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문제: 전후처리와 처우개선 - Page5

 

이는 일제말기 전시 동원체제를 총괄하는 기본 골격이자 각종 동원의 법적 근거가

됐다. 그런데 국가총동원은 일본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을 비롯해 대만

·사할린 등 식민지 전역에도 적용됐는데, 조선에서는 한 달 뒤인 5 월 4 일자로

시행됐다. 이에 근거하여 일제는 '국민징용령'을 비롯해 '가격통제령', '조선징병령',

'식량관리령','농지관리령' 등을 잇따라 발포했다. 이로써 조선 총독부는 사람이면

사람, 물자면 물자, 토지면 토지, 즉 그들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경우 그 어떤 것이든

마음대로 조선에서 동원하고 또 징발할 수 있게 됐다. 당시 '국가총동원법'은 모든

법률에 우선하여 적용됐고 또 이를 어길 경우 형벌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정까지 두고

있어서 조선인들에게는 사상범 탄압용인 '치안유지법'과 함께 가장 두려운 법이었다.

이같은 연유로 한국내 역사학계는 물론 관련 국가기관에서도 조선인 강제동원

시점을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된 때를 기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등을 위해 2007 년에 제정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 제2 조(정의) 1 항은 '강제동원 희생자'를 '1938 년 4 월 1 일부터

1945 년 8 월 15 일 사이에 일제에 의하여 군인·군무원 또는 노무자 등으로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그 기간 중 또는 국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이 동원의 실행은  편의상 3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1938년 4월–1942년 2월)는 징집(모집)의 시기이며 일본기업들이 점령권력과

지역 관리들이 지원으로 실행시킨 '자발적 강제' 동원의 시기이다.

▲[징용대상자가 징용장을 받는 모습. 뒤편에 '국민징용'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국가기록원 제공)

 총동원 계획에 준하여 각 청구 기업에 대한 배당이 이루어졌다. 조선 농민들의 참기 힘든 생활 조건이 젊은 농민들을 징집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거절하는 경우 가족 전체가 불신자 명단에 들어가게 됐었다. 2단계(1942년 2월–1944년 9월)는 '국가의 조직적

징집(관 알선)'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은 군수사업과 관련된 제철기업들에 노동력이 매우 부족한 것을 경험하게

됐다. 1942년 2월 20일 '한국인의 일본 이주 소개서'가  발행됐다. 이 문서는 동원의 강제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1942년 2월 23일  일본 정부는

조선인 노동자의 사용에 관한 법령을 받아들이고 이에 준하여 정부 기관들은 파견하기 위한 노동자들을 직접 소개한다. 1941년 6월 괴뢰

집단인  "조선 노동 연맹"을 설립하여 공개적으로 대량의 '한국인 사냥'을 시작했다. 형식적으로 정부 기관의 소개를 거절할 수  있었지만 이

소개서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은 강제 후송을 당했다.

3단계(1944년 9월–1945년 8월)는 조선인들의 운명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기로 '노무(징용)'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됐다.  1939년 공포된 '국민 노무에 대한' 법령은 1944년 9월부터 한반도로 확대된다. 1944년 2월에는 국민 노무에

대한 명령이 공포되어 총동원이 실행됐다. 이것은 1944년까지 한국인 징집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계획했던  30만명을 다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실행된 것이다.

이것은 조선과 가라후토의 근로 대중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기였고 나라 전체가 기아의 배급 상태에 있었다. 조선 총독 코이소 쿠니아키는

1943년 5월 도쿄의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조선은 지금 소나무껍질과 쑥, 다른 풀들로 연명하고 있다". 이 시기 사건의

목격자들의 몇 가지 증언을 들어보겠다. "새고려신문" 편집국에서 일한 사할린 한인 젊은 세대 대표와의 만남에서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회 전 노인회장 우정구(1934년생)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할린으로 가는 노동자를 징집한다는 것을 알고 1942년 우리 아버지는 스스로 신청을 하고 혼자 떠났다. 1930년대 우리 부모님은 한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고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적은 토지를 소유한 가난한 농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사할린에서

돈을 벌어서 집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나를 학교에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년 후  9살 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으려

사할린으로 갔다. 아버지가 광부로 일하시는 가와카미 탄광에 도착해서 우리는 천막에서 살기 시작했다".

