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문제: 전후처리와 처우개선

1)머리말

 

   사할린 한인들을 논한다면 강제징용과 러시아 내 고려인의 이주를 빼놓을 수 없다. 사할린이란 특수적 상황도 일본시대 전후에 있어 화태

(가라후토)에는 이미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다.

사할린이주의 정착배경은 필자의 저서에서도 밝힌 바 있었지만 개방(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전후 일본의 학술기관을 비롯해 르포작가라든지

홋카이도신문에서도 여러 번 보도한 바 있었다. 한국에서는 1995년 "해외희생자 유해현황조사 사업보고서"와 2003년 "일제하 피강제동원자 등

실태조사연구"로 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보고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보고서에는 사할린이주와 강제징용에 관한 정착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담고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학술지나 논문에서도 강제징용이라든지 사할린이주 및 영주귀국에 관해서 저술한 바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애초의 러시아 이주지역을 섬이 아닌 대륙 권으로 보는 것도 1884 년6 월25 일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양국 관계가

맺어졌고 그 이전 1864 년부터 한인들은 러시아로 이주해왔다. 최초의 러시아 한인역사는 후자로 치면 149 년 전이고 전자로는 129 년 전이 되는

셈이다. 그만큼은 러시아와 한국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일합병 이후 독립운동가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곳도 러시아였다. 또한 현재와 같이 러시아가 기회의 땅으로 비춰지게 된 시기 역시

1896 년 고종과 세자가 일제의 압박을 피해 은신했던 곳도 러시아였다. 그래서 러시아는 먹고살기 위해 이주했거나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근원지로 최적으로 손꼽혔다. 이들은 러시아 대륙의 헐벗은 땅에 맨몸으로 와 민족의 얼을 지켜내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한글신문을 창간하고

항일운동자금을 마련하는데 일등공신의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조선이 국권을 강탈당하고 식민지 체제가 되자 러시아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스탈린의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자 조선과의 관계는 남북관계의 사상적 이념이 돌출됐고 냉전체제가 지속되어 남한과는 1990 년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닫혀있는 상태가 됐다.

재외동포, 특히 동북아 지역의 재외동포 역사는 1910 년 국권을 상실하여 국외로 표류하고 강제 징용되어 체류할 수밖에 없었던 한민족 역사의

아픈 상처이다. 사할린 동포의 문제들 역시 이러한 일제 강점기 식민지 역사로부터 기인한다. 일제 강점기 러시아의 사할린 섬으로 강제동원된

4만 3천여명의 한인들은 1945 년 해방이 됐어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70 여년간 정든 고국과 지독한 생이별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리고 "잊혀진 70 년"이 가진 슬픈 숙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문제들을 안고 있다. 잔류한인 1 세 지원의 문제, 미래세대의 교육문제,

영주귀국의 문제, 역사청산 소송 등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된 사할린 한인의 역사회복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중대한 과제들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회피 속에서 사할린 한인들은 러시아 땅에서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내고 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는 일제 식민지하 많은 한인들이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되어 종전 후 고국으로 귀환 하지 못한 채 사할린에 억류되면서

비롯됐다. 1937 년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여 1939 년부터 약 150만 명의 한국인들을 모집, 관 알선, 징용형식으로 강제연행 또는 징용했다.

이들 한인들은 온갖 멸시와 차별을 받으면서 철도부설, 비행장 건설, 탄광 노동현장에서 노동력으로 착취당했다. 종전 후 사할린에 있었던

일본인들은 전원 일본에 귀환했으나,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의 국적 상실한 이유로 귀환거부로 한국에 귀환하지 못하고 사할린에서 억류하게 됐다.

사할린 한인  귀국의 본격적인 대두는 1988 년 소련 정부의 서울 올림픽참가를 계기로1989 년 소련과 한국 양국 정부가 사할린 한인 의 한국방문

및 영주귀국 사업에 합의함으로써 영주귀국이 시작됐다. 한편 1994 년 4 월 한·일 양국정부는 사할린 귀환 동포의 정착시범사업을 실시하기로

합의하고, 한국 정부는 1996 년 국무총리주재 재외동포 정책위원회에서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사업에 대한 대책이 마련됨에 따라 1999 년 아파트

489 세대와 100 명 수용규모 요양원이 완공됨으로써 사할린 영주귀국이 실시되게 됐다.

현재 4천 여명이 국내거주하고 있고 이들 대부분은 고령으로 경제문제, 건강문제, 사할린에 남겨둔 가족문제, 외롭고 힘든 고국생활에 적응문제

등을 안고 있다. 그러나 영주귀국 사업이 20 년이 되어가고 있지만, 사할린 한인의 생활실태와 적응에 관련된 공식 조사는 2001 년 489 세대가

입주한 안산 고향마을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시설유형별 비교조사는 물론이고 체계적인 기초실태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사할린 영주귀국동포에 대한 한국 정부의 문제는 크게 사할린 한인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방안에 대한 관심 부족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 정부에 대한 소극적 대응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사할린 영주귀국동포지원에 대한 법적 기준도 마련해

놓지 않은 상태에서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지원을 강요한다.

