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귀한운동) - Page6

 박노학이 사할린 한인 귀환 희망자 명단을 작성한다는 소식이 전 사할린에 퍼졌다. 편지만 쓰는 것이 아니라 봉투에 러시아말과 일본말로 주소를

적어야 했다. 몇 달 동안 사할린과 일본 사이에 서신거래가 활발했고 명단 작성도 거침없이 잘 진행되어 박노학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이런 귀환

운동을 둘러싼 일련의 움직임은 소련 당국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사할린 한인 대부분이 남한 출신이니까 그들이 돌아가고 싶어하는 나라는

반공국가인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소련이 그들의 귀국을 인정할리 없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박노학의 사업과 그를 협조하는 사할린 귀환 운동은

당연히 ‘반소, 반공’ 행위로 파악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명단을 작성하니 이제 귀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사할린 각지에 전해져 이미

소련국적이나 북한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 다시 무국적자로 돌리려고 해서 대혼란이 일어났다. 잘 전달됐던 편지도 이제는 일본 박노학에게 가는

것이 드물어졌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각 편지를 KGB(소련 국가 안전위원회)가 조사하여 압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허조는 대륙으로

(이르쿠트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등) 공부하러 가는 사람을 부탁해서 편지를 우체통에 넣어서 일본으로 보내곤 했다. 사할린주의 KGB는 거기까지 손을

뻗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KGB가 반공분자들을 그냥 놓아둘 리가 없었다. 어느 날 공산당 사할린주위원회 조선인 담당자가 사할린의 «레닌의 길로»

조선신문사 기자와 같이 토마리제지공장 회의실에서 시 한인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신문기자가 “소련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에 가려는 사람은

반소분자이다. 사할린의 조선 사람들 중에는 귀국 희망자가 있을 수 없다. 귀국하고 싶으면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으로 가라. 북조선도 조선이

아니냐?”라고 발언했다. 이에 허조는, “맞다. 북조선도 조선이다. 그러나 고향은 아니다. 나는 고향에 아버지, 형제들이 살고 있다. 나는 고향에 가려고

한다. 당신들이 알다시피 지금 조선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 않느냐? 북조선으로 나가도 고향으로는 가지 못할게 뻔하지 않느냐? 나도 한때

북조선으로 갈 생각했다. 북조선도 조선이니까 어쩌면 거기서 국경을 넘어 남쪽 고향에 갈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라고

반발했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자본주의 국가에 가려는 것은 반동분자나 다름없다»라는 협박에 «그러면 너희들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느냐?

형제도 자식도 없느냐? 내가 부모형제를 만나겠다는데 무슨 죄가 되는가?»라고 허조가 남한 고향으로 가겠다고 주장했다.

그날 회의가 끝난 후 KGB에서 온 사람이 허조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회의 참가자들은 이런 행위에 분개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 당시

소련에서는 재판없이 투옥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회의 후 200명 이상이 서명한 청원서를 해당기관에 보냈다. 그 결과 15일 만에 허조는 석방됐다.

박노학과 사할린 잔류 한인들의 서신왕래를 근거로 5년여에 걸쳐 7천여 명의 귀환명부를 만들어 한국, 일본, 소련에 보냈고 영주귀국사업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박노학의 노고에 관한 자료는 일본에서 발간된 수많은 서적, 특히 “사할린과 일본의 전후 책임”(다카키 겐이치), “슬픈 섬 사할린의 한인”

(쓰노다 카주코), “한 자원봉사자의 기록”(아라이 사와코의 일기) 등과 여러 신문에 발표됐고 또 최근에는 인터넷, 특히 일본 웹–사이트에서도 여기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면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박노학이나 허조와 같은 일생을 사할린 한인 귀환운동에 바친 활동가에 대한 자료들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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