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사할린한인의운명역사, 현황과특성

 

 

 

차례

 

1. 사할린에서 한인:  형성의 역사와 문화 ……………………….………………   2

2.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역사 …………………………………………………….     22

3. 사할린 한인 귀환운동의 선구자들……………………………………………..    45

1) 사할린과 한국을 연결한 박노학………………………………….………….       45

2) 사할린에서의 한인 귀한운동과 허조 ………………………………..…………. 57

3) 박노학 기념사업회의 결성 추진 …………………………………..…………      60

4. 사할린 한인 문제: 전후 처리와 처우개선 ………………………………….….. 68

5.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민족문화정체성 형성과 변천과정 연구  –

설문조사를 중심으로 – …………………………………………………………………. 144

참고문헌 …………………………………………………………………………….          171

저자소개 ………………………………………………………………….…………          177

 1.      사할린한인: 형성의역사와문화

 

2002년 인구조사자료에 의하면 사할린에는 2,9592명의 한인이 있다(사할린 주 전체 주민 수는 54,6695명이다)[16, 120쪽][1].  한인 인구는 러시아인

다음으로 많다(5,4 %).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형성은 몇 개의 단계를 거쳤다.

1단계(1870–1905):  한인들의 사할린 이주 시작기이며, 조절 불가능한 자연 발생적 이주의 시기이다. 이 시기 한인들은 주로 더 나은 생활을

찾아 조선의 북부 지역 (함경도)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러시아에 최초로 한인들이 출현한 것은 1863 년이고 러시아는

중국과 1858년과(아이훈), 1860 년에(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고 1861년에는 상페체르부르크에서 이에 대한 의정서를 작성했고 그 결과로 연아무르와

우수리스크 지역은 러시아제국의 영토가 됐다.  1861년 러시아 행정국이 이 지역에 생기기 전까지 이 지역 주민의 민족 구성에 대한 공식적인 수치는

알 수가 없다. 연해주 영토는 한국과 인접해 있고, 따라서 이곳에 개별적으로 한인들이 출현했던 것은 인접한 함경북도(조선)와의 국경이 부재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할린에 최초로 한인이 출현한 것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본 작가인 이회성은

이것이 1860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고[17, 14쪽], 박수호는 1870년이라고 말하고 있다[7, 18족].  아. 찌.  쿠진은 박수호[11, 49쪽]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마지막 견해가 보다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869년 사할린 섬은 유배와 유형지로 공포됐지만 최초의 유형자들은 이미1858년에 있었다[8, 89쪽]. 1890년 사할린에 온 안톤 체홉은 개인적으로

주민조사를 진행했고 “사할린 섬” 이라는 책에서 ‘세묘노프의 집에서 만주인들과 고려인들, 러시아인들이 일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22, 150쪽].

1897년 최초의 전체주민조사에 의하면 28,000명의 사할린 주민 중 한인은 67명이었다.  “그들 중에는 투옥과 형기를 마친 사람이 3명, 농부 9명, 어부와

사냥꾼 53명, 의류제조인 1명, 무직 1명, 조선국적자가 54명, 러시아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이 1명이었다. 전체 한인 중 66명이 코르사코프 구와

알렉산드롭스키 구에 살고 있었다”[18, 35쪽].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광산에서 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수호의 견해에 따르면

이들은 러시아인, 일본인, 중국인, 토착민들과 함께 석탄을 채취하고 어업에 종사했다. 조선인들은 자유노동자로서 급여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왔으며

법적으로 외국인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유형자들과 마찬가지로 가혹한 노동에 동원 됐고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던 것은

거의 자명하다. 이것으로 당시 사할린에 한인들의 숫자가 적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7, 18쪽].


 

  2 단계(1905–1945): 북위 50도를 기준으로 사할린이 두 개로 분리됐던 시기이며, 자발적 이주의 시기와 (1905–1939) 강제 이주(1939–1945)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시기 북사할린에 한인 주민이 형성됐던 것은 대륙(연해주)으로부터 이주와 한국으로부터의 이동(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아무르 유역의 니콜라옙스크, 또는 일본 열도를 경유하여), 그리고 자연 발생적인 증가의 결과였다. 1906년 4월 10일 사할린 유형지가 폐쇄되고 같은 해

약 5000명이 러시아 대륙으로부터 북사할린으로 이동했다[8, 100쪽]. 차르정부는 이주를 장려하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세금 감면을 내세웠다.

석탄, 석유,천연가스 매장지의 개발이 시작되고 합작 또는 외국이권기업들이 설립됐다. 1916년 이후 일본인들은 사할린의 석유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섬 북부지역의 석유, 천연가스 매장지를 개발하는데 일본이 더욱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1920년 북사할린에 소비에트 권력이 수립되고 1920년 4월에는 백군의 일시적인 승리로 일본군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1920년 7월 3일 일본 정부는

사할린 전체가 고유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일본왕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은 북사할린에 약 1,5000명의 노동자, 관리, 군인, 고고학자, 지리학자,

기자들을 파견했다[8, 107–108 쪽].

점령기간(1920–1925) 동안에는 한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사할린의 남쪽과 북쪽 사이를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었다.

1904–1905년 러일전쟁 이후 섬의 남부와 북부에 한인 주민 수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증가했다.

사할린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왔다. «1689년 러시아와 청이 체결한 네르친스크 조약에 준하여 러시아는 거의 150여 년간 연아무르

지역을 떠나야 했다. 사할린은 오랫동안 러시아의 관심영역 밖에 있었다»[8, 58쪽].

19세기가 되어서야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시모다조약(1855년)과 상페체르부르그조약(1875)에 따라 사할린은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왔다.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는 패하고 1905년 8월 23일(9월 5일)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영토를 일본에게 양보한다.

이렇게 섬의 영토는 두 개로 나뉘고 남부는 일본에게 넘어갔다.  쿠릴열도와 남사할린을 받은 일본 정부는 그곳에 행정국과 자체통치조직, 선거체계를

만들었다. 쿠릴열도는 홋카이도 총독체계로 편입됐다.  1907년 남사할린 지역에 가라후토 총독체제가 수립되고 1908년에는 도요하라시

(블라지미롭프카,1946년부터 유즈노–사할린스크)가 중심이 됐다[12, 9쪽].

새로운 땅을 얻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들도 한국인들도 갔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 식민자들은 가혹한 군사정치체제를 설립하고 경제팽창을

진행하고 국내 또는 국외에 있는 위험한 군수기업들에서 노예처럼 한국인을 부렸다. 일본식민자들의 억압과 박해, 계획적인 대량학살 정치는 다수의

한국인들을 외국으로 망명하게 만들었다.  이들 중에서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 또는 가족과 함께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1904–1905년과 1945년의 2차례에 걸친 러일 간 무력 충돌은 사할린 한인들의 영혼과 심장에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경제정책은 주로 토지몰수였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행정자원을 끌어들였다.  1912년 조선 총독부는 부동산의

소유자가 지정한 기간 내에 자기소유의 토지를 신고하고 일본재정관청이 그 소유권을 확인할 전권을 가지고 있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1910–1918년

토지대장조치를 실행한 결과 «약 1000만 정보(992만 헥타아르)의 경작지와 1,120만 정보(1,111 만 헥타아르)의 임야가 일본제국의 국유지로

추산됐으며 일본지주들의 소유로 넘어갔다 »[24, 89쪽]. 생존수단을 잃은 농민들은 소작인이나 일용노동자가 됐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마저 박탈당한

농민들은 산으로 올라가 개간농업을 하거나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해야 했다. 1912–1931년까지 이 기간에 생산량이 6배 이상 증가한 쌀을 일본으로

대량 수출했기 때문에 주민1인당 쌀의 소비량은 형편없이 감소했다. 한국에서 생산된 쌀의 48–50%가 유출됐고 매년 몇 백만 섬[2]의 쌀과 콩을

반출했다[27, 231쪽]. 1931년에 이르러서는 2백만 이상의 농민이 연생산량의 50–80%에 달하는 높은 소작료 때문에 파산했다.

일본 식민지권력에 대한 모든 비판과 선동, 파괴공작을 없애기 위해 폭동, 소요, 무질서, 언론, 일본 황실 권위 훼손, 정치범죄, 사회질서유지 등에 관한

온갖 종류의 법령과 명령이 만들어졌다. 1930년대 초 농민들은 기아의 한계에 이르렀다. 유일한 탈출구는 외국으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은 만주(19%), 시베리아(2.88%), 일본(16.85%) 등으로 떠났다[27, 203–231 쪽].


 

일본왕의 칙령 №33에 따라 1907년 4월 일본 정부가 만든 가라후토 총독체제는 이 영토에서 가능한 최대량의 천연자원을 유출하는 조치들을

실행시켰다. 예를 들면 1924–1934년 8억 2190만 엔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산업생산품이 섬의 외부로 유출됐다. 새로운 영토에서 가장 수입이

좋은 산업은 무단으로 벌채한 목재의 생산과 가공이었다. 1906–1934년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약 6천 8백만 입방미터의 목재를 생산했다. 목재의 가공이

일본제국 사할린 경제수탈의 중요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제지공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15–1934년 일본인들은 202만 6천 톤의

셀률로오스와 191만 톤의 종이를 생산했다[7, 21–29쪽]. 일본지배 초기에는 주요 탄전들이 법으로 채굴을 금지시킨 «예비용»이라고 공표됐다.

하지만 셀룰로오스제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1920년대에는 이 매장지들의 개발금지를 일부 폐쇄하고 1930년대 초에는 이미 20여 개의

임산자원채굴기업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남사할린 전체에서 30개에 달하는 새로운 탄광개발을 시작했다.

전시상황으로 1937년에는 석탄수출이 지역소비보다 많아졌고 그 이듬해에는 계속 증가했다. 1941년에는 4백만 톤 또는 가라후토 지역 연간생산량의

62%라는 가장 커다란 수치에 도달하게 됐다. 섬의 천연자원 개발을 위해 «오지세이시(임산업)», «미쓰비시»와 «미쓰이(석탄사업)»등과 같은

독점기업들의 혹독한 경쟁이 진행됐다[13, 12쪽].

1932년 이후 일본경제의 군수화가 시작됐고 통화팽창 과정이 강화됐다. 일본제국은 자신의 영향력을 아시아대륙의 내륙으로 확장시키려고 노력했다.

