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의 운명 (귀한운동)

사할린 한인 귀환 운동의 선구자들

 

  2차대전 당시 유태인들에게 쉰들러 리스트[1]가 있었다면 강제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귀국하지

 못한 한인들에 게는«사할린 리스트»가 있다.

  박노학, 그 자신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 온 그는 서슬퍼런

 냉전의 한가운데서 미귀환 사할린 한인과 고국의 가족을 만나게 해준 사람이다.

 그가 작성한 <화태한국인 귀환희망자 명단>은 아직도 강제징용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1)      사할린과 한국을 연결 한 박노학

일본과 소련은 1956년 10월 19일 «일소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국교 회복에 합의하고 1957년 8월 1일부터 1959년 9월 28일 7회에 걸쳐 사할린 잔류

일본인 집단 송환을 실시했다. 물론 위의 일련의 귀환 정책의 대상은 «일본인»에 한정되어 있었다. 일본은 카이로 선언을 이유로 잠정적으로 한인을

«일본인»에서 제외하고는 있었지만, 사할린 한인이 법적으로 «일본인»의 국적을 잃게 된 것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후였다. 한인은

일본 국적을 잃게 됐지만, 국적과는 달리 일본여성과 혼인관계에 있는 한인과 그 가족은 일본인의 «동반자»라는 자격으로 귀환을 인정했다.

홋카이도대학 현무암교수, 일본외무성 종전연락중앙사무국에서 생산한 1957년 자료 «조선인과 혼인관계에 있는 일본부인 및 그 가족의 입국관계»를

보면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우선 이 자료에서 보이는 조선인 귀환 가능자는 다음의 4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1. 일본인이 동반하는 처 또는 남편(내연관계를 포함함)으로 종전 전부터 계속해서 원래 일본의 관할 하에 있었던 화태(樺太)령에서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에 관해서는 법률 제126호(1952년) 2조 6항 해당자로서 그 상륙을 허가한다.

2. 앞의 1의 조선인이 동반하는 만 20세 미만의 아이로 배우자가 없는 자에 관해서는 재류 자격령 4–1–16–2(3년)으로 상륙을 허가한다.

3. 앞의 1 또는 2 이외의 자로 일본인 가족인 조선인에 관해서는 재류 자격령 4–1–16–3에 의해 그 상륙을 허가한다.

4. 앞의 1, 2 및 3 이외의 자 즉, 일본인의 가족이라고 인정되지 않는 자는 불법입국자로 취급된다.

이 조항에 의해 일부 사할린 한인이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됐지만, 이 조항은 철저하게 «일본 국민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즉, 일본제국

호적조항으로 인해 배제됐던 한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을 일본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조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반가족이라고는 하더라도 한인

배우자의 부모는 그 범주에서 제외됐다. 따라서 노부모와는 또 다른 이산을 경험해야 했다. 이 정책에 의해 1959년까지 일본여성의 동반자 가족으로

일본에 귀환한 한인은 1794명(486세대)에 달했다. «화태(樺太) 귀환 재일한국인 회»가 사할린의 귀환희망자를 조사한 명부(4권, 12,600여명)에 이름,

생년, 출생지, 가족사항이 가타가나로 적혀 있다(화태(樺太)는 사할린의 일본식 지명인 가라후토의 한자 표기이다).

박노학은 12차 귀환부터 16차 귀환까지 즉, 1958년 8월 1일부터 1959년 9월 28일까지 일본에 도착한 사할린 한인들의 명부를 작성했다. 명부 상단에

도항 차수와 승선배명, 도착날짜, 도착항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명부구성은 이름, 생년월일, 현주소, 처, 비고로 되어있다. 총 기록 인원은 419명이다.

이 명부 비고란에는 귀환 이후의 생활과 신변의 변화 등, 즉 이혼, 사망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어, 최초 명부 작성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관리하면서

기록을 첨가해 갔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철저하게 «일본 국민»을 받아들이고 한인을 재외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을 때 당시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1952년 4월부터 한일교섭을 시작하여

식민지 지배 및 전쟁피해 배상에 대한 논의를 공식화했다. 이승만 정권은 일본과 식민지 지배 및 전쟁피해 배상을 요구하면서도 국내에서의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일본과는 그 정책적 기조를 «한일 방공협조»를 강조했고, 국내에서는 «반일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전략을 취했다. 따라서

사할린 한인의 귀환문제는 시급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방공협조의 틀 속에서 적극적으로 일본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문제이므로 그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국전쟁 특수를 이용하여 일소국교회복, 중국과의 경제교류 추진, 북한과의 민간교류 등 사회주의권과도 적극적으로 접촉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태도에 이승만 정권은 «한일 방공협조»에 어긋나는 일본정책 기조를 비난하면서 보다 강력한 반일 이데올로기를 파급시켰다.

정책적으로는 1954년 8월18일에는 대일 통상 중단, 여행의 중단조치를 발표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할린 한인의 귀환문제를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1955년 5월 2일 일본은 한국의 그와 같은 기조와는 달리 북한의 외상과 정상적인 경제 및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하여, 조일통상이

시작된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이승만 정권과 일본 정부는 더욱 크게 충돌했고, 더욱이 1958년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송문제»는 더 이상의 두 정부의

한일교섭 논의를 불가능하게 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재일조선인 북송문제»를 비난하면서 사할린 한인의 한국 귀환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극단적인 반일정책 및 일본의 무성의로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잊혀지게 됐다.

이후 장면 정권, 박정희 정권에서 논의된 한일교섭에서도 사할린 한인 귀환문제는 탁상에 올려지지 않은 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 체결됐다.

그 대신 1960년 12월 사할린 한인 귀환 추진을 국제적십자사에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이후 사할린 한인 귀환문제가 한국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66년부터이다. 그러나 이때는 귀환의 귀착지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이 협상하지 못해,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는 진전 없는 논의가 계속되어 오다가 1972년 일본과 소련의 평화회담을 기회로 다시 한국 정부가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의 논의도 한일 양 정부의 실질적 성과없이 적십자사를 통한 논의를 계속하기로 하고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할린 한인의 귀환의 책임을 지고 있는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사할린 한인문제 해결에 대하여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귀환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작성하여 직접 당국과 국제사회에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시작했다.

