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귀한운동) - Page 4

 

«한일청구권협정» 체결(1965년) 이후, 1970년대 초반 소련, 일본, 한국의 외무회담에서 사할린 한인 귀환문제에 대해 별 성과 없이 끝난 후,

«화태 억류 귀환 한국인회»는 1971년 사할린 잔류 한인 귀국희망자 명부를 작성하여, 본격적인 귀환운동을 전개했다. 이산가족 상봉과 영주귀국을

위한 청원 또한 계속됐다.

“1969년7월4일, 한국외무부는 주한일본대사관을 통하여(박노학 회장이 작성한 ) 7000명의 귀국희망자 명부를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 전했는데

일본은 그 사실을 소련측에 통지했다. 결과(일본)국회서도 사할린 잔류 조선인 문제가   “일본에는 직접 관계없다”고 하면서도 “인도적 책임”이라는

시점에서 대책수립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외무상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자세를 보였으며 일본서도 이 문제는 벌써 피할 수 없는 단계까지

진행되고 있었다.(그 후에도 오랜 시간이 걸려서 문제는 조금씩 해결되어 나갔다). 결과 1994년 7월 23일 방한한 무라야마 일본수상과 김영삼 대통령이

회담하여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가 심의됐다. 그리하여 일본수상의 귀국 후 일본의 지원책을 결정하게 되어 약 5억 원의 요양원(인천), 그리고 안산

주거단지를 위한 27억 엔의 예산이 편성됐다”(“동북아세아의 코리안•디아스포라. 사할린을 중심으로 하여”. 성점모 역)

그 결과 일본과 소련은 한국 도항희망자의 경우, 일시도항을 허가하는 방침으로 정해가고 있었으나 북한의 항의로 소련이 입장을 바꾸어 출국금지

조치를 취해 1970년대의 도항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1980년대 일본의 변호사연맹, 일본 중의원 의원 쿠사가와 쇼조 등이 노력하여 일본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 갔다. 마침내 1980년대 초기는 일본에서 한국가족과 사할린 억류자가 상봉할 수 있게 됐다.

한소수교 이전인 1989년 2월부터는 사할린 억류자가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일시방문이 가능하게 됐다.

어렵게 마련된 일시방문(이산가족상봉)은 상당히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진행됐다. 우선 자격조건의 엄격함이다. 친족재회 등을 위해 방일 혹은

일본경유로 방한하는 일시방문자 중 국가예산으로 지원되는 자의 자격은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로 전전부터 사할린 거주하고 있던 자로

한정했다. 절차 또한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이 과정에서 «화태 귀환 재일 한국인회»와 «중소이산가족회»가 큰 역할을 했다. 우선 재회절차를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우선 사전에 조사해 둔 사할린 한인 귀환희망자에게 초청장을 보낸다. 초청장은 러시아어 및 영어로 작성하되, 특별한 형식은 없지만, 누구를 무엇을

목적으로 초청하는가를 적어야 했다. 초청장을 공증사무소에서 공증받아 법무국에 제출했다. 법무국에서 다시 공증을 받아 외무성 영사사증부

영사정책과 증명반에서 다시 인정받아야 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공증사무소, 법무국, 외무성 영사사증부 영사정책과 증명반에서 인정받은

초대장은 소련의 재회희망 당사자에게 보내졌다. 소련의 재회희망 당사자는 그 초대장을 가지고 패스포드와 비자를 신청한다. 신청이 수리되면 일본

외무성으로 연락해야 했다. 일본 외무성 외국인과에서는 소련의 재회희망자의 신분을 보증하는 신분보증인에게 신분증명서, 입국이유서, 체제일정표,

재직증명서, 원천 징수표, 호적등본 제출을 요구했다. 일본외무성은 신분보증인이 제출된 6종류의 서류를 7–10일간 심사하고, 심사에 통과하면 비자를

