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문제: 전후처리와 처우개선 - Page4

(2) 강제이주시기(1938– 1945)

일본은 1931 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 년 중일전쟁을 개시하면서 전선확대에 따른 병력과 일본 본토의 전시산업을 지탱할 노동력 확보가

필요하게 됐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1938 년 4 월에 국가총동원법을 발표하고 1939 년 7 월에 노동력 동원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1939 년 9 월에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 취급 요강"을 발표하여 강제연행이 시작됐다. 형식은 "모집"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제연행이었다. 탄광, 광산으로의

조선노동자 강제연행이 시작됐고, 후에 철강, 토목산업 등 그 외의 모집분야에도 확대됐다. 1941 년 태평양전쟁을 시작함에 따라 국민징용령을 1944 년

공포했다. 그러나 이미 그 전부터 군과 관련된 곳에 조선인 노동자징발과 학도징용이 이루어졌고, 이에 1939 년부터 1945 년까지 강제연행된 인원은

724,787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군인, 군속 365,263 명을 합하면 조선인 강제연행자 수는 100만 명을 넘는다. 여기에 추가하여 여성자원봉사대의

이름으로 20만 명의 여성이 동원됐는데 이 중 8만 명 가량이 소위 "종군위안부"로 동원됐다.

초기에 일본식민권력은 과대한 약속을 하면서 "달콤한 말로" 자원 모집을 하는 형태로 이주를 진행했지만 이것으로는 필요한 인적자원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38 년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총동원"에 대한 법령 №55를 공표했다. "조선과 타이완, 가라후토에서

전체동원령의 실행에 대한" 1938 년 5 월 4 일자 일본왕의 칙령 № 316에 준하여 1939 년 9 월부터 한국인들의 대규모 강제동원이 시작됐다.

같은 해 "국민직업능력신고"와 "노동동원"에 대한 법령이 통과됐고 이에 준하여 조선 총독부는 1940 년과 1944 년 가라후토와 태평양 남서부 지역의

도서에 파견할 젊은조선인 남성과 여성들에 대한 총동원을 실행시켰다. 30  여년간 사할린 한인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일본인 변호사 다카키 케니치의

말에 따르면 제2 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 약 2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송출됐고 그들의 약 6만 명이 가라후토로 보내졌다.

남사할린에서 조선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과정이 계속됐고 조선인에 대한 강제이주와 동원 작업이 계속됐다. 최고 절정은 1939–1945 년이었다.

식민화의 촉진을 위해 일본은 "북진" 정책을 진행했다. 천연 자원의 개발은 많은  인적 자원을 필요로 했다. 조선에서 값싼 노동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쓰비시", "미쓰이", "오지" 등의 기업들은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들은 일년짜리  계약을 체결하고 다양한 조세감면을

제공하고 높은 임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예를 들면, 1930 년까지 "가와카미"(현 사할린 시네고르스크) 탄광에는 약 500 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있었다.

1920 년 최초의 가라후토 주민 조사에 따르면 이곳에는  조선인 934 명이 살고 있었고 그중에서 도요하라 416 명, 마오카(현 홈스크) 176 명, 시스카

153 명, 토마리오루(현 토마리)  97명,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 92 명이었다. 북사할린에 대한 일본의 한시적 점령(1920–1925)이 끝난 후  다수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과 함께 남사할린으로 철수했다. 이것은 "자발적 징집" – 주로  한국의 남부에서 독신 또는 가족과 함께 젊은이들이 왔었다.

  하지만 1937 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징집의 성격은 매우 달라졌고 강제 이주적  형태를 띄게 됐다.

우선 일제가 조선인 징용, 즉 강제동원을 실시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또 어떤 배경(목적)에서였을까? 한국내 역사학계에 따르면, 조선인 징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7 년 중일전쟁 이후부터이며, 그 목적은 부족한 인적 자원 보충차원에서였다. 1937 년 말 일제는 당시 중국의 수도 남경(南京)을 함락하면

조만간 전쟁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장개석 국민정부가 "백년항전"을 선언하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이에 일제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인력과 물자 동원을 위해 1938 년 4 월 1 일 법률 제55 호로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공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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