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 Page 9

 

3) 소련시대의교육실태(1945 – 1964)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시대에 쓰지 못했던 민족어와 민족문자를 배우기 위해 한인 밀집 지역에

조선학교를 설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일본사람들이 귀환하기 전까지는 가라후토 여러 마을에는 일본소학교가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아이들은 일본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일본말만 해야 했던 시기가 이미 지났고 전혀 모르는 러시아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했으며

러시아어를 배워야 했다. 소련 당국은 1946년경에 모든 조선인 아이들이 일본학교에서 일본글과 일본말을 배우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그대로 남겨두면

안 된다고 했다. 사할린 여러 곳에 조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인의 귀환이 끝나면서 일본학교가 폐쇄됐기에 거기에 다니던

학생들이 조선학교에 넘어 갔다. 학교 설립 애초에 고정 학생이 별로 없었다. 일본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후 조선학교에 가서 조선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차츰 나타났다. 1945–47년에 유즈노–사할린스크(전 도요하라) 주 민간 관리국이 일본학교를 조선 학교로 개편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947년 1월 17일발 제 30번 유즈노–사할린스크 주 민간 관리국의 정령에 의하여 모든 조선학교에서 1947년 1월 20일부터 일본 교육제도를 소비에트

교육 제도로 개조했고 교안은 비 러시아 학교의 것을 따르게 했다.

 ▲(좌)유즈노사할린 주 민간관리국 지령 №360 «조선학교들의 보충 개교에 대하여» 1946년 8월 28일호(기아소 프 171오1드31 르43)

▲(우) 유즈노사할린 주 민간관리국 지령 №30 «조선학교들을 소련교육시스템으로의 개편에 대하여» 1947년 1월 17일호(기아소 프 171오1드68 르104)

 

1947년 1월 15일경에 사할린에 조선소학교 수는 27, 칠년제학교는 8이었다. 1학년 학생들이 837명, 2학년생 – 665명, 3학년생 – 529명,

4학년생 – 500명, 5학년생 – 204명, 6학년생 – 161명, 7학년생 – 42명, 총 3004명이었는데, 우글레고르스크 칠년제학교에서 342명, 코르사코프

칠년제학교 – 316명과 유즈노–사할린스크스 칠년제학교에서 217명이 공부하고 있었다(기아소. 프.171. 오쁘.1. 드.68. 르.102,105,106).

한인의 교육열이 대단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할린 여러 지방에서 조선 학교를 열어 달라는 신청에 유즈노–사할린스크 주 민간 관리국은

1946년 8월 28일 제360호 지령으로 당년 9월 1일부터 우글레고르스크 구역 히가시 샤쿠단에 두 반의 소학교(40명), 도마리키시(포로나이스크 구역)

소학교(50명), 가와카미(유즈노–사할린스크 구역) 2반짜리 소학교(60명) 등 9개 촌락에서 소학교를 개설했다(기아소 프. 171. 오쁘. 1. 드.31. 르. 43).

제일 먼저 열린 조선 학교는 1945년 10월 에수도로(현 우글레고르스크 시) 와 시리도리(현 마카로브 시)에서 개교한 소학교들이었고, 그 다음 당년

12월에 또 사할린 여러 곳에서 열린 7 개의 학교들이었다(쿠진 '타인의 이름과 지배하에서' 새고려신문, 2002년5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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