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 Page10

 

 

 

 

 

 

 

 

 

 

 

 

 

 

 

 

 

 

 ▲마카로브 시 제2호 조선 칠년제학교9회 졸업(1955)(박승의 사진첩에서)

1945–46과 1946–47년간 조선학교 실태에 대한 조사서에 의하면 «1946년 초에 사할린 주 인민 교육청은 조선아이들을 일본아이들한테서 분리시켜

자립적 조선학교를 설립했다. 1945–46 학년에 남부 사할린에 2300명의 어린이를 망라한 27 조선소학교, 1946–47학년초에 3000명이 공부하는 8 개의

중학교(칠년제)와 28 개의 조선소학교(4년제)가 설립됐다. 이들 조선학교에서 사할린 주 인민 교육청이 지방 주민들 중에서 뽑아 임명한 110명의

교사들이 일하고 있다. 이 교사들은 일본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일본 교육제도에 따라 교무를 조직했다. 그래서 1946–47학년초에 사할린 주

집행위원회는 조선학교들을 소비에트 교육제도에 맞게 개조하기를 결정했다»(기아소 프.171.오쁘.1.드. 31.르.168).

유즈노–사할린스크의 한인밀집거주지역인 블라지미롭까 마을(현 유즈노–사할린스크 제9학교 인근)에는 제8번 학교가 설립됐으며, 이 학교의 학생수는

1947–50년에 200–300명, 1951–55년에 500–600명, 1956–59년에는 1000여명에 달했다. 또한 코르사코프 시, 홈스크 시, 포로나이스크 시 등 한인

동포가 많이 거주한 지방도시에도 조선어를 사용하여 교육하는 학교가 있었으며 현재 사할린에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65대 이상의 한인동포

대부분이 이러한 학교를 다녔던 사람으로 파악되고 있다. 1940년대 사할린 토마리에서 최초로 한글 학교를 설립한 허조 선생님은 토마리 시에서 가장

학문이 높고 애국심 많은 분이었다. 그는 1946년경에 모든 한인 아이들이 일본학교에서 일본글과 일본말을 배우는 것을 보고 «이리하여 우리말이

사라지지 않겠는가»하는 공포감을 느끼곤 했다. 그는 1947년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있은 첫 한국어 교사

강습을 한 달 반 동안에 끝마치고 토마리에서 한글학교를 설립하여 교편을 잡게 됐다. 모국어와 고유한 민족 문화와 전통, 풍습을 되살리려는 것이

그의 목적과 과업이었다.

«…...저도 일본 학교 2학년에서 수업을 마친 후 한국어를 배우려 아버지 학교에 달려가곤 했어요. 아버지는 «우리 국기를 꼭 알아야 한다»면서

태극기가 묘사된 그림을 두 개 그려, 하나는 익히도록 학교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애국가도 가르쳐 주었습니다»면서 허남훈씨(허조 씨의

차남)는 학창 시절을 회상했다. 소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허조씨는 더 많은 요원들이 교편을 잡게 하여 칠년제학교도 만들었다. 처음에는 교사들이

부족했으나 나중에는 큰땅에서(중앙 아시아) 과목별 교육 조선선생들,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서 약 500명의 동포들이 토마리 어장에 파견돼

왔는데, 그 중에서 한글 교사로도 취직시킬 수 있었다. 그 동안 그는 러시아어도 연마시키면서 학력을 높여 구역 교육부 인스펙토르(장학관)로서도

활약했다. 그 직에 있으면서 한인들이 밀집된 크라스노고르스크, 벨린스코예 지역 학교들에 한글 수업이 있도록 교사들을 파견시켰다('향수감을

달래면서', 새고려신문, 2002년1월25일호).

 «말로는 조선인학교라 했으나 학생들은 모국어를 거의 몰랐고 아동들을 교수할 자격 있는 교원들과 교재가 전혀 없었다. 일본 시대에 조선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중에서 우리글과 말을 잘 소유한 유지들이나 또는 해방 전에 남 화태에서 일본중학교를 졸업한 사람, 이런 학교에 재학중이던

사람들 중에서 우리 민족어를 괜찮게 소유한 사람들이 교사로 선발됐다. 무엇보다도 조선어 교과서가 없어서 난관을 겪게 됐다. 다행히도 그 누가

조선어 1학년 교과서를 조선에서 화태까지 가지고 와서 오래 보관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교과서에 근거하여 조선인 유지들이 등사판을 이용하여

원문을 등사한 것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모아서 손으로 교과서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가갸거겨고교, 소 소나무…»이렇게 우리 글과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몇 해 후에는 소련 인민 교육부에서 발행한 조선어 교과서를 가지고 1학년부터 상급반까지(이 조선어 교과서 편찬자는 김병하,

차원철 및 기타) 우리 민족어를 배우게 됐다. 기타 다른 과목 교과서도 러시아판을 조선어로 번역하여 발행되어 주 내 조선학교 학생들의 수요를

충족시켰다. 당시 소련에서 실시되고 있던 중등 의무 교육제의 혜택으로 조선인 아동들도 무료로 또 의무적으로 중등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주 내에는 조선학교 수가 수십 교가 됐고 학생 수도 많이 증가됐다. 그러니 가장 날카로운 문제는 교원들의 부족이었다. 하기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주

교원자질향상소에서 단기간 교원 강습을 조직해 대용 교사들을 양성하여 지방 학교들에 파견했고 또 중앙 아시아 가맹 공화국들에서 중등 및 고등 사범

지식을 소유한 조선인 교원들을 사할린으로 파견하여 부족한 교원 수를 보충시켰으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많은 대용 교사들의 자질도 요구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신국웅, '한글 교육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새고려신문 2002.8.30. 제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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