2008년 3.1절을 맞아 KBS 1라디오(FM 97.3khz)와 한민족방송(972khz., 1134khz)이 30년 동안 사할린 한인의 고국 귀환운동을 전개했던 박노학을

조명했다. KBS에 따르면 한민족방송과 제1라디오는 3.1절 89주년을 맞아 “지워지지 않는 진실, 사할린리스트”를 각각 1일 오전 1시10분부터

1시50분까지, 오후 2시20분부터 3시까지 방송했다. 방송은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한인들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가족관계 그리고

한국의 고향을 적은 명단을 읽어 내려가는 것으로 시작됐다. 한인 7000여명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있는 “화태 한국인 귀환 희망자 명단”은 박노학이

1966년 작성한 것이다. 이 명단은 사할린으로 끌려간 한인 중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했던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1988년 사망한 박노학은

1943년 사할린에 노동자로 갔다가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으로 귀환한 뒤 사할린 한인의 한국 귀환운동을 펼친 주인공이다. 박씨의 유족들은 1988년

이 명단을 KBS에 전달했고, 2007년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명단이 일본의 만행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될지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이번 특집에서는 “박노학 때문에 처음으로 한국의 친척과 편지 했다"는 내용의 사할린 한인들의 증언과 한국에

살고 있는 아들 박창규씨가 밝히는 아버지 박노학에 대한 기억, 박씨의 육성 자료, 진상규명위 관계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전하는 박씨의 존재 가치

등이 다뤄졌다. 또 1972년 “한민족방송(전 사회교육방송)”이 처음으로 내보냈던 “사할린 동포에게”라는 프로그램의 역사와 당시 답지했던 편지도

소개됐다. 이 프로그램은 사할린 한인과 고국의 가족 찾기를 주선했고, 일본 도쿄에 사서함을 설치하는 등 사할린 한인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1958년 일본 정부의 자국민 귀환 정책으로 일본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후 박 회장은 사할린에 남아 있는 동포들을 위해 1958년 “화태(樺太) 억류

귀환 한국인회”를 조직해 1988년 세상을 뜰 때까지 30년간 사할린 한인 귀환에 헌신했다. “화태(樺太) 억류 귀환 한국인회”는 나중에 “가라후토 귀환

한국인회”로 명칭을 바꿨다. 박노학은 이후 강제동원자들이 쓴 편지를 국내에 전달하면서 사할린 한인의 한국 귀환운동에 여생을 바쳤다.

박노학은 1912년에 충청북도 충주시 농가에서 태어났다.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23살에 결혼해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박노학은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의 전시동원이 극심하던1943년10월에 모집으로 사할린에 왔다. 전쟁 말기 일제가 강제 징용을 실시하면서 구장(區長) 등

앞잡이를 내세워 한 집에서 남자 1명은 지원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부친이 가족들을 보살필 테니 한 2년 고생하고 오라고 해 지원에 응했다.



[1]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 (홀로 코스트) 중 기업가에서 나치 당원이기도 한 오스카 쉰들러가 1,100 명 이상의 유대인의 생명을

구한 실화. 홀로 코스트를 소재로하여 그린 작품의 대표격으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자신도 유태계 미국인. 


 

«그 당시 아버지는 2남1녀를 둔 31세의 가장이었어요. 충주에서 이발관으로 일하셨어요. 하루 아침 일본놈들이 와서 한 가정에서 남자 둘 있으면 한

명이 모집으로 일본에 가야 한다고 했어요. 10 살 더 어린 동생을 데려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가시겠다고 나섰어요»(박창규의 인터뷰에서. 2012년

12월 01일).

1945년 종전까지 나이부치(현 브이코프) 탄광에서 일했다. 그는 사할린에서 일본 패전을 맞았다. 그와 동료들은 당연히 고향에 곧 돌아갈 수 있다고

기뻐했다. 초기에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먼저 귀국하게 되리라는 전망도 있었다.

박노학은 귀국길이 막히자 밀항선을 타고 나오려다 소련의 연안 경비가 엄중하자 포기하고 동료들과 조선인거류민회를 만들어 부두 하역노동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자1946년 9월 친구의 권유로 홈스크(그 당시 마오카) 태생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서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1946년 11월27일 미국과 소련 사이에 철수관련 잠정협정이 맺어져 일본인만 출국이 허가됐다. 그의 일본인 부인은 주변에서 부부가

갈라지면 안 된다고 해 그냥 눌러앉았다. 1949년 7월 일본인을 태운 마지막 배가 떠나고 나서 한국인 귀환이 시작되리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야말로

헛된 기대로 끝났다.

1956년 10월 일소공동선언으로 일본과 소련이 국교를 정상화하고 소련이 일본의 유엔가입을 인정했다. 그 결과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한인의 출국 길이

열리게 됐다. 박노학에게는 1957년 12월에 귀환허가 통지가 나왔다. 1958년 1월초 수송선의 출항지인 홈스크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새벽에 역으로

갔는데 영하 25도–30도의 추운 날씨에도 수많은 친구들이 나와 환송을 했다고 한다. 친구들은 자신들도 하루라도 빨리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 환송 행렬은 중도 기착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노학이 일제 패망 12년 4개월여의 세월이 지나서 겨우 귀환선에 탈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과 재혼을 했고, 그 부인이 1940년대 말 홀로 떠나지 않은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인 것이다.

박노학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억류한국인이 빨리 귀환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는 탄원서를 작성해 서명을 받았다.

귀환선이 교토 마이즈루에 입항하고 나서 연고자가 있는 사람은 흩어지고, 박노학 일가를 포함해 그렇지 않은 사람은 도쿄 아다치구에 있는 귀환자

숙소로 들어갔다. 사할린에서 나올 때 갖고 나올 수 있는 돈은 어른 1인당 100루블, 어린이 50루블로 제한됐다. 일본 국적을 가진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의 귀환수당과 귀환여비가 지급됐지만, 박노학 등 한국인은 지급대상에서 제외됐다. 마이즈루에서 도쿄로 가는 귀환열차에서

도시락을 나눠주는데 그것조차 지급하지 않았다.

박노학은 사할린에서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면서 사할린에 억류되어 한국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동포들의 처지가 너무도 불상하게 여겨졌다.

그는 일본으로 가는 연락선 안에서 사할린 동포들을 영주귀국 시켜달라는 내용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 초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에 도착한 박노학은 사회활동의 편리상을 고려하여 거주지를 도쿄로 정했다. 1958년 1월 20일 박노학과 동료 4인은 배 안에서 쓴 진정서를 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달라고 도쿄 한국대표부를 찾아갔다. 당시 참사관이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은 “이 문제는 대단히 어렵고 국제정치에 기대지

않으면......” 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고 한다.