1931년 만주를 점령하고 1937년 중국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소비에트와 몽골의 국경지역에서 도발행위를 조직했다[3].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태평양과 인도차이나, 버마에서 미합중국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1937–1938년 가라후토에서는 시스카

(포로나이스크)와 도요하라(유즈노–사할린스크)에 군용비행장 건설을 시작했고 1936년에는 도요하라–시스카 간 철도건설이 완료됐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군사 및 경제적 상황을 첨예화시켜 노동자원의 급격한 증대를 필요로 했고 이는 한반도에서 충당했다. 초기에 일본식민권력은

과대한 약속을 하면서 «달콤한 말로» 자원 모집을 하는 형태로 이주를 진행했지만 이것으로는 필요한 인적자원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38년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총동원»에 대한 법령 №55를 공표한다. «조선과 타이완, 가라후토에서 전체동원령의

실행에 대한» 1938년 5월 4일자 일본왕의 칙령 №316에 준하여 1939년 9월부터 한국인들의 대규모 강제동원이 시작됐다.

같은 해 «국민직업능력신고»와 «노동동원»에 대한 법령이 통과됐고 이에 준하여 조선 총독부는 1940년과 1944년 가라후토와 태평양 남서부 지역의

도서에 파견할 젊은 한국인 남성과 여성들에 대한 총동원을 실행시켰다. 30년간 사할린 한인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일본인 변호사 다카키 겐이치의

말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 약 2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송출됐고 그들 약 6만 명이 가라후토로 보내졌다[7, 41쪽].

1920년 사할린 섬 남부와 북부의 한인 주민수는 일정하지 않았다. 1923년 북사할린에는 1431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고[7, 41쪽], 1920년

가라후토에는 934명이 있었다. 1933년 11월에는 5314명으로 늘어나고 1934년 3월에는 5813명까지 늘어난다[7, 35쪽].

일본점령군이 북사할린에서 철수하고 난 후 예전 한인주민들의 일부는 이곳에 남았다. 1925년 이들은 사할린 북부의 오하에서 천연가스산업과 탄광,

어업에 종사했다. 이 주민들의 일부는 거의 북사할린 전체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리브놉스크 지역 3개 촌락 – 나우모프카, 케피, 유키 – 과

서사할린 (쉬로코파딘스크) 지역 1개 촌락 – 미트냐 – 은 주민 모두가 한인이었다. 1927년에 리브놉스크 지역에 나우모프 민족촌 소비에트가

구성됐다[7, 75쪽]. 1925–1937년 북사할린에서 한인의 법적 지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1910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들어온

한인들과 그 자녀들은 능력과 무관하게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국민으로 인정됐다. 1910년 이후 러시아(그리고 사할린)에 온

사람들을 위해서는 소비에트 국적 취득을 위한 보다 단순화된 절차가 수립됐다. 소련의 국적취득과정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됐다. 자신을 외국인으로

선언한 한인들은 «거주형식»이라고 부르는 증명에 근거해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이동의 자유가 제한됐고 다른 지역, 심지어 극동지역

내에서조차 이주도 불가능했다. 그 밖의 것들에서 이들은 소련국적자와 동일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1929년까지 한인주민 수는 안전적으로 약 487명이었고 1930년대에는 1767명까지 숫자가 늘었다[18, 51쪽]. 1930년대 말까지 다수의 한인들은

북사할린에 완전히 적응했으며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과 자신의 향후 운명을 결합시켰다.

1937년은 소련에 거주하는 수백만의 여러 민족들을 위협하는 대중적 테러와 탄압의 시기로서 소비에트 시기의 역사에 들어왔다. 이 해가 북사할린

한인들의 기록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이 됐다. 소비에트 한인들은 소련에서 가장 먼저 강제이주를 당한 민족그룹이었다. 1937년 9월 27일 사할린에서는

볼셰비키전러시아공산당중앙위원회와 소련인민위원회가 보낸 한인들을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사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결정문을 실행하기 위해서 공산당 주위원회 제일서기인 뻬. 엠.   울랸스키와 주 집행위원회 의장 아. 뻬. 그로모프, 소련내무성 인민위원부 주

담당국장 웨. 엠. 드레코프를 구성으로 하는 «트로이카»가 만들어졌다. 각 지역마다 지역별 «트로이카»가 만들어졌다[11, 160쪽]. 이들의 활동 결과로

사할린에서 1187명의 한인이 강제 이주됐다[15]. 이 비인간적인 조치는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한인의 대형 농민공동체의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러시아에서 고향을 발견하고 믿어온 사람들의 비극이었다. 공포와 도덕적 비하, 스스로의 가치에 대한 불신이 한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오랫동안

자리잡게 됐다. 남사할린에서 한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과정이 계속됐고 한인에 대한 강제이주와 동원 작업이 계속됐다.

최고절정은 1939–1945년이었다. 가라후토를 획득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 식민화 경험을 적용시켰다. 1907년 가라후토 총독부는 도요하라

(현재의 유즈노–사할린스크), 마오카(홈스크), 시스카(포로나이스크), 에스토루(우글레고르스크)의 4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17, 25쪽, 8, 127쪽].

식민화의 촉진을 위해 일본은 «북진» 정책을 진행했다. 천연 자원의 개발은 많은 인적 자원을 필요로 했다. 한국에서 값싼 노동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쓰비시», «미쓰이», «오지» 등의 기업들은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들은 일 년짜리 계약을 체결하고 다양한 조세감면을

제공하고 높은 임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예를 들면 1930년까지 «가와카미»(현재 시네고르스크) 탄광에는 약 500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있었다

[19, 8쪽]. 1920년 최초의 가라후토 주민 조사에 따르면 이곳에는 한국인 934명이 살고 있었고 그 중에서 도요하라 416명, 마오카 176명, 시스카 153명,

토마리오루(현재의 토마리) 97명, 오도마리(현재의 코르사코프) 92명이었다[11, 198쪽]. 북사할린에 대한 일본의 한시적 점령(1920–1925년)이 끝난

후 다수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함께 남사할린으로 철수했다. 이것은 «자발적 징집» – 주로 한국의 남부에서 독신 또는 가족과 함께 젊은이들이

왔었다. – 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징집의 성격은 매우 달라졌고 강제 이주적 형태를 띠게 됐다. 이 동원의

실행은 편의상 3단계로 나눌 수 있다[7, 38쪽]. 1단계(1939년 9월–1942년 2월)는 징집의 시기이며 일본기업들이 점령권력과 지역 관리들이 지원으로

실행시킨 «자발적 강제» 동원의 시기이다. 총동원 계획에 준하여 각 청구 기업에 대한 배당이 이루어졌다. 한국 농민들의 참기 힘든 생활 조건이 젊은

농민들을 징집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거절하는 경우 가족 전체가 불신자 명단에 들어가게 된다.

2단계(1942년 2월–1944년 9월)는 «국가의 조직적 징집»(관알선)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은 군수사업과 관련된

제철기업들에 노동력이 매우 부족한 것을 경험하게 된다. 1942년 2월 20일 «한국인의 일본 이주 소개서»가 발행됐다. 이 문서는 동원의 강제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1942년 2월 23일 일본 정부는 한국인 노동자의 사용에 관한 법령을 받아들이고 이에 준하여 정부 기관들은 파견하기 위한 노동자들을

직접 소개한다. 1941년 6월 괴뢰 집단인  «조선 노동 연맹»을 설립하여 공개적으로 대량의 «한국인 사냥»을 시작했다. 형식적으로 정부 기관의 소개를

거절할 수 있었지만 이 소개서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은 강제 후송을 당했다. 3단계(1944년 9월–1945년 8월)는 한국인들의 운명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기로 «징용»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1939년 공포된 «국민 징용에 대한» 법령은

1944년 9월부터 한국 영토로 확대된다. 1944년 2월에는 국민 징용에 대한 명령이 공포되어 총동원이 실행된다. 이것은 1944년까지 한국인 징집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계획했던 30만 명을 다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실행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과 가라후토의 근로 대중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기였고 나라 전체가 기아의 배급 상태에 있었다. 조선 총독 코이소 쿠니아키는 1943년 5월

도쿄의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조선은 지금 소나무껍질과 쑥, 다른 풀들로 연명하고 있다»[7, 41쪽]. 이 시기 사건의 목격자들의

몇 가지 증언을 들어보겠다. 전 사할린 한인 연맹 이춘현 회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한 일본인의 꼬임에 넘어가 우리 아버지는 18살 나이로 돈을

벌기 위해 사할린에 갔다. 당시 한국인들은 대부분 벌목공이나 철도건설, 광산, 군사기지건설 현장에서 일했다»[2].

유즈노–사할린스크 주민인 사할린주한인협회 전 명예회원 故 조종구(1928–2005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5년 2월 나는 18살 나이로 가라후토로

강제 이송됐다. 고향인 문경을 지나 대구와 부산을 거쳐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오타루로 이송됐다가 나이호로(현 고르노자보드스크) 광산으로 가게

됐다»[1]. «새고려신문» 편집국에서 일하는 사할린 한인 젊은 세대 대표와의 만남에서 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한인회 전 노인회 우정구 회장

(1934년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할린으로 가는 노동자를 징집한다는 것을 알고 1942년 우리 아버지는 스스로 신청을 하고 혼자 떠났다. 1930년대

우리 부모님은 한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고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적은 토지를 소유한 가난한 농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사할린에서 돈을 벌어서 집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나를 학교에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년 후 9살 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으려 사할린으로 갔다. 아버지가 광부로 일하시는 가와카미 탄광에 도착해서 우리는 천막에서 살기 시작했다»[21].

가라후토로 징집된 한국인들의 처지는 끔찍했다. 대부분 군용 비행장과 철도 건설, 탄광, 목재가공 등 고되고 위험한 조건에서 일을 해야 했다.

사할린주한인협회 전 노인회 故 박해동 회장의 이야기는 앞서 말한 내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라고 할 수 있다. «1943년 1월 나는 고향마을에서

잡혀 부산으로 이송됐다. 경찰서에서 죄수 작업복으로 갈아 입혔다. 일주일간 우리는 창고에 갇혀 있었다. 와카나이에서 배에 태웠다. 한국인 42명은

가장 낮은 선창의 철제 바닥에 짐 꾸러미처럼 던져졌다. 캄캄한 밤에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 항구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나이부치

(현 브이코프) 탄광으로 실려 갔고 즉시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우리는 석탄을 캐기 위한 기계에 불과했다.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서서 밥을 먹고 교대를

위해서는 광부 1인당 2톤을 캐야 했다. 안정 장치는 전혀 없었고 광부들이 붕괴 사고를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4].

