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귀한운동) - Page 2

 

«그 당시 아버지는 2남1녀를 둔 31세의 가장이었어요. 충주에서 이발관으로 일하셨어요. 하루 아침 일본놈들이 와서 한 가정에서 남자 둘 있으면 한

명이 모집으로 일본에 가야 한다고 했어요. 10 살 더 어린 동생을 데려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가시겠다고 나섰어요»(박창규의 인터뷰에서. 2012년

12월 01일).

1945년 종전까지 나이부치(현 브이코프) 탄광에서 일했다. 그는 사할린에서 일본 패전을 맞았다. 그와 동료들은 당연히 고향에 곧 돌아갈 수 있다고

기뻐했다. 초기에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먼저 귀국하게 되리라는 전망도 있었다.

박노학은 귀국길이 막히자 밀항선을 타고 나오려다 소련의 연안 경비가 엄중하자 포기하고 동료들과 조선인거류민회를 만들어 부두 하역노동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자1946년 9월 친구의 권유로 홈스크(그 당시 마오카) 태생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서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1946년 11월27일 미국과 소련 사이에 철수관련 잠정협정이 맺어져 일본인만 출국이 허가됐다. 그의 일본인 부인은 주변에서 부부가

갈라지면 안 된다고 해 그냥 눌러앉았다. 1949년 7월 일본인을 태운 마지막 배가 떠나고 나서 한국인 귀환이 시작되리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야말로

헛된 기대로 끝났다.

1956년 10월 일소공동선언으로 일본과 소련이 국교를 정상화하고 소련이 일본의 유엔가입을 인정했다. 그 결과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한인의 출국 길이

열리게 됐다. 박노학에게는 1957년 12월에 귀환허가 통지가 나왔다. 1958년 1월초 수송선의 출항지인 홈스크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새벽에 역으로

갔는데 영하 25도–30도의 추운 날씨에도 수많은 친구들이 나와 환송을 했다고 한다. 친구들은 자신들도 하루라도 빨리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 환송 행렬은 중도 기착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노학이 일제 패망 12년 4개월여의 세월이 지나서 겨우 귀환선에 탈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과 재혼을 했고, 그 부인이 1940년대 말 홀로 떠나지 않은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인 것이다.

박노학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억류한국인이 빨리 귀환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는 탄원서를 작성해 서명을 받았다.

귀환선이 교토 마이즈루에 입항하고 나서 연고자가 있는 사람은 흩어지고, 박노학 일가를 포함해 그렇지 않은 사람은 도쿄 아다치구에 있는 귀환자

숙소로 들어갔다. 사할린에서 나올 때 갖고 나올 수 있는 돈은 어른 1인당 100루블, 어린이 50루블로 제한됐다. 일본 국적을 가진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의 귀환수당과 귀환여비가 지급됐지만, 박노학 등 한국인은 지급대상에서 제외됐다. 마이즈루에서 도쿄로 가는 귀환열차에서

도시락을 나눠주는데 그것조차 지급하지 않았다.

박노학은 사할린에서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면서 사할린에 억류되어 한국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동포들의 처지가 너무도 불상하게 여겨졌다.

그는 일본으로 가는 연락선 안에서 사할린 동포들을 영주귀국 시켜달라는 내용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 초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에 도착한 박노학은 사회활동의 편리상을 고려하여 거주지를 도쿄로 정했다. 1958년 1월 20일 박노학과 동료 4인은 배 안에서 쓴 진정서를 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달라고 도쿄 한국대표부를 찾아갔다. 당시 참사관이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은 “이 문제는 대단히 어렵고 국제정치에 기대지

않으면......” 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고 한다.