1958년 2월 박노학 등 귀환자 50명은 도쿄에서 «화태 억류 귀환 한국인 회»를 결성했다. 잔류동포 귀환과 생업자금 지원 등의 요청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 정부 부처를 찾아 다니며 진정을 했지만 냉대만 받았다. 한 외무성 간부는 “일본은 패전국이고 당신들은 전승국이기 때문에 소련

정부와 직접 교섭하도록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이 문제를 취재하려는 일본 신문기자에 대해 외무성 간부는 “국익에 반하는 것을 왜

취재하는가”고 반문했다. 당시 박노학의 거처에는 사할린에서 귀환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편지가 많이 배달됐다. 국내의 육친과 직접 편지 주고받기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서신 중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신을 주고 받으며 1966년 6월까지 무국적, 소련국적, 북한국적을 포함해 약 7000명

귀환희망자를 확인했다. 한국 영주 희망자 1410세대 5348명, 일본 영주 희망자 334세대 1576명을 합쳐 1744세대 6924명이었다. 박노학의 모임은 이

명단을 한국 정부에 제출했고 한국 정부는 1969년 8월에야 일본 정부로 명단을 넘겼다. 해방된 지 24년만의 일이다. 일본 정부는 소련 정부에 명단을

넘기고 이 문제를 거론했으나 실질적 진전은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 귀환 희망자에 한해 귀환비용을 한국 정부가 부담한다면 소련 정부와

교섭할 용의가 있다”고 회답을 했다. 나중에는 한국 귀환 희망자의 여행경비는 부담할 용의가 있다는 식으로 나왔다.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잔류 동포들이 현지에서 계속 출국 허가를 요청하자 사할린 경찰이나 출입국 관리사무소(OVIR)는 “아직 일본에서 귀환 통지가 오지 않았다. 받아줄

데가 없는 당신들이 어디로 가냐, 일한 양국 정부가 인수통지를 내도록 청원서를 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보면 사할린 관련 소송으로 이 문제가 여론의 조명을 받게 된 1970년대 전반까지는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사회 전체가 이 문제에

무관심했다. 이른바 진보진영에서도 사회주의권에서 왜 군사독재국가로 돌아가겠다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재일동포사회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박노학 등이 진정을 하러 다니면 기부금을 받으러 돌아다니는 협잡꾼이라는 문서가 민단의 지방조직에 나돌았다고 한다.

한일 국교정상화협상이 진행되자 이들은 양국 정부에 이 문제를 다뤄달라고 진정을 되풀이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간절한 요구는 양쪽에서 모두

무시당했다. 한국 대사관 쪽은 나중에 “가라후토 문제를 의제로 하면 한일조약 체결이 늦어지기 때문에 뒤로 돌렸다”고 사후 설명을 했다.

일본 외무성 동북아시아과는 “이번 한일회담에서 한국 정부는 청구권을 포기했다. 거기에는 가라후토 문제도 포함돼 있고 모두 해결됐다”고 답했다

한다. 그러나 ‘화태 귀환 재일 한인회’ 박노학 회장은 낙심하지 않았다. 즉시로 사할린 한인 귀환활동을 시작해야 하는데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방향을

몰랐다. 일본법률, 사회조직, 해당기관과 주소, 책임자와의 면회수속방식 등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한가지 한가지씩 물어가면서 방식을 배웠고

국회의원과도 만날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1959년8월까지 진정서를 만들어 일본적십자사, 외무성, 법무성, 후생성. 국제적십자사, 대한적십자사,

한국외무부장관, 법무부장관에게 보냈다. 박노학 회장이 사할린동포들을 위한 귀국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사할린에서 널리 알려졌다.

“박노학 회장(화태 귀한 재일한인회)이 바로 옆에 살았어요. 코르사코프에서 옆집에 살았어요. 아주마이가 일본(인).(그래서) 일본에 갈 수 있었단

말이요. 박노학 그 사람이 사업상 많이 했지. 편지 보내주고, 다. 사할린에 있는 사람들이 편지를 써가지고 일본으로 해서 대구, 거기로 편지가 왔는데,

이두훈(한국의 중국, 사할린 이산가족, 유족 모임 ‘중소이산가족회’ 회장) 그분. 편지가 처음에는 그분이 힘 많이 썼지요. 그 후에는 그 당시에 저,

여기서 한문을 써 보내면 한문을 보는 사람 없잖아요(내가 보고 했지.)”(서울 등촌동 임대아파트에서 만난 영주귀국한 한문형, 김인순 부부 인터뷰에서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6481&section=sc4, 2014.03.26).


 

그러던 참에 “일본 정부가 받아준다면 조선인은 일본으로 보내주겠다”고 사할린 내무국에서 약속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귀국을 희망하는

사할린동포들의 편지가 매일 수십 통씩 박노학 회장에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편지를 고향의 가족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있었다.

박회장 부부는 사할린에서 오는 편지를 정리했다. 편지를 정리하는 데는 러시아어, 한글, 한자 등을 알아야 했다. 때로는 영어로 번역할 필요도 있었다.

글을 아는 사람을 찾아서 물어가면서 편지를 정리했다. 사할린에서 받은 편지를 한국 친척에게 보내는 것도 힘들었다. 박노학의 맏아들 박창규씨가

회상한다:

"사할린으로 간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 어느 날 일본에서 편지한 통이 왔죠. '아들아 잘 지내느냐, 보고 싶다'고. 그 때 아버지는 이미

강제동원자들의 편지를 국내로 전달하는 일을 하고 계셨어요. 도쿄에 있는 박노학씨에게 편지를 보내면 가족들을 찾아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우즈베키스탄중국 등지에 흩어져 있던 강제동원자까지 편지를 보내왔죠.". 박씨 부자가 우편배달부를 자처하면서 생사여부도 확인하지 못했던 많은

강제동원자가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박씨 부자가 한 일이 주목 받는 이유는 또 있다. 

아버지 박씨는 한ㆍ러 수교를 보지 못한 채 1988년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강제동원자들이 보내오는 편지를 바탕으로 주소와 가족관계 등 강제동원자

6000명의 신상 정보를 기록하는 명부를 만들었는데,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던 일본을 꼼짝 못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역사적 기록이 됐다.