최악의 생활 환경과 힘에 부치는 노동, 일본인 감독관과 그 한국인 앞잡이들의 천대로 인해 기아와 피로, 절망에 빠진 탄부들 중에 도망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붙잡혀 다고베야에 갇혔다. 일본과 가라후토에서 노동력을 이용하는 특성은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와 중세 시대에 널리 사용하던

일꾼들에 대한 박해를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착취의 가장 섬세한 형태 중의 하나가  «다코베야» (또는 강고쿠베야) 체계였다.  이것은 강제로 만들어진

노동자 기숙사의 종속 형태였다. 이것은 룸펜–프롤레타리아 징집을 통해 토지 건설 작업의 하청 회사들에 의해 조직됐다[13, 13쪽]. 박수호는 다코베야

발생을 설명하면서 «일본의 백과사전에서 다코베야는 홋카이도와 사할린 탄광에서 죄수들처럼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기숙사이다. 이 감금자들을

다코라고 불렀다»고 쓰고 있다[7, 44쪽]. 다코는 강제노동을 위해 다코베야 수용소에 있던 감금자들이다. 만약 1886년 홋카이도 다코베야가 탄생하던

시기 다코가 정말 죄수들이었다면 1938–1945년 이들은 강제로 이송된 한국인들이었다. 코르사코프 시 주민인 故 박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벌목장에서 일했고 우리는 나무를 베서 떠내려 보냈다. ...… 우리의 노동 조건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도주했다. 

붙잡힌 사람들은 반죽음이 될 때까지 구타당했고 다코베야에 집어넣었다»[11, 203쪽].


 

다코베야에는 가혹한 규율이 이었다. 일본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신체적 징벌을 가했다. 환자도 일을 하게 만들었으며 손으로 끌어냈다. 기준량을

완수하지 못하면 식사를 주지 않았다. 기준량은 다른 곳의 두 배였다. 한국인들은 «한번 다코베야에 들어가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고 말했다

[11, 203–204쪽]. 가장 고되고 위험한 구역에서 일을 했지만 다코의 노동은 전혀 보장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코는 항상 채무자로 남게

되어 다코베야에서 평생을 남게 되는 원인이 됐다. 다코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서도 안 되고 수갑을 채웠으며 질서와 규칙을 위반한 자는 가혹한

몽둥이질을 당해 죽는 일도 다반사였다. 1944년 하반기 태평양에서 군사행동이 활발해졌을 때 일본은 또 하나의 강제 징집을 시작했다. 1944년 8월

11일 일본 정부의 결정에 따르면 약 만 명의 사할린 광부들이 가라후토에서 일본의 이바라기 탄광과 큐슈 탄광으로 이송됐다. 이들 중 3190명이 강제

징집된 한국인들이었다. 45명은 이바라기 탄광으로 후송되고 남은 3000명은 큐수 탄광으로 갔다. 광부들에게는 가족을 동반하는 것이 금지됐다.

해상에서의 군사 활동 때문에 가라후토에서 석탄을 유출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그래서 12개의 탄광이 폐쇄됐고 광부들은 다시 작업을 위해 일본으로

동원됐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들은 사할린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만날 수가 없었다[25, 6–8쪽].

 «이중징용»이라는 2차례 강제 동원된 한인 광부들의 자녀들로서 사할린 사회단체 대표들의 회상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진길(1944년생): «아버지의 이름은 소자근(1905년생), 어머니는 이점순(1917년생)이다. 1942년 아버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제 동원을 당해서

토로 탄광(현 사할린주의 샤흐초르스크)으로 이송됐고 그런 다음 1944년 다시 큐수 탄광으로 동원됐다. 나는 아버지가 떠나고 난 3개월 후에 태어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6]. 임태환(1934년생): «내가 7살이 됐을 때 나의 어머니는 아이들 둘을 데리고 토요하타

탄광(현 사할린주의 레소고르스크 마을)에 강제 동원된 아버지를 찾으려고 사할린에 갔다.  이때는 중일전쟁의 절정기였다. 그래서 1944년 9월

아버지는 이바라기 탄광(일본)으로 이송됐다. 가족은 사할린에 남겨졌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는 우리가 모두 전쟁 중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갔다»[5]. 하경수: «나의 아버지 하인준과 삼촌 두 명은 사할린 «미쓰비시»사의 토로 탄광(현 샤흐초르스크시)으로 강제 이송됐다. 1944년 10월

아버지는 다시 일본의 큐슈 탄광으로 동원됐다. 사할린에 가족과 할머니, 숙모가 남았다.  1945년 4월 여동생이 태어났다. 가장이 없어서 여자들과

아이들은 굶주렸고 여동생이 태어나고 한 달 반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는 아버지처럼 두 번이나 강제 동원된 사람들

세 명과 함께 밀수업자들의 배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할린에 돌아왔다. 1988년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친척들의 초청장을

받았지만 그 다음날(9월 29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26, 109쪽].

일본 식민 체제에서 한국인에 대한 동화 정책은 모든 영역에서 진행됐다. 최초시기에는 주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식민자들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인종적 동일성에 대한 이론을 확산시켰다.  그런 다음 한국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 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한국인들을

일본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름과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 정책은 민족 의식과 한국 문화, 자주성을 없애는 데 방향을 맞추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민중을 순응하는 식민지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정책은 교육 분야에서도 실행됐다. 1908년 가라후토

교육 발전에 대한 일본왕의 특별 칙령이 공포됐다. 1935년에는 학생 43.495명이 공부하는 210개의 초등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됐다.

23개의 토착민(아이누, 오로크, 니브히 등)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도 설립됐다. 하지만 한인 학교는 없었다[14, 8쪽].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왕은 라디오로 일본의 패전을 공포했다. 이를 들은 일본인들은 죄 없는 한국인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소비에트군의 공격병 중에 한국인들이 있었다는 소문이 흘러 들기 시작했다. 사실 이것은 오로크, 길랴크, 니브히 등의 사할린 토착민들이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조선인들은 러시아인들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고 이

«개»들이 그들을 도울 것이다. 그들은 러시아의 간첩들이다. 그들을 죽여야 한다»[9, 28쪽]. 그리고 실제로 죽였다.  레오니도보 마을(사할린)에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려 대한민국에서 오는 서울시 주민 김경순(78세)의 말이다: «1945년 8월 18일 가미시스카(현 레오니도보)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인 18명을 천막에 넣고 산채로 불을 질렀고 거기에 아버지 김경백(54세)과 오빠 김정대(18세)가 있었다. 사할린의 북쪽으로부터

소비에트 군의 공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 장교들이 한국인들을 소비에트군의 첩자라는 죄를 씌워 헌병대로 끌고 갔고 재판도 조사도 없이

천막에 넣고 불에 태워 죽였다»[3, 398–399쪽]. 카. 가포넨코가 또 다른 비극적인 사건을 이야기한다: «1945년 8월 20–23일 일본인들이 미주호

마을(현 포좌르스코예 촌)에서 27명의 한인 주민들을 칼로 찔렀는데 그들 중에는 여자 3명과 아이들 6명이 있었다»[9, 28쪽]. 진격해오는

소비에트군을 피해 일본군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없앴고 쌀이며 다른 음식물에 진흙을 뿌리고 저수지에 석유를 부었다[10].


 

[1][ ]  안의 번호는 권말의 참고문헌 번호에 따른 출처를 나타낸다.

[2] 1섬은 약 180킬로그램이다.

[3] 1938년에는 하산 호수 인근, 1939년에는 할힌골강 인근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2.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역사

 

 1)      머리말

사할린 한인의 문제가 분명히 식민지적 유산이지만, 이것은 전후 냉전질서에 의해 완전히 왜곡됐고, 이들은 적어도 47년 간은 완전히 역사의 미아였다.

2010년 실시한 러시아 인구조사에 의하면 사할린 인구는 497,973명이다. 그런데 이 인구조사는 공식적으로 민족 구분을 하지 않고 있어 현재 사할린에

몇 명의 한인 동포가 있는지 공식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사할린 주 정부 비공식 통계는24,993명으로 나와 있다. 한인은 러시아인, 다음으로 많은 전

사할린주 인구의 5.3%를 차지하며, 전체 한인의 절반 정도는 주청 소재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 살고 있다.

이 글에서 사할린 한인은 1930년대 이후 1990년경까지 사할린에 살았던 한인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할린 한인은 1870년부터 사할린에

거주했으며, 1905년 이후 1945년까지 남사할린은 일본이, 북사할린은 러시아가 지배했다. 이 기간에 북사할린에는 비교적 소수이지만 한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연해주의 한인과 더불어 최초의 사회주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조치에 의해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했다. 이 시기에 가라후토(일본령이었던 북위 50° 이남 사할린지역)에 일본을 경유하여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어업이나 광업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주로 한국의 남부지역 주민들을 여러 형식으로 이주시켜 노동을

하도록 했다. 새로이 정착한 한인들에게는 미리 와 있던 한인들이 ‘선주민’이었다. 당시 가라후토를 중심으로 1920년에는 934명, 1934년에는 5,813명이

거주한 기록이 남아있고, 1939년 이후에는 자유모집(1939.9–1942.2), 관알선(1942.2–1944.9), 징용(1944.9–1945.5) 등으로 약 43,000 여명의 조선인들이

사할린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1945년 이후 이들은 한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반면, 새롭게 소련당국은 사할린 한인의 사회주의 교육과 조직화를 위해 중앙아시아에서 한인들을

선발하여 사할린에 파견했다. 사할린 한인들에게 이들은 “큰땅배기”로 불렸는데, 이들은 1970년대에 대부분 돌아갔다. 아울러 북한은 사할린의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해방 직후부터 북한 노동자들을 파견했다. 이들 중 일부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할린에 남아 사할린 한인이 됐다. 공산당

체제하에서 대부분 한인들은 탄광, 국영농장, 건축현장 등에서 일했으며 사무직이나 공무원으로 근무한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냉전체제로

인하여 냉전기간 동안 사할린 한인은 한국으로의 귀환은 물론이고 한국 내 가족과의 의사소통이나 교통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한국과 소련의 국교가 수립된 이후(1985) 이들은 다시 고향과 조국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으로의 귀환은 이들의 희망이었다. 즉 수만 명의 한인들이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의 기쁨을 나누지 못한 채 고립된 채 살아 오다가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약간의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소련 해체

이후 극히 제한된 숫자이지만 일부 고령자들이 한국으로 귀환했다. 이와 같이 그 동안의 세월은 적어도 1세들에게는 정지한 세월이었는지는 모르나

사할린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인 2세나 3세들은 또 사정이 달랐다.