1958년 2월 박노학 등 귀환자 50명은 도쿄에서 «화태 억류 귀환 한국인 회»를 결성했다. 잔류동포 귀환과 생업자금 지원 등의 요청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 정부 부처를 찾아 다니며 진정을 했지만 냉대만 받았다. 한 외무성 간부는 “일본은 패전국이고 당신들은 전승국이기 때문에 소련

정부와 직접 교섭하도록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이 문제를 취재하려는 일본 신문기자에 대해 외무성 간부는 “국익에 반하는 것을 왜

취재하는가”고 반문했다. 당시 박노학의 거처에는 사할린에서 귀환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편지가 많이 배달됐다. 국내의 육친과 직접 편지 주고받기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서신 중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신을 주고 받으며 1966년 6월까지 무국적, 소련국적, 북한국적을 포함해 약 7000명

귀환희망자를 확인했다. 한국 영주 희망자 1410세대 5348명, 일본 영주 희망자 334세대 1576명을 합쳐 1744세대 6924명이었다. 박노학의 모임은 이

명단을 한국 정부에 제출했고 한국 정부는 1969년 8월에야 일본 정부로 명단을 넘겼다. 해방된 지 24년만의 일이다. 일본 정부는 소련 정부에 명단을

넘기고 이 문제를 거론했으나 실질적 진전은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 귀환 희망자에 한해 귀환비용을 한국 정부가 부담한다면 소련 정부와

교섭할 용의가 있다”고 회답을 했다. 나중에는 한국 귀환 희망자의 여행경비는 부담할 용의가 있다는 식으로 나왔다.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잔류 동포들이 현지에서 계속 출국 허가를 요청하자 사할린 경찰이나 출입국 관리사무소(OVIR)는 “아직 일본에서 귀환 통지가 오지 않았다. 받아줄

데가 없는 당신들이 어디로 가냐, 일한 양국 정부가 인수통지를 내도록 청원서를 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보면 사할린 관련 소송으로 이 문제가 여론의 조명을 받게 된 1970년대 전반까지는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사회 전체가 이 문제에

무관심했다. 이른바 진보진영에서도 사회주의권에서 왜 군사독재국가로 돌아가겠다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재일동포사회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박노학 등이 진정을 하러 다니면 기부금을 받으러 돌아다니는 협잡꾼이라는 문서가 민단의 지방조직에 나돌았다고 한다.

한일 국교정상화협상이 진행되자 이들은 양국 정부에 이 문제를 다뤄달라고 진정을 되풀이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간절한 요구는 양쪽에서 모두

무시당했다. 한국 대사관 쪽은 나중에 “가라후토 문제를 의제로 하면 한일조약 체결이 늦어지기 때문에 뒤로 돌렸다”고 사후 설명을 했다.

일본 외무성 동북아시아과는 “이번 한일회담에서 한국 정부는 청구권을 포기했다. 거기에는 가라후토 문제도 포함돼 있고 모두 해결됐다”고 답했다

한다. 그러나 ‘화태 귀환 재일 한인회’ 박노학 회장은 낙심하지 않았다. 즉시로 사할린 한인 귀환활동을 시작해야 하는데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방향을

몰랐다. 일본법률, 사회조직, 해당기관과 주소, 책임자와의 면회수속방식 등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한가지 한가지씩 물어가면서 방식을 배웠고

국회의원과도 만날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1959년8월까지 진정서를 만들어 일본적십자사, 외무성, 법무성, 후생성. 국제적십자사, 대한적십자사,

한국외무부장관, 법무부장관에게 보냈다. 박노학 회장이 사할린동포들을 위한 귀국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사할린에서 널리 알려졌다.

“박노학 회장(화태 귀한 재일한인회)이 바로 옆에 살았어요. 코르사코프에서 옆집에 살았어요. 아주마이가 일본(인).(그래서) 일본에 갈 수 있었단

말이요. 박노학 그 사람이 사업상 많이 했지. 편지 보내주고, 다. 사할린에 있는 사람들이 편지를 써가지고 일본으로 해서 대구, 거기로 편지가 왔는데,

이두훈(한국의 중국, 사할린 이산가족, 유족 모임 ‘중소이산가족회’ 회장) 그분. 편지가 처음에는 그분이 힘 많이 썼지요. 그 후에는 그 당시에 저,

여기서 한문을 써 보내면 한문을 보는 사람 없잖아요(내가 보고 했지.)”(서울 등촌동 임대아파트에서 만난 영주귀국한 한문형, 김인순 부부 인터뷰에서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6481&section=sc4, 201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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