방일권 한국외국어대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는 "강제동원자 개개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록으로 '사할린 판 쉰들러리스트'라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일본의 사할린 징용 진실을 밝혀라"한국일보, 2012.09.25.). 

박 회장은 사할린에서 받은 편지를 기초로 영주귀국 희망자 명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까지 근 2000명, 1967년까지는 6924명의 편지를

정리하여 명부를 작성했다. 매명의 성명, 출생지, 생년월일, 국적, 현주소, 한국친척의 성명 등을 기입하면서 명부를 작성하기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경우 명부작성에 필요한 자료가 부족하여 사할린으로 편지를 보내어 확인해야 했다. 종이 사는 돈을 아껴 쓰기 위해 학생노트를

이용했고 글도 잘게 썼다. 소련으로 보내는 편지라 그 내용과 말마디에도 각별한 주의를 돌려야 했다.

한국과 일본간에 오랫동안 끌고 있던 회담이 1965년에 실현됐다. 이때 박회장은 회담일정에 사할린 한인 문제를 첨부해 줄 것을 부탁했으나 한국

정부는 거절했다. 1969년에 일본 다나카 총리가 소련을 방문하게 됐다. 박회장은 영주귀국자 명부를 브레쥬네브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명부는 브레쥬네브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박회장은 어떻게 하면 한국소식을 사할린동포들에게 전할 수 있겠는가 생각

끝에 한번 KBS라디오 방송국을 찾아가서 사할린동포를 위한 방송을 부탁했다. 이렇게 1972년부터 매일 밤 두 번의 사할린으로 보내는 라디오방송이

시작됐고 ‘박노학 코너’가 생겼다. 이 방송을 사할린동포는 배게 밑에 라디오 수신기를 두고 들었다.

1974년 박회장은 1841명의 사할린동포에게 일본도항증명서를 만들어 보냈다. 그러나 수명에게서만 받았다는 회답이 왔을 뿐이었다.

다음 1975–1976년간에 또 1304명에게 일본도항증명서를 보냈는데 그 중 415명이 수속을 했으나 소련출국과 일본입국 허가를 받은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박회장의 활동은 조금씩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가 작성한 6924명의 영주귀국희망자 명부는 처음 한국 정부로,

다음은 일본 정부와 소련 정부에 전해졌다. 이것이 결국 한국, 일본, 소련 3국의 협상의 토대로 됐다. 최초에   일본 정부는 만일 한국이 귀국비용을

부담한다면 소련 정부와 교섭해볼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것은 자기들은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없다는 태도였다. 또한 일본외무성은 1965년

한일회담에서 한국은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다. 거기에는 사할린 한인들의 청구권도 포함됐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할린 한인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명부가 처음에는 사할린 한인이 한국가족들과 일본에서 상봉, 다음은 사할린 한인들이 일본경유로 한국방문,

사할린에서 직접 한국 방문이 가능하게 된 토대로 됐으며 나아가서는 사할린 한인들이 영주귀국을 하게 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박 회장은 자기의

30년간 운동에서, 소련출국 허가를 받고 일본영사관이 있는 나홋카에 가서 출국기한 3개월간에 일본입국허가를 받지 못하여 사할린으로 되돌아가서

사망한 “나홋카 4인 사건”이 가장 비참한 사건이었다고 했다.

«화태 귀환 재일한국인회» 박노학 회장은 지금까지의 자신들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하여 “1965년 6월 21일 한일회담을 조인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들이 이렇게까지 염원했던 귀환문제를 책상에 놓고 체결했는가? 그 분노를 하늘에 퍼부었다”고 한탄했다.

이후에도 절망하지 않고 탄원운동은 계속되어, 마침내 1970년대 한국, 일본 정부는 외상회의에서 사할린 한인 귀환에 관련 문제를 협상의 탁자에

올려놓게 됐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귀환 정착지를 둘러싸고 합의를 이루지 못해, 결국 1970년대의 논의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논의가 중단됐다.


 

«한일청구권협정» 체결(1965년) 이후, 1970년대 초반 소련, 일본, 한국의 외무회담에서 사할린 한인 귀환문제에 대해 별 성과 없이 끝난 후,

«화태 억류 귀환 한국인회»는 1971년 사할린 잔류 한인 귀국희망자 명부를 작성하여, 본격적인 귀환운동을 전개했다. 이산가족 상봉과 영주귀국을

위한 청원 또한 계속됐다.

“1969년7월4일, 한국외무부는 주한일본대사관을 통하여(박노학 회장이 작성한 ) 7000명의 귀국희망자 명부를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 전했는데

일본은 그 사실을 소련측에 통지했다. 결과(일본)국회서도 사할린 잔류 조선인 문제가   “일본에는 직접 관계없다”고 하면서도 “인도적 책임”이라는

시점에서 대책수립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외무상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자세를 보였으며 일본서도 이 문제는 벌써 피할 수 없는 단계까지

진행되고 있었다.(그 후에도 오랜 시간이 걸려서 문제는 조금씩 해결되어 나갔다). 결과 1994년 7월 23일 방한한 무라야마 일본수상과 김영삼 대통령이

회담하여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가 심의됐다. 그리하여 일본수상의 귀국 후 일본의 지원책을 결정하게 되어 약 5억 원의 요양원(인천), 그리고 안산

주거단지를 위한 27억 엔의 예산이 편성됐다”(“동북아세아의 코리안•디아스포라. 사할린을 중심으로 하여”. 성점모 역)

그 결과 일본과 소련은 한국 도항희망자의 경우, 일시도항을 허가하는 방침으로 정해가고 있었으나 북한의 항의로 소련이 입장을 바꾸어 출국금지

조치를 취해 1970년대의 도항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1980년대 일본의 변호사연맹, 일본 중의원 의원 쿠사가와 쇼조 등이 노력하여 일본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 갔다. 마침내 1980년대 초기는 일본에서 한국가족과 사할린 억류자가 상봉할 수 있게 됐다.

한소수교 이전인 1989년 2월부터는 사할린 억류자가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일시방문이 가능하게 됐다.

