는 사할린 한인들의 이주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 정부는 전문가들을 구성해서

화태(가라후토의 한자형 표시) 연구를 위촉했고, 식민의 성공 여부를 심도 있게 조사했다. 1909년 4월 화태청은 «토인자제»의 교육을 위한 교육소를

설치했다. 일본은 사할린을 점령하고 원주민들을 “토인”이라고 불렀고, 그들에 대한 특별 교육을 “토인교육”이라는 장르에서 다루었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 쿠릴과 사할린을 교환한 후에 1879년부터 토인보호자금조성의 목적으로 이 지역에 토인어장의 제도를 설정했다. ...동해안의 낙범,

서해안의 다란박 2개소에 교육소를 설치하고, 소학교령에 준거한 수업을 개시했고, 1931년 경에 다란박 지방은 일본인의 왕래가 많아졌다.

러시아보다는 일본의 원주민 정책이 훨씬더 적극적이었고, 일본은 원주민들을 동화하는 정책을 사용했다(러시아 사할린․연해주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www.nfm.go.kr/_Common/Download.nfm? filename=01. pdf&dir... 검색일 2014.05.14.).

일제 시대에 가라후토에 조선학교는 전혀 없었다. 그 당시 가라후토에 30만 여명의 일본인들과 2만 7천여 명의 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약 13만 700여명은 15세 미만의 아동들이었다(박수호, ''사할린의 한인들'', 1993). 1906년 8월에 블라지미롭카(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촌에 첫

일본 소학교가 개교됐다. 그 학교에서는 20명의 일본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같은 해에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 시)와 마오카(현 홈스크 시)에서도

소학교들이 열렸다. 1908년에 가라후토에서의 교육제도에 대한 일본천황령이 나왔는데 1940년도에 가라후토에 140의 소학교, 126의 중등 학교에서

1604명의 교사들이 6만121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외에   4개 김나지야(김나지야–중등 교육기관), 7개 여자 김나지야와 11개 중등

전문학교들이 있었다. 1939년에 도요하라(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에서 사범전문학교가 문을 열었는데 7 반의 학생들을 23명의 교사들이 가르치고

있었다.  가라후토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을 위해 시스카(현 포로나이스크 시)와 다른 곳에서 학원들이 세워졌는데 일본말만을 가르쳤다.

1만 6천54명의 조선인들을 위한 학교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조선인들이 모국어로 말하는 것이 금지됐다. 그래서 일제 시대에 화태에는 조선학교가

전혀 없었다 (박수호, 1993).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일제에 강제 병합되어 국권이 침탈되고 식민지로 떨어졌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의 기본 목적은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을

육성함을 본의”로 하고, “시세(時勢)와 민도(民度)에 적합”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차별주의에 입각한 동화주의 교육정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자각은 그들 식민지 정책에 장애가 되므로, 조선인들의 우민화가 기본방침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들의 교육은

초등학교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고, 초등교육을 통해 식민지배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을 육성하고자 했다. 곧 식민지인들에게 불필요한 고등교육을

억제하고, 일본어 보급과 신민 교육을 위한 보통교육, 하급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한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식민지 교육의 목적은 우리 민족의 민족의식을 없애고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인들에 대한 교육은 일제

신민으로서의 자질과 품성을 갖추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시세에 적합한 교육을 한다는 명목으로 실업교육이 중점적으로 실시됐다. 이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하급 관리·사무원·근로자 양성에 그 목적이 있었다. 한편 교육 과정에서 일본어 보급에 역점을 두어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파괴하고, 일본의 언어와 문화를 강요한 동화주의 정책을 펴나갔다. 이에 따라 역사 교육에서 역사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 일본사를 의미했으며,

우리 역사는 조선사로 일컬어지며 일본사의 한 부분으로 언급될 뿐이었다. 곧 일제 식민지 교육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민족과 자주 의식을 몰각한

식민지 인간의 배양에 있었던 것이다(이혜영, 윤종혁, 류방란, 한국 근대 학교 교육 100년사 연구(II) : 일제 시대의 학교 교육, 한국교육개발원,

1997년 12월 1일).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고, 1941년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다. 일본은 조선 영토를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면서 조선 민족을 침략 전쟁에 앞세우려는 동화정책을 전개했다. 일제의 대륙침략 전쟁은 대동아 건설로 미화되고,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조선 민족의 인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이른바 ‘내선일체’, ‘황국신민’이란 말이 통용됐다.

일제는 식민사학에서 내세우는 ‘타율성’론을 역사 교육에 적극 도입하여 이용했다. 조선은 역사적으로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아서 자주독립의 권리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에 예속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로 조선이 번영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주인이고 조선은 일본의 하수인

또는 노예에 불과한 존재로서 간주하여 조선 역사를 왜곡해 가르쳤다. 1938년 3월 15일 발표된 소학교 규정에 따라, 역사 교과서는 『초등국사』 권1․2를

두었다. 2차 조선교육령 때 일본사 속에 조선사가 일부 목차로 제시됐으나, 이 시기의 교과서에는 일본사만이 목차로 편성되고 조선사에 관한 내용은

배제됐다. 교과서의 내용은 한반도가 일본에 역사적으로 종속되어 있었고,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은 조선인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며, 조선인들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일본 천황’의 신민이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중등학교의 역사 과목은 일본 및 외국의 역사 지리로

편제됐는데, 교과서의 내용은 초등학교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으며 외국사에 관련된 내용이 첨가됐을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일제는 교육을 전쟁 수행의 한 수단으로 몰아가 조선 민족의 민족정신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우선 각급

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사 등을 국민과로 한데 묶었다. 그 후 1941년 초등학교령을 발표하여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했다. 초등학교 규정에 제시된

국민과 국사 교과는 황국사관에 따른 ‘일본 천황’ 중심의 역사 서술로 ‘천황제’의 일본 제국주의 체제를 옹호했다. 일본이 일찍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왜곡된 내용은 이전 시기와 동일하게 서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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