    이와 같이 사할린 한인은 어느 재외한인들보다 동직적인 역사적 경험의 공동체이지만, 내부 구성은 의외로 다양하다. 이렇게 보면, 사할린 한인은 첫째, 식민지시기에 사할린으로 이주한 집단,

    둘째, 그들의 2세와 3세 자손들, 셋째, 중앙아시아나 북한에서 1946년 이후에 유입된 소수의 집단으로 구성된다. 이들의 유입경로가 다른만큼 서로 다른 인생 경로를 거쳤고 서로 다른

    세계관를 지녔다. 이들은 ‘조국’ ‘고향’에 대한 기억의 강도가 다르다. 사할린 한인은 오늘날 1, 2, 3, 4세로 나누어지며, 이들은 상당한 정도의 의식과 정체성의 차이를 갖는다. 1세는 이주할

    당시에 자신의 노동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성인이었던 사람을 일컫지만, 맥락에 따라 그 외연이 달라지게 된다.

    사할린 한인의 경우 특히 ‘1세’의 정의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귀환정책이 이 1세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세라는 규정은 사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새롭게 규정된다. 고국방문사업, 그리고 영주귀국사업이 점차 가시화되면서 정책대상인 ‘1세대’란 누구인가에 대한 규정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개편)”

    기에 이르면 사할린 한인사회는 점차 2세들이 현실적 지위와 영향력에서 우세를 보이게 되며, 이 과정에서 1세와 2세의 분화가 명확해졌다. 1세가 심리적으로 완전히 러시아인들과 동화되지

    않은 반면, 2세와 3세는 사정이 다르다. 이것은 귀환에 대한 입장의 분화, 새로운 갈등, 나아가 새로운 이산이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실제로 사할린 한인의 귀환이 가시화된 이후

    영주귀국 및 보상문제를 둘러싸고 한인사회 내의 입장 차이 및 갈등양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94년 5월에 일본 외무부에 제출한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및 보상문제에 관한 9개 항목 기본요구’의 내용을 보면,

 

   1. 1945년까지의출생자들을 1세로취급해보상할, 1946이후출생자들을 2세로취급해보상할,

   2. 한국으로의영주귀국은연령을기준으로단계적으로실시하고 1938이전출생자들을우선적으로귀국시켜희망하는가족과동반귀국할있도록조건을조성할,

   3. 거주지는본인이희망하는곳으로개인소유의주택을보상하고 1세들에게는사망할때까지생활비(치료비포함)보상할,

   4. 이후단계적으로귀국하는 1938이후출생자들에게도같은조건으로생활을보상할,

   5. 영주귀국자들의소유재산을모두한국으로가져가는것이가능하도록하고연금생활자의연금은한국으로보내도록러시아정부에게요구하는,

   6. 한국으로영주귀국하지않고사할린에계속남는것을희망하는한인들에게는 1 1천만엔보상할,

   7. 사할린에거주하는한인들의민족문화재생을위해중앙도시에민족학교와문화센터를건설하는것을러시아정부에게요구할,

   8. 사할린거주한인들이이중국적을취득할있도록러시아와한국정부에게요구할,

   9. 일제시대, 강제연행되어사할린에거주했지만생활사정으로러시아본토에이주한한인들에게도사할린한인들과같은조건으로보상할등이다.

 


2) 일제강점기한국어교육실태(1906 – 1945)

사할린 지역에서 한국어를 사용되게 된 계기는 사할린 한인들의 이주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 정부는 전문가들을 구성해서

화태(가라후토의 한자형 표시) 연구를 위촉했고, 식민의 성공 여부를 심도 있게 조사했다. 1909년 4월 화태청은 «토인자제»의 교육을 위한 교육소를

설치했다. 일본은 사할린을 점령하고 원주민들을 “토인”이라고 불렀고, 그들에 대한 특별 교육을 “토인교육”이라는 장르에서 다루었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 쿠릴과 사할린을 교환한 후에 1879년부터 토인보호자금조성의 목적으로 이 지역에 토인어장의 제도를 설정했다. ...동해안의 낙범,

서해안의 다란박 2개소에 교육소를 설치하고, 소학교령에 준거한 수업을 개시했고, 1931년 경에 다란박 지방은 일본인의 왕래가 많아졌다.

러시아보다는 일본의 원주민 정책이 훨씬더 적극적이었고, 일본은 원주민들을 동화하는 정책을 사용했다(러시아 사할린․연해주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www.nfm.go.kr/_Common/Download.nfm? filename=01. pdf&dir... 검색일 2014.05.14.).

일제 시대에 가라후토에 조선학교는 전혀 없었다. 그 당시 가라후토에 30만 여명의 일본인들과 2만 7천여 명의 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약 13만 700여명은 15세 미만의 아동들이었다(박수호, ''사할린의 한인들'', 1993). 1906년 8월에 블라지미롭카(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촌에 첫

일본 소학교가 개교됐다. 그 학교에서는 20명의 일본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같은 해에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 시)와 마오카(현 홈스크 시)에서도

소학교들이 열렸다. 1908년에 가라후토에서의 교육제도에 대한 일본천황령이 나왔는데 1940년도에 가라후토에 140의 소학교, 126의 중등 학교에서

1604명의 교사들이 6만121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외에   4개 김나지야(김나지야–중등 교육기관), 7개 여자 김나지야와 11개 중등

전문학교들이 있었다. 1939년에 도요하라(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에서 사범전문학교가 문을 열었는데 7 반의 학생들을 23명의 교사들이 가르치고

있었다.  가라후토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을 위해 시스카(현 포로나이스크 시)와 다른 곳에서 학원들이 세워졌는데 일본말만을 가르쳤다.

1만 6천54명의 조선인들을 위한 학교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조선인들이 모국어로 말하는 것이 금지됐다. 그래서 일제 시대에 화태에는 조선학교가

전혀 없었다 (박수호, 1993).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일제에 강제 병합되어 국권이 침탈되고 식민지로 떨어졌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의 기본 목적은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을

육성함을 본의”로 하고, “시세(時勢)와 민도(民度)에 적합”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차별주의에 입각한 동화주의 교육정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자각은 그들 식민지 정책에 장애가 되므로, 조선인들의 우민화가 기본방침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들의 교육은

초등학교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고, 초등교육을 통해 식민지배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을 육성하고자 했다. 곧 식민지인들에게 불필요한 고등교육을

억제하고, 일본어 보급과 신민 교육을 위한 보통교육, 하급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한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식민지 교육의 목적은 우리 민족의 민족의식을 없애고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인들에 대한 교육은 일제

신민으로서의 자질과 품성을 갖추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시세에 적합한 교육을 한다는 명목으로 실업교육이 중점적으로 실시됐다. 이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하급 관리·사무원·근로자 양성에 그 목적이 있었다. 한편 교육 과정에서 일본어 보급에 역점을 두어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파괴하고, 일본의 언어와 문화를 강요한 동화주의 정책을 펴나갔다. 이에 따라 역사 교육에서 역사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 일본사를 의미했으며,

우리 역사는 조선사로 일컬어지며 일본사의 한 부분으로 언급될 뿐이었다. 곧 일제 식민지 교육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민족과 자주 의식을 몰각한

식민지 인간의 배양에 있었던 것이다(이혜영, 윤종혁, 류방란, 한국 근대 학교 교육 100년사 연구(II) : 일제 시대의 학교 교육, 한국교육개발원,

1997년 12월 1일).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고, 1941년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다. 일본은 조선 영토를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면서 조선 민족을 침략 전쟁에 앞세우려는 동화정책을 전개했다. 일제의 대륙침략 전쟁은 대동아 건설로 미화되고,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조선 민족의 인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이른바 ‘내선일체’, ‘황국신민’이란 말이 통용됐다.

일제는 식민사학에서 내세우는 ‘타율성’론을 역사 교육에 적극 도입하여 이용했다. 조선은 역사적으로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아서 자주독립의 권리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에 예속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로 조선이 번영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주인이고 조선은 일본의 하수인

또는 노예에 불과한 존재로서 간주하여 조선 역사를 왜곡해 가르쳤다. 1938년 3월 15일 발표된 소학교 규정에 따라, 역사 교과서는 『초등국사』 권1․2를

두었다. 2차 조선교육령 때 일본사 속에 조선사가 일부 목차로 제시됐으나, 이 시기의 교과서에는 일본사만이 목차로 편성되고 조선사에 관한 내용은

배제됐다. 교과서의 내용은 한반도가 일본에 역사적으로 종속되어 있었고,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은 조선인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며, 조선인들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일본 천황’의 신민이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중등학교의 역사 과목은 일본 및 외국의 역사 지리로

편제됐는데, 교과서의 내용은 초등학교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으며 외국사에 관련된 내용이 첨가됐을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일제는 교육을 전쟁 수행의 한 수단으로 몰아가 조선 민족의 민족정신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우선 각급

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사 등을 국민과로 한데 묶었다. 그 후 1941년 초등학교령을 발표하여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했다. 초등학교 규정에 제시된

국민과 국사 교과는 황국사관에 따른 ‘일본 천황’ 중심의 역사 서술로 ‘천황제’의 일본 제국주의 체제를 옹호했다. 일본이 일찍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왜곡된 내용은 이전 시기와 동일하게 서술됐다.


 

황국신민의서사 

我等ハ皇國臣民ナリ、忠誠以テ君國ニ報ゼン

。와례라와 고–고구 심민나리 쥬세이못데 궁고 구니 호–젱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我等皇國臣民ハ互ニ信愛協力シ、以テ團結ヲ固クセン

。와레라 고–고구 심민와 다가이니 싱아이 교–료구시 못데당게쓰오가다구셍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我等皇國臣民ハ忍苦鍛錬力ヲ養イ以テ皇道ヲ宣揚セン

。와레라 고–고구심민와 닝꾸단렝지 가라오 야시나이 못데고–도–오셍요–셍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황국신민서사, ko.wikipedia.org/wiki/, 검색일 2014.05.12.)

«당시 나는 일본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는데 성명도 일본성명으로 바꾸어지고  ''야스다''라고 했으며, 우리말로 못하고 일본말로 글을 가르쳤기에

공부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또 일본인아이들과 함께 공부했으나, 그들은 언제나 우리 조선아이들을  '조센나빠''(조선생채)라면서  깔보고  없이

보고 놀렸던 것이다»(안명복, 78).