어렵게 마련된 일시방문(이산가족상봉)은 상당히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진행됐다. 우선 자격조건의 엄격함이다. 친족재회 등을 위해 방일 혹은

일본경유로 방한하는 일시방문자 중 국가예산으로 지원되는 자의 자격은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로 전전부터 사할린 거주하고 있던 자로

한정했다. 절차 또한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이 과정에서 «화태 귀환 재일 한국인회»와 «중소이산가족회»가 큰 역할을 했다. 우선 재회절차를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우선 사전에 조사해 둔 사할린 한인 귀환희망자에게 초청장을 보낸다. 초청장은 러시아어 및 영어로 작성하되, 특별한 형식은 없지만, 누구를 무엇을

목적으로 초청하는가를 적어야 했다. 초청장을 공증사무소에서 공증받아 법무국에 제출했다. 법무국에서 다시 공증을 받아 외무성 영사사증부

영사정책과 증명반에서 다시 인정받아야 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공증사무소, 법무국, 외무성 영사사증부 영사정책과 증명반에서 인정받은

초대장은 소련의 재회희망 당사자에게 보내졌다. 소련의 재회희망 당사자는 그 초대장을 가지고 패스포드와 비자를 신청한다. 신청이 수리되면 일본

외무성으로 연락해야 했다. 일본 외무성 외국인과에서는 소련의 재회희망자의 신분을 보증하는 신분보증인에게 신분증명서, 입국이유서, 체제일정표,

재직증명서, 원천 징수표, 호적등본 제출을 요구했다. 일본외무성은 신분보증인이 제출된 6종류의 서류를 7–10일간 심사하고, 심사에 통과하면 비자를

허가했다. 재회희망 당사자는 그 이후 비자를 받아 일본으로 입국했다. 이러한 절차 속에서 «화태 귀환 재일한국인회»와 «중소이산가족회»는 사할린

잔류 한인에게 초청장을 발급하거나 신분보증을 해줬다. 이외에도 사할린 잔류 한인으로부터 귀환희망 편지 및 연고자 재회신청서를 받고, 초청신청을

받았다. 사할린 잔류 한인으로부터 재회신청, 초청신청을 받은 «화태 귀환 재일한국인회»는 직접 한국의 도청, 시청에 연락해 연고자를 찾기도 하지만,

주로 «중소이산가족회»와 연락하여 한국의 연고자 확인작업을 했다. 이렇게 해서 연고자가 확인되면 박노학 회장을 비롯해 «화태 귀환 재일한국인회»

회원들은 초대장을 발부하여 일본외무성과 소련 정부를 통해 사할린 잔류 한인을 초대했다. 한편, 한국의 연고자는 사할린 잔류 가족을 맞이하는 데에

있어서 책임을 질 수 있는지에 대한 조사로 공증 받은 재정보증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서류가 완성이 되면, 사할린 잔류 한인과 한국의

연고자는 일본에서 재회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고도 사할린 잔류 한인의 국적에 따라 또다른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소련국적자의 경우는 비자만으로도 도항이

가능했지만, 무국적자의 경우는 비자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소련과 일본으로부터 이동증명서 및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다. «화태 귀환

재일한국인회»는 이산가족 재회 사업을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문제 의원간담회»와 연대하여 영주귀국 정책협의도

실시했다. 1989년 한일 정부간 영주귀국을 결정하고, 한국외교부는 «사할린교포 영주귀국업무처리 지침(1990.1)»을 정하여 영주귀국자 자격조건에

«국내연고자초청» 필수조건으로 했다. 이후 1994년 자민당, 사회당 정권에서 전후처리 문제에 관한 «여당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소위 파일럿

프로젝트 Pilot project)»를 구성하여 원폭피해자 문제와 한일 영주귀국 시범사업을 실시했다.

1994년 한일영주귀국 시범사업 실시해 1997년부터 2001년까지 1300명이 귀국하고 이후 한국 정부는 2004년도부터 영주귀국사업을 계속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여 2007년부터 2009년까지의 기한으로 «한일영주귀국 사업확대»를 결정했다. 그 이후에도 귀국 희망자가 있을 경우 사업을 계속한다는

조건으로 현재도 귀국희망자를 조사하고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할린 억류 한인에 대한 한일 간 정부의 대응 및 해결 방식은 일본식민지 지배책임, 혹은 전쟁책임으로서의 문제로 언급되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보다 복잡한 논리로 논의·해결되어 왔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냉전을 둘러싼 주변환경을 핑계로 실제로 방치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렇게 방치되어 있던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당사자 스스로가 노력하여 실질적으로 귀환정책을 견인해 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 국가기록원 수집자료 «이희팔 기증기록물 자료»와 «중소이산가족회 기증자료»는 그 생생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할린 한인의 완전한 귀환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사할린 한인의 귀환정책이 1994년 한일영주귀국시범사업, 2007년 한일영주귀국사업확대로 2014년 현재까지 사할린 한인의 영주귀국 및 일시방문,

역방문 등 이루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1989년부터 실시된 모국방문사업으로 2010년도까지 17,270명의 사할린 한인이 한국을 다녀갔고, 2001년부터

실시된 영주귀국자의 자녀와 친척들의 방문이 2010년까지 3484명이 다녀갔다. 2014년 12월 기준으로 영주 귀국한 사할린동포는 4292인이다.

해방 후 70년이 지난 현재 귀향의 꿈은 단순히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적으로 영주귀국이 가능한 한인 1세로 분류되는

노인도 귀향을 마음에만 두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60여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은 사할린을 또 다른 삶의 근거지로 만들었고, 사할린을 떠나게

될 경우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경험하게 되어 한국으로의 귀향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이들도 있다.

일본과 한국이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았던 세월만큼 그들의 삶은 귀향을 꿈꾸면서도 현실에 뿌리내렸어야 했고, 현실에 뿌리내린만큼 그들의

귀향은 기억 저편의 평생 ‛미완의 꿈’으로 자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할린 한인의 귀향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만큼이나 사할린의 삶의

터전을 지켜나간다는 의미와 등치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사할린에서의한인귀한운동과허조

1958년에 일본으로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이 일본인 아내와 함께 귀환할 때 박노학을 전송하러 나온 많은 친구들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흐느껴 울면서

«일본에 들어가면 우리도 빨리 들어갈 수 있도록 힘써주게»라고 이구동성으로 부탁했다. 그때 사할린 한국인 중에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일본

여자와 결혼했을 건데»라면서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지 10년 이상이 넘었는데 사할린에 독신 일본 여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동포들의 비참한 소리를 가슴 깊이 안고 후에 일본에서 박노학은 사할린 동포들을 귀환시키기 위하여 «가라후토 억류 귀환 한국인회»를 결성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할린 토마리 시에 거주하는 허조는 박노학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게 됐고 이곳 상황을 전했고 귀환자 명단을 작성하는데 힘을 썼다.

