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귀한운동)

사할린 한인 귀환 운동의 선구자들

 

  2차대전 당시 유태인들에게 쉰들러 리스트[1]가 있었다면 강제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귀국하지

 못한 한인들에 게는«사할린 리스트»가 있다.

  박노학, 그 자신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 온 그는 서슬퍼런

 냉전의 한가운데서 미귀환 사할린 한인과 고국의 가족을 만나게 해준 사람이다.

 그가 작성한 <화태한국인 귀환희망자 명단>은 아직도 강제징용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1)      사할린과 한국을 연결 한 박노학

일본과 소련은 1956년 10월 19일 «일소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국교 회복에 합의하고 1957년 8월 1일부터 1959년 9월 28일 7회에 걸쳐 사할린 잔류

일본인 집단 송환을 실시했다. 물론 위의 일련의 귀환 정책의 대상은 «일본인»에 한정되어 있었다. 일본은 카이로 선언을 이유로 잠정적으로 한인을

«일본인»에서 제외하고는 있었지만, 사할린 한인이 법적으로 «일본인»의 국적을 잃게 된 것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후였다. 한인은

일본 국적을 잃게 됐지만, 국적과는 달리 일본여성과 혼인관계에 있는 한인과 그 가족은 일본인의 «동반자»라는 자격으로 귀환을 인정했다.

홋카이도대학 현무암교수, 일본외무성 종전연락중앙사무국에서 생산한 1957년 자료 «조선인과 혼인관계에 있는 일본부인 및 그 가족의 입국관계»를

보면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우선 이 자료에서 보이는 조선인 귀환 가능자는 다음의 4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1. 일본인이 동반하는 처 또는 남편(내연관계를 포함함)으로 종전 전부터 계속해서 원래 일본의 관할 하에 있었던 화태(樺太)령에서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에 관해서는 법률 제126호(1952년) 2조 6항 해당자로서 그 상륙을 허가한다.

2. 앞의 1의 조선인이 동반하는 만 20세 미만의 아이로 배우자가 없는 자에 관해서는 재류 자격령 4–1–16–2(3년)으로 상륙을 허가한다.

3. 앞의 1 또는 2 이외의 자로 일본인 가족인 조선인에 관해서는 재류 자격령 4–1–16–3에 의해 그 상륙을 허가한다.

4. 앞의 1, 2 및 3 이외의 자 즉, 일본인의 가족이라고 인정되지 않는 자는 불법입국자로 취급된다.

이 조항에 의해 일부 사할린 한인이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됐지만, 이 조항은 철저하게 «일본 국민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즉, 일본제국

호적조항으로 인해 배제됐던 한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을 일본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조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반가족이라고는 하더라도 한인

배우자의 부모는 그 범주에서 제외됐다. 따라서 노부모와는 또 다른 이산을 경험해야 했다. 이 정책에 의해 1959년까지 일본여성의 동반자 가족으로

일본에 귀환한 한인은 1794명(486세대)에 달했다. «화태(樺太) 귀환 재일한국인 회»가 사할린의 귀환희망자를 조사한 명부(4권, 12,600여명)에 이름,

생년, 출생지, 가족사항이 가타가나로 적혀 있다(화태(樺太)는 사할린의 일본식 지명인 가라후토의 한자 표기이다).

박노학은 12차 귀환부터 16차 귀환까지 즉, 1958년 8월 1일부터 1959년 9월 28일까지 일본에 도착한 사할린 한인들의 명부를 작성했다. 명부 상단에

도항 차수와 승선배명, 도착날짜, 도착항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명부구성은 이름, 생년월일, 현주소, 처, 비고로 되어있다. 총 기록 인원은 419명이다.

이 명부 비고란에는 귀환 이후의 생활과 신변의 변화 등, 즉 이혼, 사망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어, 최초 명부 작성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관리하면서

기록을 첨가해 갔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철저하게 «일본 국민»을 받아들이고 한인을 재외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을 때 당시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1952년 4월부터 한일교섭을 시작하여

식민지 지배 및 전쟁피해 배상에 대한 논의를 공식화했다. 이승만 정권은 일본과 식민지 지배 및 전쟁피해 배상을 요구하면서도 국내에서의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일본과는 그 정책적 기조를 «한일 방공협조»를 강조했고, 국내에서는 «반일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전략을 취했다. 따라서

사할린 한인의 귀환문제는 시급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방공협조의 틀 속에서 적극적으로 일본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문제이므로 그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국전쟁 특수를 이용하여 일소국교회복, 중국과의 경제교류 추진, 북한과의 민간교류 등 사회주의권과도 적극적으로 접촉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태도에 이승만 정권은 «한일 방공협조»에 어긋나는 일본정책 기조를 비난하면서 보다 강력한 반일 이데올로기를 파급시켰다.