«나는 1940년 조선 강원도 양양군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교회부속 국민학교에 다니다가 강제 징용당한 부친을 찾아 가라후토에 와서

1940–1946 년간 나이부치(현 브이코프) 탄산 일본 초등 학교에 다녔다. 전과목은 일본말로 했고 조선말 시간은 없었다»(전상주, 81).

«1938년에 조선 경상북도 의성군 안병 일본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5학년까지 다녔다. 1943년도부터 1946년까지 가라후토에서 일본학교 5–8 학년에서

공부했다. 교과는 일본어, 산수, 일본역사, 일본지리, 음악, 기술, 체육, 미술, 동물, 자연, 사회, 도덕, 필법, 수공, 원예농업 등등이었고 1938–1941년

사이에 조선어도 일주일에 한 시간씩 배웠다. 모든 교과서는 일본어로 출판됐고 조선 총독부가 확립한 것이었다»(정태식, 84).

«1943년에 아버지 따라 온 식구가 가라후토(사할린)에 와서 그 해 일본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까지 2 학년까지 다녔음. 가라후토에서 일제시기만큼

학교에서 전적으로 일어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일본문학, 산수, 도화, 도덕교양을 주는 수신 등 과목이 있었던 것 같다.

다 기억이 되지 않음»(석혜경, 78).

일제 강점기의 초등교육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분리하여 이루어졌다. 일본인에 대한 초등교육은 일본과 동일한 학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중등교육을

위한 예비교육도 이루어졌다. 일본인의 초등교육은 6년제 소학교에서 행해졌다. 일본에서 1909년부터 시작된 2차 의무교육이 조선에도 적용되어 조선

내 일본인은 별도의 절차 없이 무료로 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일본인의 대부분이 초등교육기관에 취학했다.

1941년 4월에는 소학교가 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됐으며, 대도시에 있는 일부 국민학교에는 6년간의 보통교육과정을 마친 자가 수료할 수 있는

2년제의 고등과가 설치되기도 했다. 이 고등과에서는 중학교에 진학할 여유가 되지 않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중학교 교과목 일부를 교육했다.

조선인에 대한 초등교육은 일본인과 다르게 이루어졌으며, 일본인의 초등교육에 미치지 못하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 초기(조선교육령 시기) 조선인의 초등교육은 보통학교에서 이루어졌다. 보통학교의 교육연한은 3년에서 4년에 불과했으며, 교과목 구조도

일본인이 재학하는 소학교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또, 보통학교는 의무 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운영 기금의 일종인 사친회비를

학부모가 납부해야 했다. 보통학교의 시수는 소학교의 시수보다 주당 3–8시간이 적었다. 또, 교과목도 국어(일본어)에 편중되어 있었고, 국어 이외의

과목은 수신과 산수조선어 정도에 불과해 식민통치에 순응하고 식민지 산업화에 필요한 저급한 노동력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전쟁이 심화된 시기인 1943년에 조선 총독부는 조선교육령을 또 한번 개정했는데, 이 개정에서 조선인 소학교의 명칭이 국민학교로 바뀌게 됐다.

이 개정에서는 수의과목으로라도 잔존했던 조선어 과목이 완전히 폐지되며, 학교 내에서 조선어의 사용이 금지됐다. 일본이 참여한 전쟁이 점점

심화되면서 학교를 전쟁 동원의 일환으로 간주하여 국민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에서의 교육 왜곡이 급속도로 진행됐는데, 국민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업은 파행적으로 진행됐으며, 학생들은 군사교육과 각종 노무동원에 내몰리게 됐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들에게 보통학교(소학교, 국민학교)는 사실상의 최종학교로 인식됐다. 때문에 많은 교육계 인사들이 보통학교의 연한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보통학교의 확충운동을 벌여나갔다. 일제 강점기 시기 보통학교 졸업자는 사회에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보통학교 졸업자가 보통학교

비졸업자보다 임용되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했으며, 보통문관시험의 응시자와 합격자 다수도 보통학교 졸업자가 차지했다. 각종 은행과 회사, 상점의

취업에도 보통학교 학력이 필수로 되면서 보통학교와 그 졸업자의 사회적 위상은 일제강점기 내내 높아져갔다.

보통학교의 교원 대부분은 조선내의 사범학교 졸업자와 일본의 사범학교 졸업자였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대부분의 교원이 일본 사범학교 출신자로

일본인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조선인 사범학교 졸업자가 늘어나자 조선인 보통학교에는 조선인 교원이 배치됐다. 일본인 교원이 조선에 파견되는

경우는 본봉의 0.5배에 해당하는 외지수당이 별도로 지급됐다. 이 외지수당은 조선인 교원이 일본이나 만주국에 파견되는 경우에도 지급됐다(한국 근대

학교 교육 100년사 연구(II): 일제 시대의 학교 교육, 이혜영, 윤종혁, 류방란, 한국교육개발원, 1997년 12월 1일).


 

3) 소련시대의교육실태(1945 – 1964)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시대에 쓰지 못했던 민족어와 민족문자를 배우기 위해 한인 밀집 지역에

조선학교를 설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일본사람들이 귀환하기 전까지는 가라후토 여러 마을에는 일본소학교가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아이들은 일본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일본말만 해야 했던 시기가 이미 지났고 전혀 모르는 러시아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했으며

러시아어를 배워야 했다. 소련 당국은 1946년경에 모든 조선인 아이들이 일본학교에서 일본글과 일본말을 배우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그대로 남겨두면

안 된다고 했다. 사할린 여러 곳에 조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인의 귀환이 끝나면서 일본학교가 폐쇄됐기에 거기에 다니던

학생들이 조선학교에 넘어 갔다. 학교 설립 애초에 고정 학생이 별로 없었다. 일본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후 조선학교에 가서 조선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차츰 나타났다. 1945–47년에 유즈노–사할린스크(전 도요하라) 주 민간 관리국이 일본학교를 조선 학교로 개편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947년 1월 17일발 제 30번 유즈노–사할린스크 주 민간 관리국의 정령에 의하여 모든 조선학교에서 1947년 1월 20일부터 일본 교육제도를 소비에트

교육 제도로 개조했고 교안은 비 러시아 학교의 것을 따르게 했다.

 ▲(좌)유즈노사할린 주 민간관리국 지령 №360 «조선학교들의 보충 개교에 대하여» 1946년 8월 28일호(기아소 프 171오1드31 르43)

▲(우) 유즈노사할린 주 민간관리국 지령 №30 «조선학교들을 소련교육시스템으로의 개편에 대하여» 1947년 1월 17일호(기아소 프 171오1드68 르104)

 

1947년 1월 15일경에 사할린에 조선소학교 수는 27, 칠년제학교는 8이었다. 1학년 학생들이 837명, 2학년생 – 665명, 3학년생 – 529명,

4학년생 – 500명, 5학년생 – 204명, 6학년생 – 161명, 7학년생 – 42명, 총 3004명이었는데, 우글레고르스크 칠년제학교에서 342명, 코르사코프

칠년제학교 – 316명과 유즈노–사할린스크스 칠년제학교에서 217명이 공부하고 있었다(기아소. 프.171. 오쁘.1. 드.68. 르.102,105,106).

한인의 교육열이 대단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할린 여러 지방에서 조선 학교를 열어 달라는 신청에 유즈노–사할린스크 주 민간 관리국은

1946년 8월 28일 제360호 지령으로 당년 9월 1일부터 우글레고르스크 구역 히가시 샤쿠단에 두 반의 소학교(40명), 도마리키시(포로나이스크 구역)

소학교(50명), 가와카미(유즈노–사할린스크 구역) 2반짜리 소학교(60명) 등 9개 촌락에서 소학교를 개설했다(기아소 프. 171. 오쁘. 1. 드.31. 르. 43).

제일 먼저 열린 조선 학교는 1945년 10월 에수도로(현 우글레고르스크 시) 와 시리도리(현 마카로브 시)에서 개교한 소학교들이었고, 그 다음 당년

12월에 또 사할린 여러 곳에서 열린 7 개의 학교들이었다(쿠진 '타인의 이름과 지배하에서' 새고려신문, 2002년5월3일).


 

 

 

 

 

 

 

 

 

 

 

 

 

 

 

 

 

 

 ▲마카로브 시 제2호 조선 칠년제학교9회 졸업(1955)(박승의 사진첩에서)

1945–46과 1946–47년간 조선학교 실태에 대한 조사서에 의하면 «1946년 초에 사할린 주 인민 교육청은 조선아이들을 일본아이들한테서 분리시켜

자립적 조선학교를 설립했다. 1945–46 학년에 남부 사할린에 2300명의 어린이를 망라한 27 조선소학교, 1946–47학년초에 3000명이 공부하는 8 개의

중학교(칠년제)와 28 개의 조선소학교(4년제)가 설립됐다. 이들 조선학교에서 사할린 주 인민 교육청이 지방 주민들 중에서 뽑아 임명한 110명의

교사들이 일하고 있다. 이 교사들은 일본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일본 교육제도에 따라 교무를 조직했다. 그래서 1946–47학년초에 사할린 주

집행위원회는 조선학교들을 소비에트 교육제도에 맞게 개조하기를 결정했다»(기아소 프.171.오쁘.1.드. 31.르.168).

유즈노–사할린스크의 한인밀집거주지역인 블라지미롭까 마을(현 유즈노–사할린스크 제9학교 인근)에는 제8번 학교가 설립됐으며, 이 학교의 학생수는

1947–50년에 200–300명, 1951–55년에 500–600명, 1956–59년에는 1000여명에 달했다. 또한 코르사코프 시, 홈스크 시, 포로나이스크 시 등 한인

동포가 많이 거주한 지방도시에도 조선어를 사용하여 교육하는 학교가 있었으며 현재 사할린에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65대 이상의 한인동포

대부분이 이러한 학교를 다녔던 사람으로 파악되고 있다. 1940년대 사할린 토마리에서 최초로 한글 학교를 설립한 허조 선생님은 토마리 시에서 가장

학문이 높고 애국심 많은 분이었다. 그는 1946년경에 모든 한인 아이들이 일본학교에서 일본글과 일본말을 배우는 것을 보고 «이리하여 우리말이

사라지지 않겠는가»하는 공포감을 느끼곤 했다. 그는 1947년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있은 첫 한국어 교사

강습을 한 달 반 동안에 끝마치고 토마리에서 한글학교를 설립하여 교편을 잡게 됐다. 모국어와 고유한 민족 문화와 전통, 풍습을 되살리려는 것이

그의 목적과 과업이었다.

