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문제: 전후처리와 처우개선 - Page3

그렇듯이 사할린이주의 유입 경로도 러시아이주에서

시작되고 그 이후 사할린이 자원보고로 알려지자

취업차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1905 년

남사할린이 일본에 넘겨 지자 일본은 전쟁수급의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조선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일본의 징집제가 도입되고

사할린에 모집이 시작한 시기가 1938 년대부터이다.

가장 절정에 달했을 때가 1939–1944 년이고 해방

전까지 모집이 자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1905 년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하고 1937 년 만주전쟁에서의

군대보장을 위한 산업에서 비롯된 노동력 부족을

빌미삼아 1939 년부터 조선에서도 강제모집을

강행했다. 일본은 사할린을 접수하자마자 철도를

부설하고 1907 년 화태청(가라후토)을 승격하고

식민지 개발을 급속도로 이어나갔다. 철도는 물론

도로 및 비행장 건설 등에 총동원령을 내렸고 특히나

천연가스와 석탄매장량이 많아서 자원개발에

"북진정책"을 펼쳐 사할린을 전쟁수급지로 개발해나갔다.

 

 일본으로의 재일한인의 이주와 정착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통치라는 역사적 조건하에서 진행됐다. 비록 이주의 형태와 동기는 다르더라도

식민지 통치시기에 강제로 끌려와서 착취당했다는 인식은 재일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모국과 거주국과의 관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일강제합병(1910)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882 년에 4 명, 1909 년에는 790

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은 유학생이고 소수가 외교관, 정치적 망명자들이다. 1907 년에 도쿄 유학생은 그 수가

거의 5백 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일본이 서구문명을 통하여 성공한 이유를 찾고자 했다. 이들은 학업을 마치기까지의 일시체류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하의 재일한인과는 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한일강제합병 이전에는 일본이 대부분의 산업에서 외국인노동자를 금지했기 때문에

조선 노동자의 유입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 당시에도 각종의 육체노동자들이 도일한 것으로 알려져 일본경제가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 조선인 노동력을 도입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일강제합병으로 인해 조선인은 일본제국의 신민이 됐고 외국인노동자 입국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1914 년 제1 차 세계대전의 파급효과로

활황을 맞은 일본으로 일거리를 찾아 건너가기 시작했다. 일본 자본가들은 국내의 노동력 부족과 임금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저임금의 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했다. 그들은 모집 브로커를 조선 지역에 파견하여 노동자 모집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재일조선인의 수는 1915 년의 3917

명에서 1920 년에는 30,189 명으로 5 년 만에 8 배가량 증가했다.

1920 년대에 들어서 도항하는 조선인이 급증한 것은 일본에서의 유인요인도 있었지만 조선에서의 유출요인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한일강제합병 후 일제는 강압정치를 시작했고 이때 식민지 경제정책의 중심이 된 것이 토지조사사업(1910 년 3 월–1918 년 11 월)이었다.

일제는 토지의 소유권을 실제로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인정한 것이 아니고 그 토지와의 연고관계를 신고한 사람에게 인정해 주는 신고주의를

채택했다. 신고하지 않은 토지는 일단 "국유"로 편입된 후 일본인 지주 및 토지회사에 불하됐다. 당시 대다수의 농민들이 문맹이었고 근대법에 무지했기

때문에 자작농이라 하더라도 토지소유관계를 신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많은 농민들이 지금껏 경작하던 토지를 잃게 됐다. 이로 인해 1920 년

조선인 농가 중 자영농이 23%, 반자작이 37%, 소작농이 40%였던 것이 1940 년이 되면 각각 18%, 23%, 59%로 바뀌었다. 이렇게 몰락한 농민들은

농촌에서 과잉인구로 집적되어 소작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악순환을 이루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국내의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거나

산간벽지의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해외로 유출됐다.