허가했다. 재회희망 당사자는 그 이후 비자를 받아 일본으로 입국했다. 이러한 절차 속에서 «화태 귀환 재일한국인회»와 «중소이산가족회»는 사할린

잔류 한인에게 초청장을 발급하거나 신분보증을 해줬다. 이외에도 사할린 잔류 한인으로부터 귀환희망 편지 및 연고자 재회신청서를 받고, 초청신청을

받았다. 사할린 잔류 한인으로부터 재회신청, 초청신청을 받은 «화태 귀환 재일한국인회»는 직접 한국의 도청, 시청에 연락해 연고자를 찾기도 하지만,

주로 «중소이산가족회»와 연락하여 한국의 연고자 확인작업을 했다. 이렇게 해서 연고자가 확인되면 박노학 회장을 비롯해 «화태 귀환 재일한국인회»

회원들은 초대장을 발부하여 일본외무성과 소련 정부를 통해 사할린 잔류 한인을 초대했다. 한편, 한국의 연고자는 사할린 잔류 가족을 맞이하는 데에

있어서 책임을 질 수 있는지에 대한 조사로 공증 받은 재정보증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서류가 완성이 되면, 사할린 잔류 한인과 한국의

연고자는 일본에서 재회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고도 사할린 잔류 한인의 국적에 따라 또다른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소련국적자의 경우는 비자만으로도 도항이

가능했지만, 무국적자의 경우는 비자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소련과 일본으로부터 이동증명서 및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다. «화태 귀환

재일한국인회»는 이산가족 재회 사업을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문제 의원간담회»와 연대하여 영주귀국 정책협의도

실시했다. 1989년 한일 정부간 영주귀국을 결정하고, 한국외교부는 «사할린교포 영주귀국업무처리 지침(1990.1)»을 정하여 영주귀국자 자격조건에

«국내연고자초청» 필수조건으로 했다. 이후 1994년 자민당, 사회당 정권에서 전후처리 문제에 관한 «여당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소위 파일럿

프로젝트 Pilot project)»를 구성하여 원폭피해자 문제와 한일 영주귀국 시범사업을 실시했다.

1994년 한일영주귀국 시범사업 실시해 1997년부터 2001년까지 1300명이 귀국하고 이후 한국 정부는 2004년도부터 영주귀국사업을 계속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여 2007년부터 2009년까지의 기한으로 «한일영주귀국 사업확대»를 결정했다. 그 이후에도 귀국 희망자가 있을 경우 사업을 계속한다는

조건으로 현재도 귀국희망자를 조사하고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할린 억류 한인에 대한 한일 간 정부의 대응 및 해결 방식은 일본식민지 지배책임, 혹은 전쟁책임으로서의 문제로 언급되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보다 복잡한 논리로 논의·해결되어 왔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냉전을 둘러싼 주변환경을 핑계로 실제로 방치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렇게 방치되어 있던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당사자 스스로가 노력하여 실질적으로 귀환정책을 견인해 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 국가기록원 수집자료 «이희팔 기증기록물 자료»와 «중소이산가족회 기증자료»는 그 생생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할린 한인의 완전한 귀환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사할린 한인의 귀환정책이 1994년 한일영주귀국시범사업, 2007년 한일영주귀국사업확대로 2014년 현재까지 사할린 한인의 영주귀국 및 일시방문,

역방문 등 이루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1989년부터 실시된 모국방문사업으로 2010년도까지 17,270명의 사할린 한인이 한국을 다녀갔고, 2001년부터

실시된 영주귀국자의 자녀와 친척들의 방문이 2010년까지 3484명이 다녀갔다. 2014년 12월 기준으로 영주 귀국한 사할린동포는 4292인이다.

해방 후 70년이 지난 현재 귀향의 꿈은 단순히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적으로 영주귀국이 가능한 한인 1세로 분류되는

노인도 귀향을 마음에만 두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60여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은 사할린을 또 다른 삶의 근거지로 만들었고, 사할린을 떠나게

될 경우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경험하게 되어 한국으로의 귀향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이들도 있다.

일본과 한국이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았던 세월만큼 그들의 삶은 귀향을 꿈꾸면서도 현실에 뿌리내렸어야 했고, 현실에 뿌리내린만큼 그들의

귀향은 기억 저편의 평생 ‛미완의 꿈’으로 자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할린 한인의 귀향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만큼이나 사할린의 삶의

터전을 지켜나간다는 의미와 등치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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