 

 

  허조는 1911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허조는 5살에 할아버지로부터 한자

  천자문을  배웠고, 그 후 학교를 다니지 않고 한글과 일본어를 독학으로 터득했다.

  1945년 해방 후  사할린에서 조선학교에서 일할 때 러시아어도 독학하여 쓰고

  읽었다. 살림살이 어려우니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막벌이하러 떠났지만 빈궁을

  떠나지 못했다. 1940년에 사할린 (그 당시 – 가라후토)에 모집으로 들어와 토마리

  (그 당시 – 토마리오루)시 셀룰로즈 제지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9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살았다. 옷도 신발도 부족했고 식량도 부족해

  자녀들이 배를 곯았다고 한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면서도 자녀들을

  공부시켜 훌륭한 인재로 교양했으며 자녀들의 이름으로 우편저금까지 했다.

 허조씨가 사할린 주 교육청에 토마리 시에 조선학교를 세워달라고 요구했기에

 1946년 10월 15일에 조선학교가 개교됐다. 조선어 수업시간에 허조 교장은 애국가

  낭독과 태극기 그리기로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었다.

 다카키 겐이치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 허조의 글을 읽어보고 흥분했으며 그

  후부터 자기도 사할린 한인 귀환운동에 적극 도와 나섰다.

1965년에 일본에서 박노학 “화태 귀환 재일 한국인회”를 걸쳐 그 해 6월에 열리는 한일회담에 허조가 사할린 잔류 한국인들의 귀환문제에 대한

탄원서를 보냈다는 것이다. 1965년 1월에 사할린 코르사코프에 거주한 김영배와 함께 허조가 사할린 내무서장과 면회하여 귀환을 요청한 결과

«일본 정부가 받아들인다면 무국적 사할린 한인 들을 일본으로 귀환시킬 수 있다»라는 회답을 받았다. 이런 회답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귀환은 실시되지 않았고 소련 정부측도, 일본 정부측도 사할린 한인 귀환문제를 배제한 것이다.

허조는 계속 무국적으로 있다가 1976년 4월 18일에 오랫동안 중환을 앓다가 희망하던 고향 땅도 밟지 못하고 타계했다.

사할린에서 박노학에게 보낸 편지들은 처음에는 잘 들어갔고 회답도 잘 받았다. 그 당시 한국과 소련 사이에는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사할린의 조선

사람들과 한국에 남겨진 가족들은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었고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박노학이 사할린의 동포에게 한국에서 받은 편지를 사할린에 보내면 그것을 받은 사람은 한국의 가족 앞으로 보내는 답장을 박노학에게 전달했다.

박노학의 가족이 그것을 개봉하여 새 봉투에 넣어 한국 주소로 우송했다는 것이다. «사할린에서 온 편지는 어느 것이나 눈물 없이는 읽지 못했다»고

박노학은 증언했다. 박노학을 사할린 동포 귀환 희망자를 확인하고 그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데에 코르사코프 시에서 살고 있는 김영배와 도만상,

토마리 시에 살고 있는 허조가 적극 도와 나섰다. 사할린에 살고 있는 한인 동포들은 대다수 문맹자였기 때문에 편지를 써달라고 허조에게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무려 103통의 편지를 끊임없이 박노학의 «한인회»에 보냈고 때로는 감옥에 갇히면서도 굽히지 않고 진술을 계속했다.

토마리 당국의 해석을 듣고 모스크바 일본대사관에 편지를 보냈는데 다음과 같은 회답을 받았다:

소화 38년 8월 8일

허조 귀하

편지에 따르면 현지 소련 관헌이 귀하에 대해 일본측의 입국 허가만 얻으면 소련으로부터의 출국을 즉시 허가할테니 당 대사관에 대해 여권을

신청하라는 취지입니다만…… 종전 후 한국은 독립되고 이에 따라 한국인은 일본 국적을 이탈했기 때문에 귀하의 도일은 일본측에 있어 미귀환 일본인의

송환에 해당되지 않으며 또한 현재 외국인인 귀하에게 일본 여권을 발급할 수도 없습니다…... 순전한 한국인인 귀하의 영주를 목적으로 한 일본에의

도항을 신청해도 허가될 가능성은 없다고 사료됩니다.

(사할린 재판(갑) 제 77호 증거)


 박노학이 사할린 한인 귀환 희망자 명단을 작성한다는 소식이 전 사할린에 퍼졌다. 편지만 쓰는 것이 아니라 봉투에 러시아말과 일본말로 주소를

적어야 했다. 몇 달 동안 사할린과 일본 사이에 서신거래가 활발했고 명단 작성도 거침없이 잘 진행되어 박노학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이런 귀환

운동을 둘러싼 일련의 움직임은 소련 당국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사할린 한인 대부분이 남한 출신이니까 그들이 돌아가고 싶어하는 나라는

반공국가인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소련이 그들의 귀국을 인정할리 없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박노학의 사업과 그를 협조하는 사할린 귀환 운동은

당연히 ‘반소, 반공’ 행위로 파악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명단을 작성하니 이제 귀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사할린 각지에 전해져 이미

소련국적이나 북한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 다시 무국적자로 돌리려고 해서 대혼란이 일어났다. 잘 전달됐던 편지도 이제는 일본 박노학에게 가는

것이 드물어졌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각 편지를 KGB(소련 국가 안전위원회)가 조사하여 압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허조는 대륙으로

(이르쿠트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등) 공부하러 가는 사람을 부탁해서 편지를 우체통에 넣어서 일본으로 보내곤 했다. 사할린주의 KGB는 거기까지 손을

뻗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KGB가 반공분자들을 그냥 놓아둘 리가 없었다. 어느 날 공산당 사할린주위원회 조선인 담당자가 사할린의 «레닌의 길로»

조선신문사 기자와 같이 토마리제지공장 회의실에서 시 한인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신문기자가 “소련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에 가려는 사람은

반소분자이다. 사할린의 조선 사람들 중에는 귀국 희망자가 있을 수 없다. 귀국하고 싶으면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으로 가라. 북조선도 조선이

아니냐?”라고 발언했다. 이에 허조는, “맞다. 북조선도 조선이다. 그러나 고향은 아니다. 나는 고향에 아버지, 형제들이 살고 있다. 나는 고향에 가려고

한다. 당신들이 알다시피 지금 조선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 않느냐? 북조선으로 나가도 고향으로는 가지 못할게 뻔하지 않느냐? 나도 한때

북조선으로 갈 생각했다. 북조선도 조선이니까 어쩌면 거기서 국경을 넘어 남쪽 고향에 갈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라고

반발했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자본주의 국가에 가려는 것은 반동분자나 다름없다»라는 협박에 «그러면 너희들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느냐?