«…...저도 일본 학교 2학년에서 수업을 마친 후 한국어를 배우려 아버지 학교에 달려가곤 했어요. 아버지는 «우리 국기를 꼭 알아야 한다»면서

태극기가 묘사된 그림을 두 개 그려, 하나는 익히도록 학교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애국가도 가르쳐 주었습니다»면서 허남훈씨(허조 씨의

차남)는 학창 시절을 회상했다. 소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허조씨는 더 많은 요원들이 교편을 잡게 하여 칠년제학교도 만들었다. 처음에는 교사들이

부족했으나 나중에는 큰땅에서(중앙 아시아) 과목별 교육 조선선생들,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서 약 500명의 동포들이 토마리 어장에 파견돼

왔는데, 그 중에서 한글 교사로도 취직시킬 수 있었다. 그 동안 그는 러시아어도 연마시키면서 학력을 높여 구역 교육부 인스펙토르(장학관)로서도

활약했다. 그 직에 있으면서 한인들이 밀집된 크라스노고르스크, 벨린스코예 지역 학교들에 한글 수업이 있도록 교사들을 파견시켰다('향수감을

달래면서', 새고려신문, 2002년1월25일호).

 «말로는 조선인학교라 했으나 학생들은 모국어를 거의 몰랐고 아동들을 교수할 자격 있는 교원들과 교재가 전혀 없었다. 일본 시대에 조선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중에서 우리글과 말을 잘 소유한 유지들이나 또는 해방 전에 남 화태에서 일본중학교를 졸업한 사람, 이런 학교에 재학중이던

사람들 중에서 우리 민족어를 괜찮게 소유한 사람들이 교사로 선발됐다. 무엇보다도 조선어 교과서가 없어서 난관을 겪게 됐다. 다행히도 그 누가

조선어 1학년 교과서를 조선에서 화태까지 가지고 와서 오래 보관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교과서에 근거하여 조선인 유지들이 등사판을 이용하여

원문을 등사한 것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모아서 손으로 교과서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가갸거겨고교, 소 소나무…»이렇게 우리 글과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몇 해 후에는 소련 인민 교육부에서 발행한 조선어 교과서를 가지고 1학년부터 상급반까지(이 조선어 교과서 편찬자는 김병하,

차원철 및 기타) 우리 민족어를 배우게 됐다. 기타 다른 과목 교과서도 러시아판을 조선어로 번역하여 발행되어 주 내 조선학교 학생들의 수요를

충족시켰다. 당시 소련에서 실시되고 있던 중등 의무 교육제의 혜택으로 조선인 아동들도 무료로 또 의무적으로 중등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주 내에는 조선학교 수가 수십 교가 됐고 학생 수도 많이 증가됐다. 그러니 가장 날카로운 문제는 교원들의 부족이었다. 하기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주

교원자질향상소에서 단기간 교원 강습을 조직해 대용 교사들을 양성하여 지방 학교들에 파견했고 또 중앙 아시아 가맹 공화국들에서 중등 및 고등 사범

지식을 소유한 조선인 교원들을 사할린으로 파견하여 부족한 교원 수를 보충시켰으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많은 대용 교사들의 자질도 요구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신국웅, '한글 교육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새고려신문 2002.8.30. 제6,7쪽).


 

이 시기에 포로나이스크 시에서 김영철(현지인), 최명길(대륙출신);  노워예부락(포로나이스키  구역) 소학교에서 김선생부부, 박충호, 정학만

(현지인);레오니도보(포로나이스키 구역)에서 김선생, 문선생(이름은 기억나지 않음, 현지인); 마카로브 시 조선 칠년제기숙학교에서 허일,

김상준(대륙출신), 리화섭(북한 파견노무자); 돌린스크 시에서 김이섭, 김진각, 석차술; 자고르스키 부락에서 박기호, 김교식, 김영낙(현지인);

브이코프 부락 조선칠년제학교에서 김봉출, 류춘계, 김진낙, 유만길, 한기흡, 김상수, 노수홍, 장윤기(현지인), 송규현, 김현영(대륙 출신);

포크롭카 부락 (돌린스크  구역)에서 안톤파블로위츠(대륙출신);  우다르니 부락(우글레고르스키  구역) 칠년제학교에서 김태화(현지인);

토마리 시에서 허조, 조권식, 채정만(현지인), , 김만식, 와실리(대륙 출신), 한병찬, 정선생(북한 파견노무자); 로파치노 부락

(토마리 구역) 소학교에서 조만수 (현지인); 크라스노고르스크 시(토마리 구역) 칠년제학교에서 미하일, 올가알렉세예브나, 김일남(대륙

출신), 허남훈, 김동직, 류춘계(현지인), 김장흔(북한노무자);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제8호학교에서 이남진, 김화순(현지인), 타치야나

왈렌치노브나(대륙  출신); 시네고르스크  부락, 조선소학교에서 리순진(현지인); 코르사코프 시에서 김독준, 니가이타마라스테파노브나,

표도르(대륙  출신); 부유클리 부락(스미르니흐 구역)에서 안드레이, 김지리(대륙  출신); 첼놉스크 부락(레소고르스키 구역) 제3

칠년제학교에서 . ., . .(대륙 출신),리종대, 리인출, 김진철, 니명숙, 리회경, 요재군(현지인) 등 교사들이 사할린 여러 지역에서

조선어 교육을 이끌어 나갔다(2002년 12월에  필자가 실시한 앙케이트로 수집한 조사자료에서).

 

 

 

 

 

 

 

 

 

 

 

 

 

 

 

 

 

 

 

 

▲시네고르스크 조선학교 4학년 졸업(1954)(박승의 사진첩에서)

 

 

 

 

 

 

 

 

 

 

 

 

 

 

 

 

 

 

 

 

 

▲유즈노–사할린스크 사범학교 조선어과 제5회 졸업(1956 – 60)(박승의 사진첩에서)

 «사할린 주 인민 교육청에서 조선학교 개조 사업을 실시했으나 소비에트 교육제도로 완전히 개편했다고 할 수 없다. 그 것은 조선학교 교수

프로그램을 조선어로 다 번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6 학교에서만 졸업 시험과 진급 시험을 실행했고 나머지 20 학교 학생들은 1947년 9월1일에

1947–48학년에 재학할 것이다. 이유는 본 학교들에서 교과 프로그램을 부분적으로만 실천했기 때문이다.

조선 학교 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그리고 소비에트화를 보장 못하고 자질이 요구 수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새 학년부터 20명의 경험 있는 5–7학년

과목별 교사들과 70명의 소학교 교사들이 요구된다. 사할린에 조선어로 출판된 교과서가 전혀 없다. 그래서 주 인민 교육청에서 러시아어

교과서들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조직했다. 최근에 다음과 같은 교과서들이 번역 중이다:

      1. 산수–––––––––––4,5학년용;

      2. 대수–––––––––––6,7학년용;

      3. 지리–––––––––––4학년용;

      4. 모국어 독본       –1,2학년용;  

      5. 조선어––––––––  2학년용

       다음 교과서들은 이미 번역됐다:

      1. 한글(부크와리)––1학년용;

      2. 조선어–––––––––1학년용,

      3. 식물학–––––––––5,6학년용.

 

         인쇄소에 한글 활자가 없어서 사할린에서 조선 교과서를 출판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주 교육청은 교과서의 필요한 부들을 등사해 분배한다.

1946년에 주 인민 교육청은 교원자질향상소와 함께 하계 교원 강습을 15일간 조직하여 조선 교사들의 지식을 향상시켰다. 금년(1947)에도 한달

(47.7.5.–8.5.)간 하계 교원 강습을 조직했는데 소학교 교사 40명과 7년제 학교 교원 – 25명이 망라됐다. 조선학교에는 아동 서적, 정기간행물,

시청각자료 등이 전혀 없다. 전 소련 공산당(볼세비키) 중앙 위원회에 중앙 아시아에서 조선어 교사들을 사할린에 파견할 것과 조선어 교과서들을

발행할 것을 부탁한다.

사할린 주 인민 교육청장 브. 빠블로브(기아소 프.171. 오쁘.1.드.168,169)»


조선 학교에서 공부할 때 제 2 언어로 러시아어도 배웠다. 그러나 조선 학교 졸업생들의 러시아어 지식 수준이 낮았다. 그 것은 모든 과목들을 조선어로

교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 학교 8학년에 입학하니 공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2002년 12월에 필자가 실시한 설문 조사의 «조선 학교를 졸업한 후 어떤 어려운 점과 부닥치게 됐나?»란 질문에 다음과 같음 응답이 있었다.

«......제가 조선 학교 7년제를 졸업했거든요. 8학년을 러시아 학교에서 공부하니 정말 굉장히 힘들었어요. 조선 학교에서 모든 과목을 모국어로 했으니

제가 러시아 학교에서 처음엔 러시아어, 러시아 문학은 물론 다른 과목에서도 많이 뒤떨어졌어요. 러시아어로 된 학술어도 복잡하고, 벙어리처럼 설명도

못하고….한 반년이 지나 그 사정이 많이 나아 졌고 우수한 점수도 받기 시작했죠. 특히, 제가 좋아한 건 수학과 물리학. 하나뿐인 3점은 러시아어였죠»

(<훈공기장 수여 받은 인청학씨>에서. 새고려신문 2000. 9. 8. 제2쪽).

«러어 지식 수준이 낮았음»(안춘대, 59세, 새고려신문 사장),

 «지식이 부족했음»(박해룡, 64세, 사할린주 한인 협회 회장),

«조선 학교에서는 전 과목을 통해 조선어로 수업했고 러어 시간이 적었던 관계로 러어가 약해 졸업 후 직장에 취직하기나 특히, 대학에 입학하기가 

어려웠음»(석혜경, 66세, 새고려신문사 사원),

«러시아어 지식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취직하기나 대학 입학하기가 어려웠음»(정태식, 72세, 주 한인협회 고문)»이라고 대답했다(2002년 12월에 필자가

실시한 앙케이트로 수집한 조사 자료에서).

위에 지적한 러시아어 지식 수준이 약했다는 것이1960년대 초에 사할린 한인 동포 제 2세의 한국어 교육이 쇠약해지게 된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1959년 9월 28일 마지막 7차 일본인 귀국이 마감됐는데 조선인들은 사할린에서 남아 있게 됐다. 귀국의 희망이 점차 사라지게 되어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한인들의 마음을 괴롭혔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전문 교육이나,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러시아에서 살아야 하면

조선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경향이 러시아 학교에 학생들을 옮기게 한 이유가 됐다. 해방 후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을 상실했기에 무국적자로 됐다.

