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문제: 전후처리와 처우개선 - Page6

 

(1)    이중징용(전환배치)

최근까지 알려진 바로는 사할린 강제징용수가 2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할린에 징용된 조선인은 쿠릴열도까지 동원됐고 건설, 도로, 탄광

등에 남사할린 전체에 투입됐다. 허나 탄광에 동원된 1 세 조선인들의 정확한 동원인원이 분명치가 않다.

가장 많이 연행됐을 때가 6만 명이라고 했다가 탄광 전환 혹은 재징용되어 일본 본토로 이동한 이후로 2만 명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광부로

이중징용에 동원됐던 인원은 북쪽을 포함해 조선인 3190명이 사할린에서 일본내지로 동원됐다. 이것이 이중 징용된 조선인 탄부이다. 이는 조선

총독부 자료에도 일본내지, 남양군도 등을 제외한 사할린에 조선인 노무자는 1.6114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중 석탄 채굴에 종사한 노무자는

10,500명에 해당됐다. 나머지는 산림, 제지, 수산, 토목건축에 투입됐다.

일본 정부는 남사할린을 점령한 이후 자원개발과 확보를 위해 많은 노동력을 투입했다. 남사할린에 투입된 조선인의 수는 점차 늘어나

1920년대에는 중국인의 수를 상회했다. 직종별로는 탄광종사자가 다수여서 1939–1943 년간 집단이입노무자 1,6114 명 가운데 석탄산 종사

조선인 노무자는 65%(10,509 명)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인다. 그 외 토목건축현장과 삼림장 및 제지공장, 수산업, 농업에 종사했다.

일본 정부가 남사할린 소재 탄광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는 1930 년대 이후이다. 채탄에 관한 조사 작업을 거쳐 수송을

위한 인프라(철도, 도로)가 마련된 이후 화태청의 정책적 지원아래 1940년부터 거대 기업이 진출했다. 이후 1945 년까지 남사할린에서 가동한

탄광은 56 개소였는데, 이 가운데 1940–1945 년간 조선인이 취로한 탄광은 36 개소이다. 지역적으로는 에스도로(현 우글레고르스크)와 마오카

(현 홈스크) 지청 관하인 서안 지역이 가장 다수이고, 가미시스카(현 레오니도보) 지청 관하인 동안 지역이 뒤를 잇고 있으며, 중부지역인

도요하라(현 유즈노–사할린스크) 지청 관하 탄광은 4개소에 그쳤다. 전시 인력동원에 의해 1940 년부터 조선인 탄광부의 숫자는 증가했으나

일본 정부의 자원 확보 정책에 따라 조선인이 소속한 탄광의 수는 감소되는 현상을 보였다.

일본은 1942 년경부터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 등 인적·물적 자원의 통제 및 운용에 관한 법적 근거에 의해 노동력의 전환배치를 했다.

1944 년에 사할린의 탄광노동력을 일본 본토로 이동한 사례도 전체적인 인력 재배치 작업의 일환이다.

남사할린 조선인 탄광부의 전환배치는 1944년 8월 11일 각의결정 "화태(樺太) 및 쿠시로 탄광근로자, 자재 등의 급속전환에 관한 건"을 근거로

실시됐다. 이 조치로 휴·폐광된 탄광은 채탄규모가 크고, 탄질도 우수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문제와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휴·폐광 조치됐다.

화태청은 남사할린에 가동 중인 탄광에 대해 세 가지 보조금을 지급했으나 보조금 지급 조치에 비례해 출탄실적이 저조한 탄광이 있었으므로

탄광정리가 불가피했다. 출탄실적이 우수한 탄광의 경우에는 수송문제가 배경이 됐다. 남사할린 탄광에서 생산되는 석탄의 대부분은 일본

본토에서 사용됐는데, 1942 년 후반부터 선박부족과 연합군 공격으로 인해 수송선의 피해가 늘어나자 석탄적취선의 배선이 급격히 줄어들다가

1944년 8월에는 배선중단 상태를 맞게 됐다. 이로 인해 수송하지 못한 석탄의 저탄율이 급증하자 자연발화의 위험이 있었고 정부의 재정부담

문제가 대두됐다. 당시 일본 정부는 저탄된 석탄에 대해 매입가격보상금을 지급하고 융자 및 차입금의 이자 보급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 비용이 계속 늘어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배경으로 인해 탄광을 휴·폐광하고, 노동력을 일본 본토로 전환배치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게 됐다.

일본 각의결정에 의해 1944년 9월 태평양에서 군사행동이 활발해졌을 때 남사할린 지역에 가동 중이던 26 개소 탄광 가운데 서해안 탄전지구의

14개소 탄광이 정리되고 인원(조선인 3000 명, 일본인 6000 명) 및 생산자재가 일본 본토로 긴급 배치됐다. 조선인들은 1944년 8월 19일부터

3 일간 징용령을 받고, 8 월 25 일부터 9 월 16 일 까지 일본 본토에 입항했다. 이들은 후쿠오카 17개소 탄광, 후쿠시마 1 개소 탄광, 나가사키

4 개소 탄광, 이바라기 4 개소 탄광 등 총 4개현 26개소 탄광으로 전환배치됐다. 45명은 이바라기 탄광으로 후송되고 남은  3000명은 큐수

탄광으로 갔다. 작업장 배치 원칙은 동일한 계열 회사이다.