1920 년대에 일제는 조선에서 산미증산계획을 실시하여 조선의 쌀생산은 증가했지만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욱 많아 조선의 식량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이농인구가 증가했으나 국내의 경제발전 수준이 낮아서 이들을 임금노동자로 수용하지 못하자 상당수가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려

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경제와 사회여건은 결코 조선인이 이주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1923 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에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넣는다고 믿은 일본인 민병대원들에 의해 6천  명 가량의 조선사람들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1929 년의 세계 대공황 이후

일본경제는 불경기와 실업문제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1931 년에 국내 실업자수는 3백만 명에 달했다. 일본의 실업문제가 심각하자 조선 총독부는

일본 내무성의 요청에 따라 1925 년 8 월에 도항저지제를 실시하여 조선인의 도항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도항하는 조선인의

수가 줄지 않고 증가하여 1920 년의 3.0189 명에서 1930 년에는 298,091 명, 1935 년에는 62.5678 명, 1940 년에는 119.0444 명, 1944 년에는

193.6843 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조선에서의 생활고가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의 생활고를 피해 일본으로 도항한 사람들은 농촌에서 유출된 과잉 인구의 일부분에 불과했고 지리적 관계로 일본에 도항한 사람들은 경상도,

제주도, 전라도와 같은 남한지역 출신들이 주류였다. 1923 년의 일본 내무성 경보국의 조사에 따르면 이 해 출신지가 알려진 도항자 72,815 명 가운데

경상남도 출신이 39%, 전라남도(제주도 포함) 출신이 25%, 경상북도 출신이 16%를 차지했다. 지연과 함께 친분관계도 도항에 영향을 주었다.

1927 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이주자의 73%가 친척 또는 친구를 통해서 일자리를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도항이 일본과 조선을 연결하는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조선에서 같은 지역 출신은 일본에서도 같은 지역과 산업에 집중되는 경향을 띠었다.

일본왕의 칙령 №33에 따라 1907 년 4 월 일본 정부가 만든 가라후토 총독체제는 이  영토에서 가능한  최대량의 천연자원을 유출하는 조치들을

실행시켰다. 예를 들면 1924–1934 년 8억 2190만엔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산업생산품이 섬의 외부로 유출됐다. 새로운  영토에서 가장

  수입이 좋은  산업은  무단으로 벌채한 목재의 생산과  가공이었다. 1906–1934 년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약 6천 8백만 입방미터의 목재를 생산했다.

목재의 가공이 일본제국  사할린 경제수탈의 중요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제지공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15–1934 년 일본인들은

202만 6천톤의  셀률로오스와 191만 톤의 종이를 생산했다. 일본지배 초기에는 주요 탄전들이 법으로 채굴을 금지시킨 "예비용"이라고 공표됐다.

하지만 셀룰로오스제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1920 년대에는 이 매장지들의 개발금지를 일부 폐쇄하고  1930 년대 초에는 이미 20 여개의

임산자원채굴기업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30 년대  중반부터는  남사할린  전체에서  30개에 달하는  새로운 탄광개발을  시작했다. 전시상황으로

1937 년에는 석탄수출이 지역소비보다 많아졌고 그 이듬해에는 계속 증가했다. 1941 년에는 4백만 톤 또는 가라후토 지역 연간생산량의 62%라는

가장 커다란 수치에 도달하게 됐다. 섬의 천연자원 개발을 위해 "오지세이시(임산업)", "미쓰비시"와 "미쓰이(석탄사업)"등과 같은 독점기업들의

혹독한 경쟁이 진행됐다.

1932 년 이후 일본경제의 군수화가 시작됐고 통화팽창 과정이  강화됐다. 일본제국은 자신의 영향력을 아시아대륙의 내륙으로 확장시키려고 노력했다.

1931 년 만주를 점령하고 1937 년 중국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소비에트와 몽골의 국경지역에서 도발행위를 조직했다.

1941 년 12 월 7 일 일본은 태평양과  인도차이나, 버마에서 미합중국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1937–1938 년  가라후토에서는

시수카(현 포로나이스크)와 도요하라(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군용비행장 건설을 시작했고 1936 년에는 도요하라 – 시수카 간 철도건설이 완료됐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군사 및 경제적 상황을 첨예화시켜 노동자원의 급격한 증대를 필요로 했고  이는 한반도에서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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