가라후토로 징집된 조선인들의 처지는 끔찍했다. 대부분 군용 비행장과  철도 건설,

탄광, 목재가공 등 고되고 위험한 조건에서 일을 해야 했다. 사할린주한인협회 전

노인회장 故 박해동의 이야기는 앞서 말한 내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라고 할 수

있다:  "1943년 1월 나는 고향 마을에서 잡혀 부산으로 이송됐다. 경찰서에서 죄수

작업복으로 갈아입혔다. 일주일간 우리는 창고에 같혀있었다. 와카나이에서 배에

태웠다. 한국인 42명은 가장 낮은 선창의 철제 바닥에 짐꾸러미처럼 던져젔다.

캄캄한 밤에 오도마리 항구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나이부치(현 브이코프)

탄광으로 실려 갔고 즉시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우리는 석탄을 캐기 위한 기계에

불과했다.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서서 밥을 먹고 교대를 위해서는 광부  1인당 2톤을

캐야했다. 안정 장치는 전혀 없었고 광부들이 붕괴 사고를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1940년대 탄광노동자들이 교육받는 모습(국가기록원 제공)]

최악의 생활 환경과 힘에 부치는 노동, 일본인 감독관과 그 조선인 앞잡이들의 천대로 인해 기아와 피로, 절망에 빠진 탄부들 중에 도망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붙잡혀 타고베야에 갇혔다. 일본과 가라후토에서 노동력을 이용하는 특성은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와 중세 시대에

널리 사용하던 일꾼들에 대한 박해를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착취의 가장 섬세한 형태 중의 하나가  '다코베야(또는 강고쿠베야)' 체계였다.

이것은 강제로 만드러진 노동자 기숙사의 종속 형태였다. 이것은 룸펜–프롤레타리아 징집을 통해 토지 건설 작업의 하청 회사들에 의해

조직됐다. 사할린 경제학박사 故 박수호는 다코베야의 발생을 설명하면서 "일본의 백과사전에서 다코베야는 홋카이도와 사할린 탄광에서

죄수들처럼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기숙사이다. 이 감금자들을 다코라고 불렀다"고 쓰고 있다. 다코는 강제노동을 위해 다코베야 수용소에

있던  감금자들이다. 만약 1886년 홋카이도 다코베야가 탄생하던 시기 다코가 정말 죄수들이었다면 1938–1945년 이들은 강제로 이송된

조선인들이었다. 코르사코프시 주민인 故 박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벌목장에서 일했고 우리는 나무를 베서 떠내려 보냈다. … 우리의 노동 조건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도주했다.

  붙잡힌 사람들은 반죽음이 될 때까지 구타 당했고 다코베야에 집어놓였다".

다코베야에는 가혹한 규율이 이었다. 일본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신체적 징벌을 가했다. 환자도 일을 하게 만들었으며 손으로 끌어냈다.

기준량을 완수하지 못하면 식사를 주지 않았다. 기준량은 다른 곳의 두배였다. 조선인들은 "한번 다코베야에 들어가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가장 고되고 위험한  구역에서 일을 했지만 다코의 노동은 전혀 보장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코는 항상

채무자로 남게되어 다코베야에서 평생을 남게되는 원인이 됐다. 다코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서도 안 되고 수갑을 채웠으며 질서와 규칙을

위반한 자는 가혹한 몽동이질을 당해 죽는 일도 다반사였다.

징용 대상자들에게도 군 입대자처럼 영서(令書), 즉 영장(令狀)이 발부됐다. 일본 본토의 경우 후생대신(厚生大臣)이, 조선에서는 일왕의

대리권자인 조선 총독이 발급했다. 초창기 징용은 조선인의 반발을 우려해 지원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신청자가 적어 필요한

숫자를 채우지 못하게 되자 총독부는 할 수 없이 동네별로 할당량을 정해 목표를 채우도록 강요했다. 당시 징용 영장을 받은 자는 지정된

사업장에 가서 복무하도록 돼 있었는데,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나 지역유지 등 힘있는 자들은 대부분 빠졌고,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서민들이 그 머릿수를 채우곤 했다.

한편 효율적인 노동력 동원을 위해 일제는 1939년 1월 7일자로 "국민직업능력신고령"을 공포했는데 조선에서는 6월 1일부터 시행됐다.