1950년대에 사할린 한인들은 소련연방내각의 제 2188–823 번과 제 819–391번 지령(1958년 7월 25일발)에 의해 소련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58–60년 간 4882명이 소련 국적을 획득했는데 4067명이 무국적자였고, 715 명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할린 주 공산당과 행정부는 조선학교들에서 교육 방법, 교사들의 낮은 지식으로 학생들에게 적당한 지식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1963년에 조선

학교에서 러시아어로만 교수할 것을 결정했다. 1963년 5월 13일에 사할린 주 집행 위원회의 제 169번 지령에 의해 11 조선중학교들; 즉 코르사코프 시

제2학교, 돌린스크 시, 마카로브 시 제2학교, 포로나이스크 시 제4학교,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제8학교, 고르노자워드스크, 홈스크 시 제5학교, 체홉 시

제2학교, 토마리 시, 크라스노고르스크 시, 우다르니 촌 제 2학교들을 일반 러시아 8년제 학교로 개조했다. 1952년 9월 1일에 포로나이스크 시에 한글

지도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 전문 학교가 설립되어 약 400여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이 주 내 뿐 만 아니라 모스크바,

상트페체르부르그 및 여러 대륙 지역에서도 한국어 교육에 큰 공을 세운 훌륭한 인재들로 성장했다. 이 학교도 1963년에 폐교됐다. 1964년에 이르러 구

소련 정부는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조선학교인 제8번학교를 폐교하고, 러시아학생들이 다니는 제9번학교와 통합했다. 지방의 조선학교 또한 2–3년의

시차를 두고 차례로 타 학교와 통합되면서 사할린지역에서 한국어의 사용이 점차 위축되고 한국어 교육도 사실상 사라지게 됐다.

 

<전후 1963년까지의사할린조선학교현황>

     

1945

1946

1947

1949

1950

1955

1958

1963

총 학 교 수

27

36

39

68

72

54

41

32

국 민 학 교

27

28

28

55

57

52

17

10

7년제중학교

8

11

13

15

22

13

11

10년제고등학교

11

11

총 학 생 수(명)

2300

3000

3137

4692

5308

5950

7212

7235

 I (출처: 사할린한인  역사회복 희망프로젝트: 민족교육 역사sakhallinkorean.history.com/.../ 민족교육의역사)


 

4) 조선어교육관계자의인터뷰사례들

 석혜경: " 1936년 5월 25일에 조선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태어났습니다. 1943 년에 7살의 나이에 온 식구가 아버지를 따라 가라후토 오찌야이시

(현 사할린주 돌린스크)에 와서 그해 일본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2학년(1945)까지 다녔습니다. 가라후토에서 일제시대인만큼 학교에서 전적으로

일어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일본문학, 산수, 도화, 도덕적 교양을 주는 수신 등 과목이 있었는 것 같습니다. 해방 후 돌린스크시에서1946년 9월에

조선학교가 설립되어 2학년에 입학하여 1948년에 소학반 4학년을 졸업했습니다. 그 학교에서 해방 전부터 이 지방에서 거주하는 김이섭, 김지각,

석차술선생님들이 교직을 맡았습니다. 제가 소학반에 다니던 때는 바로 해방 직후라 출판된 교과서가 없이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대륙에서 온

김병하 선생님이 보내준 재료나 이곳 교원들이 구하거나 만들어 등사한 것으로 배웠으며 특히 산수같은 것은 일본 교과서를 번역하여 이용했습니다.

차후 국어독본, 문학, 역사책 등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학교가 완전히 조선학교인만큼 모든 과목을 조선어로 가르쳤다보니 조선어 발전템포가

빨랐고 또 일본학교에 다니던 학생들, 나이든 학생들이라 한자도 섞어 가르쳤기 때문에 조선어를 더 깊이 파악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처음 설립된

때에는 자지방의 유식한 사람들이 교편을 잡은 것만큼 조선어는 능통했지만 교수방법에 있어서는 부족점이 있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한 정도의

사람들, 교원들이 모자랐습니다. 차후 대륙에서 교육대학들을 졸업한 사람들이 파견되어 와서 교원들이 원만히 충분했고 그들의 지식정도도

높았습니다. 학기마다 우등생들에게 우등생 상장들을 수여하여 격려했습니다. 반면에 학교에서 규율을 위반하거나, 특히, 일본말을 쓰는 경우에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걸상을 들고 벌서든가 또는 채로 손등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드물었습니다. 당시 과목별 올림피아다나 콩클 같은

것은 없은 것같습니다. 그러나 자주 운동회, 음악회, 예술출연 등이 있었고 여학생들에게 춤도 가르쳐주었습니다. 돌린스크에 처음에는 초급중학교가

설립됐는데 학생수가 적다하여 1949년까지 소학반 밖에 없는 관계로 저는 4학년을 마치고 브이코프 학교로 넘어가 거기서 7년제를 마쳤습니다(1952).

1954년도에 사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58년에 졸업. 바로 해방 후에는 조선어 교수법이 미약했다고 볼 수 있지만 차츰 출판된 교수법, 철자법

교과서에 기초하여 교수방법이 체계성을 띠게 됐고 또 특별히 지적할 것은 한자들을 가르치면서 술어들을 파악시키다나니 우리말을 더 깊이

습득했다고 봅니다. 시청각 자료나 학용품이 매우 부족했고 교과서, 직관물, 기술장비 정도는 보잘 것 없었습니다. 많은 부족한 자료들을 교원들,

학생들이 손수 만들어서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학교 졸업생들의 지식수준은 높았습니다. 전체 과목을 우리말로 수업하다보니

우리말로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제가 돌린스크 조선학교에서 받은 조선어 지식이 충분히 깊은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사범학교에 입학할 때 특히

느끼게 됐습니다. 현재 한국어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실지와 결부되지 않은점, 수업시간 외에는 조선어를 사용하지 않는 점을 결함으로 봅니다.

  저는1954부터 1958년 동안 사범전문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돌린스크 시 조선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66년부터 라디오우리말방송국, 다음

우리 신문사에서 현재까지 근무합니다. 제가 조선학교에서 전과목을 통해 조선어를 수업했고 러어시간이 적었던 관계로 러어가 약해 졸업 후 직장에

취직하거나 특히 대학에 입학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러시아에서 사는만큼 현재 1946–63년 시기의 범위로까지의 한국어수업은

필요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어교육 범위는 좀 적은 것 같습니다.»(박승의, 석혜경과의 인터뷰에서,  2002년 12월 23일, 새고려신문사)

안춘대: 1943년 5월 8일에 사할린 주 마카로브 시에서 출생했다. 1952년 부유클리 부락 조선학교 1학년에 입학했고, 당시 부교장은 김안드레이

(대륙 출신), 담임선생은 김지리(북한파견노무자였다. 한글을 능통하게 아시는 분들이 모국어와 한자를 가르쳐 주었다. 교과서로는 김병하의 «한글»,

«조선어독본»을 사용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 특히 남자 학생들이 벌도 받곤 했었다. 수업 외에 수학 올림피아드, 예술축전에도 참가했다. 1959년에

포로나이스크 시 조선 칠년제 학교를 졸업했는데,  5–7학년에 포로나이스크 시 조선학교에서 김병하, 최명길 선생님들이 모국어를 가르쳤다. 특별한

교재가 없었으나 선생님들 자체(대륙에서 오신분)가 한글을 무척 사랑했고 한자를 잘 알았다. 때문에 나는 한국어시간을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나의

한글지식수준에 대해 평가하기 어렵지만 한글을 모국어로 취급한다. 1959–60년까지 조선학교에서 10년제를 졸업한 분들은 한글지식 수준이 높다고

본다. 50년대에 교재, 학습자료들이 부족했다. 현재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제9동양어문학교, 제15호학교, 동양대학,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충분하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63년에 유즈노–사할린스크 사범전문학교 조선과를 졸업한 후 1968년에 유즈노–사할린스크 국립 사범대학교

지리자연과를 졸업했고, 새고려신문사에서 사장(주필)으로 일한다.(박승의, 2002년 12월에 진행한 앙케이트 질문에 응답)

허남훈: 1936년 4월 3일(음) 충청북도 소태면 야동에서 허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할린 토마리 시에서 1943년4월1일에 일본 소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일본어를 배웠다. 해방 후 1946년 10월 15일에 부친 허조씨가 설립한 조선학교 1학년에 다시 입학했다. 교직을 현지인인 허조,

조권식, 대륙에서 모집으로 온 남 윅토르, 김만식, 안 와실리, 북한노무자로 온 한병찬, 정선생 등이 맡았었다. 허조 교장이 손수 작성한 «한글»을

등사하여 수업에 사용했고 1946년부터는 김병하의 «조선어 문자»를 교과서로 썼다. 조선어 수업에서 한문도 배웠고 글쓰기(습자) 시간에 붓으로

글자를 쓰는 것이 특이했다. 일본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다가 막대기로 매를 맞은 적 있었는데 조선학교에서도 혹시나 일본말이 튀어나오면 회초리로

벌을 받거나 벌금까지 물었을 때도 있었다. 학교 규율이 매우 높았다. 수업시간에 장난치거나 졸면 선생님은 분필을 던지거나 지시봉으로 어깨를 탁 쳐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토마리 시에서 1952년까지 7년제 학교에 다녔을 때 매년 봄방학에는 노래시합이 있었다.  일반 러시아노래 외에 한국말로 된

노래도 불렀고 시도 읊었다. 1956년 포로나이스크 시 사범전문조선학교를 졸업하고 크라스노고르스크 시, 마카로브 시 조선학교에서 일할 때에도 예술

올림피아다에서 학생들이 1,2위를 차지했다. 현재 한국어 교수법과 비교하면 그 당시 제일 중요한 것은 각 수업시간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포로나이스크 시 사범전문조선학교 졸업생들의 한국어 실력이 높았다. 김병하 선생님의 공로가 컸다. 크라스노고르스크 시 조선중학교에서

강 미하일, 마카로브 시 조선학교에서 허일 선생님의 한국어 교수법이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만일 1963년 전처럼 오늘날 한국어교육을 실시하면

학생들이 한국어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과목을 한국어로 가르쳐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러시아어가 약해질 것이 걱정이 되지만

해도… 러시아에서 사는 것만큼 러시아어를 잘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1965년까지 조선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폐교 후 1988년까지

건축기관에서 일을 했다. 1988년 10월에 토마리 시 제1중학교에서 한국어 교사로 취직하여 2009년 한국으로 영주귀국할 때까지 한국어 교육에

종사했다.