정책적으로는 1954년 8월18일에는 대일 통상 중단, 여행의 중단조치를 발표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할린 한인의 귀환문제를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1955년 5월 2일 일본은 한국의 그와 같은 기조와는 달리 북한의 외상과 정상적인 경제 및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하여, 조일통상이

시작된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이승만 정권과 일본 정부는 더욱 크게 충돌했고, 더욱이 1958년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송문제»는 더 이상의 두 정부의

한일교섭 논의를 불가능하게 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재일조선인 북송문제»를 비난하면서 사할린 한인의 한국 귀환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극단적인 반일정책 및 일본의 무성의로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잊혀지게 됐다.

이후 장면 정권, 박정희 정권에서 논의된 한일교섭에서도 사할린 한인 귀환문제는 탁상에 올려지지 않은 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 체결됐다.

그 대신 1960년 12월 사할린 한인 귀환 추진을 국제적십자사에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이후 사할린 한인 귀환문제가 한국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66년부터이다. 그러나 이때는 귀환의 귀착지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이 협상하지 못해,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는 진전 없는 논의가 계속되어 오다가 1972년 일본과 소련의 평화회담을 기회로 다시 한국 정부가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의 논의도 한일 양 정부의 실질적 성과없이 적십자사를 통한 논의를 계속하기로 하고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할린 한인의 귀환의 책임을 지고 있는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사할린 한인문제 해결에 대하여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귀환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작성하여 직접 당국과 국제사회에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시작했다.

2008년 3.1절을 맞아 KBS 1라디오(FM 97.3khz)와 한민족방송(972khz., 1134khz)이 30년 동안 사할린 한인의 고국 귀환운동을 전개했던 박노학을

조명했다. KBS에 따르면 한민족방송과 제1라디오는 3.1절 89주년을 맞아 “지워지지 않는 진실, 사할린리스트”를 각각 1일 오전 1시10분부터

1시50분까지, 오후 2시20분부터 3시까지 방송했다. 방송은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한인들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가족관계 그리고

한국의 고향을 적은 명단을 읽어 내려가는 것으로 시작됐다. 한인 7000여명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있는 “화태 한국인 귀환 희망자 명단”은 박노학이

1966년 작성한 것이다. 이 명단은 사할린으로 끌려간 한인 중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했던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1988년 사망한 박노학은

1943년 사할린에 노동자로 갔다가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으로 귀환한 뒤 사할린 한인의 한국 귀환운동을 펼친 주인공이다. 박씨의 유족들은 1988년

이 명단을 KBS에 전달했고, 2007년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명단이 일본의 만행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될지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이번 특집에서는 “박노학 때문에 처음으로 한국의 친척과 편지 했다"는 내용의 사할린 한인들의 증언과 한국에

살고 있는 아들 박창규씨가 밝히는 아버지 박노학에 대한 기억, 박씨의 육성 자료, 진상규명위 관계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전하는 박씨의 존재 가치

등이 다뤄졌다. 또 1972년 “한민족방송(전 사회교육방송)”이 처음으로 내보냈던 “사할린 동포에게”라는 프로그램의 역사와 당시 답지했던 편지도

소개됐다. 이 프로그램은 사할린 한인과 고국의 가족 찾기를 주선했고, 일본 도쿄에 사서함을 설치하는 등 사할린 한인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1958년 일본 정부의 자국민 귀환 정책으로 일본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후 박 회장은 사할린에 남아 있는 동포들을 위해 1958년 “화태(樺太) 억류

귀환 한국인회”를 조직해 1988년 세상을 뜰 때까지 30년간 사할린 한인 귀환에 헌신했다. “화태(樺太) 억류 귀환 한국인회”는 나중에 “가라후토 귀환

한국인회”로 명칭을 바꿨다. 박노학은 이후 강제동원자들이 쓴 편지를 국내에 전달하면서 사할린 한인의 한국 귀환운동에 여생을 바쳤다.

박노학은 1912년에 충청북도 충주시 농가에서 태어났다.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23살에 결혼해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박노학은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의 전시동원이 극심하던1943년10월에 모집으로 사할린에 왔다. 전쟁 말기 일제가 강제 징용을 실시하면서 구장(區長) 등

앞잡이를 내세워 한 집에서 남자 1명은 지원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부친이 가족들을 보살필 테니 한 2년 고생하고 오라고 해 지원에 응했다.



[1]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 (홀로 코스트) 중 기업가에서 나치 당원이기도 한 오스카 쉰들러가 1,100 명 이상의 유대인의 생명을

구한 실화. 홀로 코스트를 소재로하여 그린 작품의 대표격으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자신도 유태계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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