형제도 자식도 없느냐? 내가 부모형제를 만나겠다는데 무슨 죄가 되는가?»라고 허조가 남한 고향으로 가겠다고 주장했다.

그날 회의가 끝난 후 KGB에서 온 사람이 허조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회의 참가자들은 이런 행위에 분개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 당시

소련에서는 재판없이 투옥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회의 후 200명 이상이 서명한 청원서를 해당기관에 보냈다. 그 결과 15일 만에 허조는 석방됐다.

박노학과 사할린 잔류 한인들의 서신왕래를 근거로 5년여에 걸쳐 7천여 명의 귀환명부를 만들어 한국, 일본, 소련에 보냈고 영주귀국사업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박노학의 노고에 관한 자료는 일본에서 발간된 수많은 서적, 특히 “사할린과 일본의 전후 책임”(다카키 겐이치), “슬픈 섬 사할린의 한인”

(쓰노다 카주코), “한 자원봉사자의 기록”(아라이 사와코의 일기) 등과 여러 신문에 발표됐고 또 최근에는 인터넷, 특히 일본 웹–사이트에서도 여기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면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박노학이나 허조와 같은 일생을 사할린 한인 귀환운동에 바친 활동가에 대한 자료들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박노학 기념사업회의 결성 추진

2013년 1월 10일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인들과 사할린 동포 지원단체 관계자 등이 모여 «고 박노학 회장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추진위원회 회장으로는 박승의 전 사할린국립종합대학 교수가 선정됐다. 사할린 한인의 영주귀국이 실현된 데는 박노학 선생의 희생과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사할린 한인 역사를 올바로 밝히기 위해서라도 잊혀진 박 선생의 공덕을 기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추진위원회는 요즘

사할린·한국 언론매체에 사할린 한인  귀환운동을 펼친 박노학 회장에 대한 자료를 전해 홍보하고 앞으로 박노학 회장의 동상과 기념비를 건립할

예정이다. 새고려신문에는 박노학 회장의 활동에 대한 기사 2 건(2012년 11월 2일호, 2013년 1월 25일호)이 실렸다.

사할린 동포들의 고국 귀환을 위해 힘써온 고(故) 박노학(1912–1988) 사할린 억류 귀환 한국인회 회장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펼쳐진다.

국내로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인들과 사할린 동포 지원단체 관계자 등은 «고 박노학 회장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이하 –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2013년 1월 10일 첫 발기인 모임을 열었다. 박승의 전 러시아 사할린국립종합대 교수가 추진위원회장을 맡았으며 영주귀국 한인 외에도 임용군

사할린주한인협회 회장, 윤상철 사할린주한인노인협회 회장, 박순옥 사할린주한인이산가족협회 회장, 배덕호 지구촌동포연대 대표 등이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추진위원회는 앞으로 박노학 회장 동상 및 기념비 건립, 기념 전시회와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박 회장의 업적을 기릴

예정이다. 국내에서 박노학 회장을 도와 편지 전달에 나서기도 했던 장남 박창규(76) 씨는 "30년 동안 한 가지 일을 위해 헌신했으나 소외된 채

잊혀가던 아버지를 다시 한번 조명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할린 한인 현안이 많은데 정부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추진위원회> 발기인 첫 모임에서 일제 강점기 사할린에 강제동원되어 해방 이후에도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사할린 동포들을 위해, 일본에서

1958년부터 ‘사할린 억류 귀환 한국인회’(이후, ‘화태 귀환 재일 한국인회’로 명칭 변경)를 조직하여 1988년까지 ‘우편배달부’ 역할을 했던

故 박노학 회장의 뜻을 기리고 그 역사를 후세들에게 널리 알려나가기 위해 <추진위원회>를 추진하기로 하고 아래 인사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한혜인(박사), 배덕호(KIN 대표), 신윤순(사할린국내유족회 회장), 성점모(영주귀국자, 안산 고향마을 노인회 고문), 박승의(영주귀국자, 전 교수,

파주), 허남훈(영주귀국자, 김포), 김수영(영주귀국자, 김포), 전학문(영주귀국자, 박사, 김포), 박노영(영주귀국자, 명예회장, 김포),

김진희(영주귀국자, 오산), 이태엽(영주귀국자, 오산), 강동수(영주귀국자, 아산), 조풍일(영주귀국자, 아산), 이충광(영주귀국자, 서천),

박창규(故 박노학 아들), 김태익(모스크바), 김기춘(영주귀국자, 아산), 임용군(사할린, 사할린주한인협회 회장), 윤상철(사할린,

사할린주한인노인협회 회장), 박순옥(사할린, 사할린 주 한인 이산가족협회 회장), 김복권(사할린), 박일섭(영주귀국자, 김포). 이 모임을

바탕으로, «전국 사할린 영주귀국자 단체 협의회»(권경석 회장) 등에 이 내용을 제안하고 내용을 널리 확산시키기로 했다. 발기인 모임 임원으로

박승의 (회장), 박노영(부회장), 전학문(고문), 성정모(고문), 이태엽(총무)이 맡기로 했다.