(박승의, 2002년 12월에 진행한 앙케이트 질문에 응답)


 

5) 맺는 말

사할린 주 공산당 위원회, 주 행정부, 인민 교육청은 1960년 초에 조선학교 폐쇄의 이유로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내세웠다.  첫째로, 교원들의 부족과

그들의 낮은 지식 수준, 둘째로, 교수법 보장의 약점과 학교 시설의 부족한 점, 셋째로, 조선학생들의 지식 수준이 낮은 점, 특히 러시아어, 넷째로,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러시아 학교에서 공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숨어 있는 제일 근본적 원인은 소련이 그 당시 다민족 정책을 단일 민족 정책으로 바꾸는데, 이를테면 소수민족들의  «러시아화»를 실시하는

데 있었다.  필자의 생각으로 또 하나의 이유는 일본인들이 인양한 뒤 사할린에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됐다. 1946년 종전 직후 대륙에서 사할린으로

4386세대의 2만4942명의 소련시민들이 조직 모집으로 이주했다. 1947년에는 16만5천 명이 또 이주했으나 빈 남 사할린 땅을 이들로 채울 수 없었다.

만일 조선사람들까지도 귀국시키면 사할린을 노동력의 부족으로 경제 개발을 실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43,000명의 조선인들이 이 열악한

지역에서 경제 개발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그들은 공민으로서의 권리도 불확실하고 심리상태도 불안전했다. 한편 소련은 조선인의 운명에

동정을 했지만, 당시에 극도로 부족한 노동력으로서 조선인을 사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쿠진, 1993).

1966년에 한국 정부의 요청에 소련 정부는 무반응이었다.  이렇게 사할린 잔류 한인 동포들은 일본은 물론 소련과 대한민국의 관심 대상이 아닌 것을

체험하게 됐다. 러시아인과 동화해야 했고 자기의 민족 문화 풍습을 잊어야 했다. 조국도 모르고 다수의 경우 서러운 생활을 하게 됐고 무권리, 민족

차별을 몸소 겪게 됐다. 소련 당국은 조선 학교, 조선 극장과 예술단을 폐쇄하고 일반 생활에서도 사할린 한인들을 여러 가지 난관에 부닥치게 했다.

소련 정부는 한인들을 노동자원으로 억류하고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소련 정부는 국적 선택을 요구했다. 그러나 많은 한인들은 소련

공민증을 가지면 귀국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무국적자로 남았다. 무국적자의 이동이 부자유하고 생활이 몹시 불편했지만 귀국 희망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살아나갔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0년 한․러 수교 이후 한국어 학습 붐이 일어나면서 사할린지역에서 한국어 교육이 재개됐다. 1991년 사할린국립대에

한국어과가 설치되고, 1992년에는 유즈노–사할린스크 제9학교가 한국어교육 활성화에 따라 ‘동양어문학교’로 지정됐으며, 1993년에는

사할린한국교육원이 개원하는 등 사할린 지역의 한국어 교육이 점차 활성화됐다.

현재 사할린대학교 한국어과 교수들은 한국어 교원들을 양성하는 데에 자기의 특이한 방법을 찾고 있다. 사할린 조건의 특성을 고려한 독창적인

교안과 지도서의 작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한국어과의 졸업생 200 여명이 여러 러시아 지방에서 교사 및 번역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러한 실태에서 한국어과 교수들은 많은 교수 방법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문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한국어 교육의 전략을 규정하는 교수 방법의 태도. 얼마전까지는 외국어 교육 방법에는 형식적 태도가 우세했다. 외국어 교과를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것이 중요 방법이었었다. 교수들은 기능적 태도의 개념을 선택했다. 이 개념의 주제는 다음의 글에서 알 수 있다: “구두로나 서면으로

교제과정에서 작용하는 것을 그대로 습득한다”. 기능성은 교육과정의 성질을 언어체의 각 부분들이 상호 작용할 때만 나타난다. 한국어 교사의

직업활동에서 제일 중요한 작용은 교제, 교육 및 구성계획 기능이다.

둘째로, 한국어 대화체의 문법적 측면, 문법 사항의 의미론적 분석 및 학습자료의 제시. 기능적 태도의 개념은 학습자료를 고를 때만 표현되는 것

아니라 문법사항 연습문제, 총체에도 나타난다. 다양한 형태의 연습 문제들은 실제적인 학습내용을 충분히 익히고 활용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한국생활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실제 상황을 본문의 내용으로 삼고 간결하면서도 압축된 문장 표현을 사용하며 관용구나 한국어 특유의 표현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회화체를 익힐 수 있게 한다. 이런 것을 실천하기 위해 한국에서나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서 출판한 교재들을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편찬한 “한국어”와 한국 서울 우신사 출판사가 발행한 “기초 한국어 I,II”에는 학습자료를 외국 연수생이 한국인과

대화하는 식으로 짧고 어휘는 생활 주변에서 많이 사용되고 일상 언어의 생생한 현장감을 지니고 있는 것들을 골라 써있다. 기본 문형도 다양하게

제시됐다. 사범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학생들이 최고 정도로 한국어를 습득할 뿐만 아니라 교원노동의 숙련을 터득하는 것,

즉, ”어떻게” 한국어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해하는 학생들에게 저절로 머리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한국어과

교수들의 많은 연속적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진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로, 한국어 교육은 한국어 실력의 특성을 단계적으로 편성하되, 소개∙준비의 단계, 자동화 단계, 사상 전달 실행 단계로 나눠진다.

초보 단계에서 사할린 대학의 한국어과 교수들은 학생들의 표준 발음의 능력을 수업시간에 긴장한 실습, 풍부한 듣기연습, 한국어보유자와의 대화,

노래, 시외우기, 짧은 극제작 등 여러 가지 교외 실습을 통하여서 세운다. 사할린 한인들은 표준발음을 습득하기 전에 이미 가정 조건에서 방언발음,

실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올바르게 발음법을 가르치는 데 매우 힘들다. 이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수들은 러시아어음의 모방, 비유의 지배를

사용한다. 이 사업이 대학에서 일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진행되고 있다. 단계적 언어 실력형성의 원칙에 따라 발음능력만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어휘나 문법을 가르칠 때에도 교수법을 만든다. 초보 단계에서는 교육과정에서 학생들의 러시아어 지식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교수법

연구자들은 외국어를 가르칠 때 모국어를 한마디도 사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어과 교수들의 경험에 미루어 보면 이것이 과오라고 생각된다.

러시아어는 학생들의 일상생활에서의 자연스럽고  부단한 교제, 사유, 수단인데 외국어는 언어 환경 외에 사용되는 불완전한 교제수단일 뿐이다.

모국어의 영향을 제 마음대로 금지하여 막을 수 없다. 모국어는 글의 의미론적 분석, 학습이해평가, 의사를 형성, 표현할 때 꼭 쓰여야 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한국사람의 사고방식, 그리고 역사와 전통 문화, 한국인의 특징을 지닌 자료들을 교안에 제시해야 한다. 언어는 그 언어 사용자들의

의식이나 사상, 감정, 정신을 나타낸다.  또 역으로 언어가 그러한 사상이나 감정을 지배하고 형성시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국어 외에 또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휘를 암기하고 있다거나 문법적 정보에 익숙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해당 언어 사용자들의 문화 역사를

통한 그들의 정신에도 접근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와 국제사회 속에서 한국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어를 습득할 때 문화에

관한 자료들을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등 국어과정에서 제시해야 한다. 그 자료들은 한국의 과학, 기술, 사회, 정치, 문화, 예술 및 일상 생활관에

대하여 학생들에게 실제의 정보를 알려주어야 한다. 한국어과 교수들은 학생들의 한국어 교육 첫걸음부터 언어정세 형성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그의 정세의 조직은 말하기 상황에 따라 바뀌어져야 한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업시간에 간단한 대화를 이용하고 조건이 붙지 않은 상황에서

언어 기능을 발휘하도록 한다. 예를 들면, “생일초대”란 제목에서 각 화자는 자기의 구실에 따라 대화를 짓고, “교통”이란 제목에서는 실제적으로

자기가 사는 도시에서 “어디, 어떻게, 무엇을, 언제” – 이런 의문사들에 대답하면서 이야기를 한다. 언어 기능 신장을 위한 교수의 지도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언어사용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학생들에게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고 교수∙학습자료나 교수의 지도는 학생들이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과정에서 언어와 의미 사이의 연결이 이어질 수 있는 데에 더 많은 고민과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더 앞으로 나아가서는 시청각 자료를 이용한 수업시간을 마련하는데 학습의 조건상에서 벗어나갈 수 있고 자연스러운 장면에서 한국인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지방의 사투리도 들을 수 있다. 매우 효율적인 것은 주어진 문장에 따라 짧은글짓기이다. 자기나

주위 사람들의 실제적 경험이나 상상한 사건들을 글에 옮긴 것을 사할린 주에서 발간되는 “새고려신문”의 “학생면”에 저자의 사진과 함께 실리게 된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는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다”, “어제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어요”,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게 졌어요” 등 제목으로 매주

한번씩 나온다. 이 단계에서 한국어과 학생들은 사할린 한국교육원에 가서 수업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국에서 오 신분들과 나눌 수 있으며 여러

교회에서는 한국어로 예배를 할 기회도 있다. 그 외에 남부 사할린에서 거주하는 학생들은 매일 저녁에 “인데콤 – 사할린“ TV방송과 사할린

우리말방송KTV을 청취할 수 있다. 교육직업을 목표로 삼은 교사양성의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는 이론과학과의                                                                                                                                                                                                                                                                                                                                                                                                                                                                                                                                                                                                                                                                                                                                                                                                                                                                                                                                                              이론어학 자료를 습득해야 되는 것이다. 한국어과의 졸업생들은 수사학, 국어학, 국문학의 지식, 개념, 원리를 터득해야 하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실제 언어과정에 해당해야 한다. 사할린대학교 한국어과의 교수들이 어떤 교육문제들에 집중하는가를 반복하여 보면, 첫째로, 교수 방법의

태도, 둘째로, 한국어 대화체의 문법적 측면, 셋째로, 한국어 실력의 특성의 단계적 평성, 넷째로, 이론학과의 습득이다.

이외에 다른 방면에서도 앞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언어교육 평가, 초보 교육 조직,  학생들의 연령 특성 고려,   한국에서의 교수들과 상급반

학생들의 연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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