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귀한운동) - Page 3

 

그러던 참에 “일본 정부가 받아준다면 조선인은 일본으로 보내주겠다”고 사할린 내무국에서 약속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귀국을 희망하는

사할린동포들의 편지가 매일 수십 통씩 박노학 회장에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편지를 고향의 가족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있었다.

박회장 부부는 사할린에서 오는 편지를 정리했다. 편지를 정리하는 데는 러시아어, 한글, 한자 등을 알아야 했다. 때로는 영어로 번역할 필요도 있었다.

글을 아는 사람을 찾아서 물어가면서 편지를 정리했다. 사할린에서 받은 편지를 한국 친척에게 보내는 것도 힘들었다. 박노학의 맏아들 박창규씨가

회상한다:

"사할린으로 간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 어느 날 일본에서 편지한 통이 왔죠. '아들아 잘 지내느냐, 보고 싶다'고. 그 때 아버지는 이미

강제동원자들의 편지를 국내로 전달하는 일을 하고 계셨어요. 도쿄에 있는 박노학씨에게 편지를 보내면 가족들을 찾아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우즈베키스탄중국 등지에 흩어져 있던 강제동원자까지 편지를 보내왔죠.". 박씨 부자가 우편배달부를 자처하면서 생사여부도 확인하지 못했던 많은

강제동원자가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박씨 부자가 한 일이 주목 받는 이유는 또 있다. 

아버지 박씨는 한ㆍ러 수교를 보지 못한 채 1988년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강제동원자들이 보내오는 편지를 바탕으로 주소와 가족관계 등 강제동원자

6000명의 신상 정보를 기록하는 명부를 만들었는데,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던 일본을 꼼짝 못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역사적 기록이 됐다.

방일권 한국외국어대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는 "강제동원자 개개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록으로 '사할린 판 쉰들러리스트'라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일본의 사할린 징용 진실을 밝혀라"한국일보, 2012.09.25.). 

박 회장은 사할린에서 받은 편지를 기초로 영주귀국 희망자 명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까지 근 2000명, 1967년까지는 6924명의 편지를

정리하여 명부를 작성했다. 매명의 성명, 출생지, 생년월일, 국적, 현주소, 한국친척의 성명 등을 기입하면서 명부를 작성하기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경우 명부작성에 필요한 자료가 부족하여 사할린으로 편지를 보내어 확인해야 했다. 종이 사는 돈을 아껴 쓰기 위해 학생노트를

이용했고 글도 잘게 썼다. 소련으로 보내는 편지라 그 내용과 말마디에도 각별한 주의를 돌려야 했다.

한국과 일본간에 오랫동안 끌고 있던 회담이 1965년에 실현됐다. 이때 박회장은 회담일정에 사할린 한인 문제를 첨부해 줄 것을 부탁했으나 한국

정부는 거절했다. 1969년에 일본 다나카 총리가 소련을 방문하게 됐다. 박회장은 영주귀국자 명부를 브레쥬네브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명부는 브레쥬네브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박회장은 어떻게 하면 한국소식을 사할린동포들에게 전할 수 있겠는가 생각

끝에 한번 KBS라디오 방송국을 찾아가서 사할린동포를 위한 방송을 부탁했다. 이렇게 1972년부터 매일 밤 두 번의 사할린으로 보내는 라디오방송이

시작됐고 ‘박노학 코너’가 생겼다. 이 방송을 사할린동포는 배게 밑에 라디오 수신기를 두고 들었다.

1974년 박회장은 1841명의 사할린동포에게 일본도항증명서를 만들어 보냈다. 그러나 수명에게서만 받았다는 회답이 왔을 뿐이었다.

다음 1975–1976년간에 또 1304명에게 일본도항증명서를 보냈는데 그 중 415명이 수속을 했으나 소련출국과 일본입국 허가를 받은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박회장의 활동은 조금씩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가 작성한 6924명의 영주귀국희망자 명부는 처음 한국 정부로,

다음은 일본 정부와 소련 정부에 전해졌다. 이것이 결국 한국, 일본, 소련 3국의 협상의 토대로 됐다. 최초에   일본 정부는 만일 한국이 귀국비용을

부담한다면 소련 정부와 교섭해볼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것은 자기들은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없다는 태도였다. 또한 일본외무성은 1965년

한일회담에서 한국은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다. 거기에는 사할린 한인들의 청구권도 포함됐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할린 한인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명부가 처음에는 사할린 한인이 한국가족들과 일본에서 상봉, 다음은 사할린 한인들이 일본경유로 한국방문,

사할린에서 직접 한국 방문이 가능하게 된 토대로 됐으며 나아가서는 사할린 한인들이 영주귀국을 하게 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박 회장은 자기의

30년간 운동에서, 소련출국 허가를 받고 일본영사관이 있는 나홋카에 가서 출국기한 3개월간에 일본입국허가를 받지 못하여 사할린으로 되돌아가서

사망한 “나홋카 4인 사건”이 가장 비참한 사건이었다고 했다.

«화태 귀환 재일한국인회» 박노학 회장은 지금까지의 자신들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하여 “1965년 6월 21일 한일회담을 조인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들이 이렇게까지 염원했던 귀환문제를 책상에 놓고 체결했는가? 그 분노를 하늘에 퍼부었다”고 한탄했다.

이후에도 절망하지 않고 탄원운동은 계속되어, 마침내 1970년대 한국, 일본 정부는 외상회의에서 사할린 한인 귀환에 관련 문제를 협상의 탁자에

올려놓게 됐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귀환 정착지를 둘러싸고 합의를 이루지 못해, 결국 1970년대의 논의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논의가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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