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문제: 전후처리와 처우개선 - Page2

2)사할린한인의이주역사

 

(1)     "자유이민" 시기(1930 1938)

사할린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왔다. 1689 년 러시아와 청(중국)이 체결한 네르친스크 조약에 준하여 러시아는 거의 150 여년간

연아무르지역을 떠나야했다. 사할린은 오랫동안 러시아의 관심영역 밖에 있었다.

19 세기가 되어서야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시모다 조약(1855)과 상페체르부르그조약(1875)에 따라 사할린은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왔다.

1904–905 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는 패하고 1905 년 8 월 23 일(9 월 5 일)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북위 50 도 이남의 사할린 영토를 일본에게

양보했다. 이렇게 섬의 영토는 두 개로 나뉘고 남부는 일본에게 넘어갔다.  쿠릴열도와 남사할린을 받은 일본 정부는 그곳에 행정국과

 자체통치조직, 선거체계를 만들었다. 쿠릴열도는 홋카이도 총독체계로 편입됐다.  1907 년 남사할린 지역에 가라후토 총독체제가 수립되고

 1908 년에는  도요하라시(블라지미롭프카, 1946 년부터  유즈노–사할린스크)가 중심이 됐다.

새로운 땅을 얻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들도  조선인들도 가라후토에 갔다. 1910 년 한일합병 이후 일본 식민자들은 가혹한 군사정치체제를

수립하고 경제팽창을  진행하고 국내 또는 국외에 있는 위험한 군수기업들에서 노예처럼 조선인을 부렸다. 일본식민자들의 억압과 박해,

계획적인 대량학살 정치는 다수의 조선인들을 외국으로 망명하게 만들었다.  이들 중에서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 또는 가족과 함께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1904–1905 년과 1945 년의 2 차례에 걸친 러일간 무력 충돌은 사할린 한인들의 영혼과 심장에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정책은 주로 토지몰수였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행정자원을 끌어들였다.  1912 년 조선

총독부는 부동산의 소유자가 지정한 기간내에 자기소유의 토지를 신고하고 일본재정관청이 그 소유권을  확인할 전권을 가지고  있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1910–1918 년 토지대장조치를 실행한 결과 약 천만정보(992만 헥타아르)의 경작지와 천백이십만 정보(1111 만 헥타아르)의 임야가

일본제국의 국유지로 추산됐으며 일본지주들의 소유로 넘어갔다. 생존수단을 잃은 농민들은 소작인이나 일용노동자가 됐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마저 박탈당한 농민들은 산으로  올라가 개간농업을 하거나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해야했다. 1912–1931 년간에 생산량이 6배 이상

증가한 쌀을 일본으로 대량 수출했기 때문에 주민1  인당 쌀의  소비량은 형편없이 감소했다.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48–50%가 유출됐고 매년

몇 백만 섬의 쌀과 콩을 착출했다. 1931 년에 이르러서는 2백만 이상의 농민이 연생산량의 50–80%에  달하는 높은 소작료 때문에 파산했다.

일본 식민 체제에서 조선인에 대한 동화 정책은 모든 영역에서 진행됐다. 최초시기에는 주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식민자들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인종적 동일성에 대한 이론을 확산시켰다.  그런 다음 조선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  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조선인들을 일본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름과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 정책은 민족 의식과 한국 문화, 자주성을 없애는 데 방향을

맞추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 민중을 순응하는 식민지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식민지권력에 대한 모든 비판과 선동, 파괴공작을 없애기 위해 폭동, 소요, 무질서, 언론, 일본 황실 권위 훼손, 정치범죄, 사회질서유지

등에 관한 온갖 종류의 법령과 명령이 만들어졌다. 1930 년대 초 농민들은 기아의 한계에 이르렀다. 유일한 탈출구는 외국으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은 타지 – 만주(19%), 시베리아(2.88%), 일본(16.85%)으로 떠났다.

사할린에 조선인이 처음으로 유입된 것은 1870–1880 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1897 년의 제1 차 전체 러시아 인구조사 기록으로 조선인은 67

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를 거쳐 사할린으로 이주한 이들 조선인들은 1920 년대 초반에는 러시아령인 북부사할린에

1400 여명, 일본령인 남부사할린에 1000 여명이었다. 이때만 해도 사할린의 조선인들은 식민지 조선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일자리를

찾아 온 자발적 이주민들이었다. 이후에도 조선인 이주자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는데 북부사할린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소련 정부에 의해 1937 년에 1187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기도 했다.

여기서 고려인이라는 아픈 역사의 단면이 그려진 이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 국가에서 고려인이란 독립국가연합(CIS)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통틀어 말하는데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아픈 상처의 하나로 치부되고 있다. 먼 곳의 이야기로 치자면 918 년 세운 고려의

옛 이름을 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조선에서 먹고 살기 위해 러시아로 이주했거나 나라를 잃어버렸을 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로 건너와 민족정신을 일으켜 세웠던 한국인의 선조를 말한다. 즉 조선의 먼 나라가 고려로 통용됐기에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이탈리아 노예로 팔려간 조선인 청년의 케이스와 똑같은 이름으로 불렀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사할린 한인들은 고려인과

차별을 두고 있다. 이유는 중앙아시아 고려인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편견인데 온전히 일제 강점기 때 끌려왔던 피해자로 부류해 고려인이 아닌

지구촌 한인사회의 일원으로 취급하기가 더 지배적이다.

그렇지만 애국심이 투철한 중앙아시아 고려인과 얼어붙은 땅 동토에 끌려와 반평생을 피해자로 살아온 1 세 사할린 한인들의 차이점에 그 어떤

정의를 논하기는 딱히 어려운 실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