이어 그해 7월 일본 내무성과 후생성은 '조선인 노무자 내지(內地) 이주에 관한 건' 발표를 통해 조선인 노동자 강제연행의 근거를 마련했는데,

총독부가 9월 1일에 각 도지사 앞으로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취체요강(要綱)'을 통보함으로써 공식 발효됐다. 이 계획에 따라 조선

총독부는 단계별로 '모집'(1939.9–1942.1), '관(官)알선'(1942.2–1944.8), '강제징용'(1944.9–1945.8) 등으로 나누어 조선인 노무자 동원을

실시했다. 시기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 모두는 사실상 강제동원이었고, 또 노동력을 수탈했다는 점에서 흔히 '강제연행'으로 통칭되고 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하 노동자·군인·군속 등으로 강제 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는 1032,684명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배상 대상자인 사망자 숫자 21,919명(군인 6178명, 군속 15,741명)만 밝혔을 뿐 전체 강제동원 숫자와 명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간 국내에서 알려져 온 바로는 "한반도에서 600여만 명이 강제동원됐으며, 이들 가운데 70여만 명이 해외로 강제연행됐다"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지난 1990년 4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강제연행자 명부 일부를 공개했는데, 그 숫자는

71,476명으로 실제 인원수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결정적이고 구체적인 자료가 발굴된 것은 1991년초의 일이다. 동경제대 재학중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故 정기영씨(전 "1.20동지회" 부회장)는 학도병 출신자들의 모임인 1.20동지회 "회보" 제32호(1991.1.20)에서

1947년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라는 문건을 입수해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노무자 송출 등 조선인 징용자는 총 612, 6180명으로, 당시 조선인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이 가운데는 도내동원(1938–1945)이 536만여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관(官)알선"(1934–1945) 422,397명, 현원징용 260,145명,

국민징용 43,679명, 군요원 33,861명 등으로 나타났다.(여기에 징병, 학도병, 일본군위안부까지 합칠 경우 전체 강제동원 피해자 숫자는 거의

800만명에 육박). 이들 가운데 "도내동원", 즉 조선 내 동원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일본 본토를 비롯해 사할린, 동남아, 심지어 남양군도까지

강제로 끌려갔다. 일본으로 끌려간 징용자들의 경우 대개 탄광이나 군수공장 등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됐으며, 군속으로 차출된 경우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 지역의 군사기지 건설이나 철도 공사에 동원됐다.

특히 군속의 경우 전후 재판에서 B·C급 전범(戰犯)으로 몰려 희생되기도 했다. 특히 사할린 징용 조선인들의 경우 냉전으로 인해 한동안

고국으로 돌아올 수도 없었으며, 이마저도 살아남은 자들의 경우이며 죽은 자들은 아직도 타국땅에서 고혼으로 떠돌고 있는 실정이다.

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성노예"라고 일컫는다면 징용 피해자들은

"노동노예"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극도로 비참한 작업환경에서 힘든 강제노역을

감내해야 했으며, 게다가 이들 대다수는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재일사학자

故 박경식이 1965년에 펴낸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은 일제하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는 일본 북해도에

끌려가 탄광노동자로 강제노역을 당한 김영선의 생생한 증언이 실려 있다.

그 중 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 보고 싶어" 조선인 탄광 징용노동자가 지하 갱 벽에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쓴 글씨ⓒ 자료사진](국가기록원 제공)

"아침에는 4시에 일어나 5시 반에 갱에 들어갔다. 오후 7–8시가 되어야 겨우 숙소에 돌아왔다. 9시 정도가 되어 잠이 드는데 방에 들어가면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모두 외출하는 것을 막아 마치 형무소와 같았다. 아니 훨씬 혹독했다. 한 달에 세 번 쉬었지만 밖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방에서 빈둥거렸다. 하루에 5엔 준다고 해 놓고는 실제는 3엔도 주지 않았다. 3엔을 받아도 갱을 들고 날 때 신는 신발 빌리는 값

1엔15전, 짚신값 30전, 이부자리 값 35전, 식비 1엔20전, 이밖에 담배값을 빼고 월말 정산하면 1–2엔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히려 빚을

지는 일이 많았다. 그 때 신을 것이 없어서 갱을 들고 날 때 신는 신발 위에 짚신을 신었는데, 이것도 하루밖에 신지 못해 맨발로 일할 때가

많았다. 식사는 아침에는 소금국에 콩밥 한 공기 밖에 없었다. 점심 때 먹을 도시락을 아침에 먹어 점심을 굶었다. 간부들은 흰쌀밥에 된장국,

생선반찬으로 식사를 했지만…."

김씨의 경우 하루 14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휴식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했으며, 일과 후에도 "우리"에 갇힌 가축처럼 지내야만 했다.

당시 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은 죄수의 유치장 노역에 버금갈 정도의 힘든 노동에다 최악의 주거환경과 불량한 식사 등 개·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강제징용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작업장에서의 탈주나 작업

거부는 물론 적극적으로는 파업이나 폭동 봉기로 맞서기도 했다. 또 더러는 작업장 내에서 항일조직을 결성하여 비밀리에 운동을 전개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 내무성 조사에 의하면, 1939–1942년 사이에 일본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가운데 257,907 명이 탈주를 시도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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