그러나 수행과정에서 약간의 변경이 이루어졌다. 당초 3022명이 징용령을 받았으나 입산한 조선인은 3191명이고, 전환배치 지역도 후쿠오카

입산 예정 조선인 가운데 일부가 나가사키와 이바라기로 변경 배치되는 등 변동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167명의 배치 작업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 탄광지역

징용수(명)

일본 탄광지역

징용수(명)

안베쯔

134

모로쓰무연탄광

27

고난

148

도로 미쯔비시

204

니시사꾸탄

378

도로 가네보

667

나요시

145

다이헤이, 스토루(덴나이)

599

도요하타

148

도로 하꾸자와

348

산부쿠  무연탄광

370

합계

3,190

기타고자와

22

 

 

▲[사할린 한인  이중징용 일본 내지 탄광 배치표] 

급작스러운 전환배치 과정은 "가족원호" "징용원호"를 내세운 회유와 경찰관의 승선이라는 감시 및 통제를 통해 진행됐다. 이들은 사할린에서도

열악한 노동 상황 아래 놓여 있었으나 일본 본토 배치 이후에는 노동조건이 더욱 열악하여 사고사도 빈번했다. 그러나 전환배치의 가장 큰

후유증은 가족 이산이다. 전환배치된 조선인 노무자들은 대부분 가족을 남겨두고 떠났다. 가족을 동반한 사례는 후쿠시마 지역에 입산한 조선인

149명과 가족 125명이다. 이들은 가족을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족수송계획은 문서상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사할린에 남은 가족들은 어떠한 삶을 살게 됐는가?  사할린에 남은 가족들이 겪은 전환배치의 첫 번째 산물은 생활고,

두 번째 산물은 민족적·사회적 차별, 세 번째 산물은 가정의 해체로 인한 후유증이다.

 가장의 부재로 유소년기를 결손가정에서 보내야했기에 사회적 차별을 당해야 했고, 자신의 뿌리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도 겪어야 했다.

해방을 맞아 일본에서 일하던 조선인노무자들은 가장이 가족을 만나기 위해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일본에서

고향으로 귀국을 함으로써 평생토록 만나지 못하거나 수십 년이 지나서야 해후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귀환의 방향을 가족이 있는

사할린이 아니라 한국으로 잡았던 이유는,  첫째, 당시 여건이 사할린으로 돌아가기 어려웠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할린 상황에 대한 정보 부족

문제가 있다. 사할린으로 돌아간 소수의 조선인들은 노동의 후유증으로 귀환 후 조기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한국으로 귀환한 경우에도 가족 이산의 아픔은 계속됐다. 전란의 혼란 속에서 가족을 사할린에 남겨두고 고국행을 택해야 했던 사람들은 사할린과

연락을 시도하거나 가족과 재회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언제까지 막연한 기다림만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극소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고, 일부는 노년에 가족과 재회했으나 대부분은 고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다가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용어에 대해서 살펴보면, 일본의 연구가 "재징용", "전환배치", "현원징용" 등을, 한국내 연구는 "이중징용"이라고 하여 유가족회가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당시 인력동원의 재배치와 이동이 빈번하게 시행됐고,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조치와 관련한 공식적인 용어인

"전환배치" 보다는 "이중징용"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전쟁이 긑날 때까지 이들은 사할린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만날 수가 없었다. 그  광부들의 자녀들의 회상을 인용해 보면, "이중징용"이라는 2차례

강제 동원된 한인들의 사할린 사회단체 대표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진길(1944): "아버지의 이름은 소자근(1905), 어머니는 이점순(1917)이다. 1942년 아버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제 동윈을 당해서 도로 탄광

(현 사할린주의 샤흐초르스크)로 이송됐고 그런 다음 1944년 다시 큐수 탄광으로 동원됐다. 나는 아버지가 떠나고 난 3개월 후에 태어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임태환(1934): "내가 7살이 됐을 때 나의 어머니는 아이들  둘을 데리고  토요하타 탄광(현 사할린주의 레소고르스크 마을)에 강제 동원된 아버지를

찾으려고 사할린에 갔다.  이때는 중일전쟁의 절정기였다. 그래서 1944년 9월  아버지는 이바라기 탄광(일본)으로 이송됐다. 가족은 사할린에 남겨졌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는 우리가 모두 전쟁 중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갔다".

하경수:  "나의 아버지 하인준과 삼촌 두명은 사할린 "미쓰비시"사의 도로 탄광으로 강제 이송됐다.

1944년 10월 아버지는 다시 일본의 큐슈 탄광으로 동원됐다. 사할린에 가족과 할머니, 숙모가

남았다. 1945년 4월 여동생이 태어났다. 가장이 없어서 여자들과 아이들은  굶주렸고 여동생이

태어나고 한 달반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1945년 전쟁이 긑나고 아버지는 아버지처럼 두

번이나 강제 동원된 사람들 세명과 함께 밀수업자들의 배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할린에 돌아왔다. 1988년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친척들의 초청장을 받았지만

그 다음날(9월 29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와 같이 전환배치는 해방 이후 새로운 가족 이산의 아픔을 남겼다. 그러나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은 단지 개인적으로 한탄하거나 자책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원인 및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두고 온 아내와 세 아이들 일본 큐슈 후쿠오카현 치쿠호(筑豊) 탄광에 강제연행돼 혹사당한

끝에 사망한 한국인 노동자의 품에서 나온 가족사진ⓒ 독립기념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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