 2013년 2월 13일(수)에 있은 <추진위원회> 2차 준비모임에서 ‘故 박노학 회장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회칙 중, 목적과 사업을 검토하면서 ‘임시

회칙’으로 삼기로 했다. 故 박노학 회장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전국 사할린영주귀국자 단체협의회’(권경석 회장)의 긴밀한 협력을

이끌어내기로 했으며, 3월 초로 예정된 ‘전국 사할린 영주귀국자 단체협의회(이하 – 사할린 단협)’ 회의에 안건을 공식 제기하기로 했다. ‘사할린

단협’에 제기할 안건 자료는 박승의 회장과 성점모 고문이 논의하여 정리하고, 다음 ‘사할린 단협’ 회의 이전에 ‘사할린 단협’ 전국 지역회장들에게

가능한 내용을 미리 전달하기로 했다. ‘사할린 단협’ 회의에 故 박노학 회장의 아들인 박창규씨를 동행하기로 했다. 故 박노학 회장 기념사업과

관련하여, 2월 20일(수) 오후2시, 국무총리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를 방문하여 박인환

위원장, 다른 관계자와 면담하고, 부산의 ‘강제동원역사기념관’ 건립과 관련한 논의와 협력을 요청하기로 했다. 2013년3월 23일–27일, 사할린

현장 대표단의 일본 방문 시, ‘화태귀환재일한국인회’(이희팔 회장)과 기념사업과 관련해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2013년 3월 30일(토)  <추진위원회> 3차 준비모임에서 故 박노학 회장의 기념비 장소와 관련하여,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 충주 고향, 부산

기념관, 천안 망향의 동산, 안산 «고향마을» 등을 거론했으나, 추후 더 논의하기로 했다.

故 박노학 회장 기념사업과 관련하여, 4월 4일(목) 오전 11시, 인천 사할린복지회관 회의실에서 ‘사할린 단협’ 제4기 제2차 회의에 참석하여

기념사업회 추진 측에서 박승의, 박창규, 이은영, 최상구가 발제했고,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에 관련 KIN(지구촌동포연대) 이은영

간사가 발제했다. “故 박노학 회장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박승의 회장, 박창규가 의견을 발의했다. 2013.04.04 사할린 단협 4–2 회의록에 제 3

문제에 대해 “故 박노학 회장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故 박노학 회장의 기념비 장소와 관련하여, 사할린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 동상, 부산 기념관 앞 기념비(동상)와 실내 기념 코너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동상 설치장소와 관련하여, 부산에 건립하고 있는 «일제강제동원역사기념관» 내에 별도의 코너를 만들고 여기에 동상을 세우는

것으로 결정했다. 별도 코너의 구성은 역사박물관 등의 동영상 전시 등을 참조하여 건의하기로 했다. 서울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매월 1회

참석하되, 구체적인 시기는 집회 주최측과 논의 후 결정하고 <추진위원회>의 탄원서 초안은 6월 초까지 수정하여 대한민국 안전행정부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국회(관련 상임위장)에 제출하기로 했다. 수요집회 참석은 7월 17일 기념사업회원과

지역별 영주귀국자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을 명확히 한다. 방일권 박사가 참석하여 조언을 했다. 인터넷상에 전시실을 만들어 짧은 영상제작 등

온라인 홍보를 시작하고, 인터넷상에서 모금활동들도 활용하고, 소책자 제작과 판매를 통한 수입사업 등 단계적으로 모금활동을 기획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했다. 2014년 5–6월에 박노학 회장 동상 건립에 대해 <추진위원회> 임원들의 의견교환이 있었다.

'추진위원회'와는 연계되지 않았으나, ‘전국 사할린영주귀국자 단체협의회’가 2014년 7월 4일 안산에서 단체장 회의를 소집하여 故 박노학 회장의

동상 건립 준비 위원회를 창립하여 모금운동을 벌인 결과, 사업을 진행하여2014년 11월 8일 경기도 안산 «고향마을»에 故 박노학 회장 흉상을

세웠다.

 

 

 

 

 

 

 

 

 

 

 

 

 

 

 

 

 

 

 

 

 

 

 

 

 

 

 

 

 

 

 

 

 

 

 

 

 

 

 

 

 

 

 

 

 

 

 

 

 

 

박노학회장의활동연표

('故 박노학 회장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성정모 고문이 작성)

 

1958.01.14 박노학 선생 가족(5명)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이주.

01.25 박노학 선생 연락선 안에서 한국 이승만 대통령에게 쓴 사할린동포 귀환을 부탁하는 탄원서를 재일 대한민국 대표부 공사를 찾아가서 전함.

02.06 박노학 선생 "사할린귀환 재일한국인회" 설립.

02.28 박노학 회장 일본국회 중의원 및 참의원 의장과 면회. 사할린동포 귀환에 대한 진정서를 전함.

08.07 박노학 회장 일본 적십자사, 외무성, 법무성, 후생성, 국제적십자사, 대한적십자사, 한국외무성,  법무성 각 장관에게 사할린동포 귀환문제로 진정서를 보냄.

1959. 02.12 박노학 회장 회원 42명을 동원하여 후지야마 외무상을 만남.

09.08 박노학 회장 일본에 온 국제적십자사의 쥬노 부위원장과 면회하여 사할린 한인 들의 귀환문제 해결을 부탁.

1962. 02.15 박노학 회장 사할린동포 귀환에 대한 진정서를 흐루쇼브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게 보냄.

1968.03. .. 박노학 회장 6924명의 영주귀국희망 사할린동포명부를 국제적십자, 한국 및 일본 정부에 전함.

1969.02. .. 재한국 일본대사관 마에다 참사관이 박노학 회장에게 협력을 약속.

1970.05.23 박노학 회장 UN의 U. 단토 사무총장 및 국제적십자사 코나 총재에게 사할린 한인  귀환문제 탄원서를 보냄.

1971.03. .. 박노학 회장 사할린 한인 들을 일본으로 초청하는 초청장 작성 시작.

1971.12.01 사할린잔류자 귀환청구 소송. 도쿄지역 재판소에 제소.

1972.08. .. 박노학 회장 소련 그로미코 외무상에게 사할린 한인  귀국 문제에 관한 진정서를 보냄.

1974.02. 일본 정부 2000명 분의 일본도항 증명서 용지를 박노학 회장에게 전함.

1985.01. .. 박노학 회장의 초청으로 사할린 한인 들의 일시 모국방문 시작.

1985. .. .. 이해 사할린에서 가족재회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것은 5가족.

1986. .. .. 이해 사할린에서 가족재회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것은 13가족.

1987. .. .. 일본국회에서 사할린잔류 한국ㆍ조선인 문제 의원간담회”발족.

11.16 일본외무성에서 소ㆍ일 사무수준에서 사할린문제 협의. 일본 정부는 사할린 한인문제를 공식적으로 취급. 관계자 수속의 간소화, 소ㆍ일 적십자사 간에 사할린 한인 문제를 검토할 것 등을 제안.

1987. .. 이해 사할린에서 가족재회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것은 28가족.

1988.03.16 박노학 회장 서거.

('故 박노학 회장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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