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 Page 8

 

황국신민의서사 

我等ハ皇國臣民ナリ、忠誠以テ君國ニ報ゼン

。와례라와 고–고구 심민나리 쥬세이못데 궁고 구니 호–젱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我等皇國臣民ハ互ニ信愛協力シ、以テ團結ヲ固クセン

。와레라 고–고구 심민와 다가이니 싱아이 교–료구시 못데당게쓰오가다구셍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我等皇國臣民ハ忍苦鍛錬力ヲ養イ以テ皇道ヲ宣揚セン

。와레라 고–고구심민와 닝꾸단렝지 가라오 야시나이 못데고–도–오셍요–셍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황국신민서사, ko.wikipedia.org/wiki/, 검색일 2014.05.12.)

«당시 나는 일본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는데 성명도 일본성명으로 바꾸어지고  ''야스다''라고 했으며, 우리말로 못하고 일본말로 글을 가르쳤기에

공부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또 일본인아이들과 함께 공부했으나, 그들은 언제나 우리 조선아이들을  '조센나빠''(조선생채)라면서  깔보고  없이

보고 놀렸던 것이다»(안명복, 78).

«나는 1940년 조선 강원도 양양군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교회부속 국민학교에 다니다가 강제 징용당한 부친을 찾아 가라후토에 와서

1940–1946 년간 나이부치(현 브이코프) 탄산 일본 초등 학교에 다녔다. 전과목은 일본말로 했고 조선말 시간은 없었다»(전상주, 81).

«1938년에 조선 경상북도 의성군 안병 일본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5학년까지 다녔다. 1943년도부터 1946년까지 가라후토에서 일본학교 5–8 학년에서

공부했다. 교과는 일본어, 산수, 일본역사, 일본지리, 음악, 기술, 체육, 미술, 동물, 자연, 사회, 도덕, 필법, 수공, 원예농업 등등이었고 1938–1941년

사이에 조선어도 일주일에 한 시간씩 배웠다. 모든 교과서는 일본어로 출판됐고 조선 총독부가 확립한 것이었다»(정태식, 84).

«1943년에 아버지 따라 온 식구가 가라후토(사할린)에 와서 그 해 일본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까지 2 학년까지 다녔음. 가라후토에서 일제시기만큼

학교에서 전적으로 일어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일본문학, 산수, 도화, 도덕교양을 주는 수신 등 과목이 있었던 것 같다.

다 기억이 되지 않음»(석혜경, 78).

일제 강점기의 초등교육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분리하여 이루어졌다. 일본인에 대한 초등교육은 일본과 동일한 학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중등교육을

위한 예비교육도 이루어졌다. 일본인의 초등교육은 6년제 소학교에서 행해졌다. 일본에서 1909년부터 시작된 2차 의무교육이 조선에도 적용되어 조선

내 일본인은 별도의 절차 없이 무료로 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일본인의 대부분이 초등교육기관에 취학했다.

1941년 4월에는 소학교가 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됐으며, 대도시에 있는 일부 국민학교에는 6년간의 보통교육과정을 마친 자가 수료할 수 있는

2년제의 고등과가 설치되기도 했다. 이 고등과에서는 중학교에 진학할 여유가 되지 않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중학교 교과목 일부를 교육했다.

조선인에 대한 초등교육은 일본인과 다르게 이루어졌으며, 일본인의 초등교육에 미치지 못하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 초기(조선교육령 시기) 조선인의 초등교육은 보통학교에서 이루어졌다. 보통학교의 교육연한은 3년에서 4년에 불과했으며, 교과목 구조도

일본인이 재학하는 소학교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또, 보통학교는 의무 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운영 기금의 일종인 사친회비를

학부모가 납부해야 했다. 보통학교의 시수는 소학교의 시수보다 주당 3–8시간이 적었다. 또, 교과목도 국어(일본어)에 편중되어 있었고, 국어 이외의

과목은 수신과 산수조선어 정도에 불과해 식민통치에 순응하고 식민지 산업화에 필요한 저급한 노동력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전쟁이 심화된 시기인 1943년에 조선 총독부는 조선교육령을 또 한번 개정했는데, 이 개정에서 조선인 소학교의 명칭이 국민학교로 바뀌게 됐다.

이 개정에서는 수의과목으로라도 잔존했던 조선어 과목이 완전히 폐지되며, 학교 내에서 조선어의 사용이 금지됐다. 일본이 참여한 전쟁이 점점

심화되면서 학교를 전쟁 동원의 일환으로 간주하여 국민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에서의 교육 왜곡이 급속도로 진행됐는데, 국민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업은 파행적으로 진행됐으며, 학생들은 군사교육과 각종 노무동원에 내몰리게 됐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들에게 보통학교(소학교, 국민학교)는 사실상의 최종학교로 인식됐다. 때문에 많은 교육계 인사들이 보통학교의 연한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보통학교의 확충운동을 벌여나갔다. 일제 강점기 시기 보통학교 졸업자는 사회에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보통학교 졸업자가 보통학교

비졸업자보다 임용되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했으며, 보통문관시험의 응시자와 합격자 다수도 보통학교 졸업자가 차지했다. 각종 은행과 회사, 상점의

취업에도 보통학교 학력이 필수로 되면서 보통학교와 그 졸업자의 사회적 위상은 일제강점기 내내 높아져갔다.

보통학교의 교원 대부분은 조선내의 사범학교 졸업자와 일본의 사범학교 졸업자였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대부분의 교원이 일본 사범학교 출신자로

일본인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조선인 사범학교 졸업자가 늘어나자 조선인 보통학교에는 조선인 교원이 배치됐다. 일본인 교원이 조선에 파견되는

경우는 본봉의 0.5배에 해당하는 외지수당이 별도로 지급됐다. 이 외지수당은 조선인 교원이 일본이나 만주국에 파견되는 경우에도 지급됐다(한국 근대

학교 교육 100년사 연구(II): 일제 시대의 학교 교육, 이혜영, 윤종혁, 류방란, 한국교육개발원, 1997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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