이에 본 연구는 1989 년 이후 고국으로 귀환한 사할린 동포의 한국 내에서의 생활실태와 만족도를 파악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사할린 귀국동포의 생활실태와 귀환한 동포들이 처해있는 생활상의 문제점을 파악한다.

둘째, 사할린 영주귀국동포의 고국생활에 있어서 생활만족도를 측정하고, 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분석한다.

셋째, 한국 사회와 국가가 이들을 위해 개선해야 할 점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를 위해 제도적 장치를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결국 사할린 귀국동포의 역사적 삶을 이해하고 한국생활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여 보다 안정되며,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또한 정부에게는 사할린 한인에 대한 종합적 문제해결을 위해 사할린 잔류 한인 문제, 미래세대 교육문제, 역사청산 소송 등의 문제에

대한 지원대책과 관심을 제기하고자 하다.


2)사할린한인의이주역사

 

(1)     "자유이민" 시기(1930 1938)

사할린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왔다. 1689 년 러시아와 청(중국)이 체결한 네르친스크 조약에 준하여 러시아는 거의 150 여년간

연아무르지역을 떠나야했다. 사할린은 오랫동안 러시아의 관심영역 밖에 있었다.

19 세기가 되어서야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시모다 조약(1855)과 상페체르부르그조약(1875)에 따라 사할린은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왔다.

1904–905 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는 패하고 1905 년 8 월 23 일(9 월 5 일)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북위 50 도 이남의 사할린 영토를 일본에게

양보했다. 이렇게 섬의 영토는 두 개로 나뉘고 남부는 일본에게 넘어갔다.  쿠릴열도와 남사할린을 받은 일본 정부는 그곳에 행정국과

 자체통치조직, 선거체계를 만들었다. 쿠릴열도는 홋카이도 총독체계로 편입됐다.  1907 년 남사할린 지역에 가라후토 총독체제가 수립되고

 1908 년에는  도요하라시(블라지미롭프카, 1946 년부터  유즈노–사할린스크)가 중심이 됐다.

새로운 땅을 얻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들도  조선인들도 가라후토에 갔다. 1910 년 한일합병 이후 일본 식민자들은 가혹한 군사정치체제를

수립하고 경제팽창을  진행하고 국내 또는 국외에 있는 위험한 군수기업들에서 노예처럼 조선인을 부렸다. 일본식민자들의 억압과 박해,

계획적인 대량학살 정치는 다수의 조선인들을 외국으로 망명하게 만들었다.  이들 중에서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 또는 가족과 함께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1904–1905 년과 1945 년의 2 차례에 걸친 러일간 무력 충돌은 사할린 한인들의 영혼과 심장에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정책은 주로 토지몰수였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행정자원을 끌어들였다.  1912 년 조선

총독부는 부동산의 소유자가 지정한 기간내에 자기소유의 토지를 신고하고 일본재정관청이 그 소유권을  확인할 전권을 가지고  있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1910–1918 년 토지대장조치를 실행한 결과 약 천만정보(992만 헥타아르)의 경작지와 천백이십만 정보(1111 만 헥타아르)의 임야가

일본제국의 국유지로 추산됐으며 일본지주들의 소유로 넘어갔다. 생존수단을 잃은 농민들은 소작인이나 일용노동자가 됐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마저 박탈당한 농민들은 산으로  올라가 개간농업을 하거나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해야했다. 1912–1931 년간에 생산량이 6배 이상

증가한 쌀을 일본으로 대량 수출했기 때문에 주민1  인당 쌀의  소비량은 형편없이 감소했다.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48–50%가 유출됐고 매년

몇 백만 섬의 쌀과 콩을 착출했다. 1931 년에 이르러서는 2백만 이상의 농민이 연생산량의 50–80%에  달하는 높은 소작료 때문에 파산했다.

일본 식민 체제에서 조선인에 대한 동화 정책은 모든 영역에서 진행됐다. 최초시기에는 주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식민자들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인종적 동일성에 대한 이론을 확산시켰다.  그런 다음 조선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  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조선인들을 일본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름과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 정책은 민족 의식과 한국 문화, 자주성을 없애는 데 방향을

맞추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 민중을 순응하는 식민지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식민지권력에 대한 모든 비판과 선동, 파괴공작을 없애기 위해 폭동, 소요, 무질서, 언론, 일본 황실 권위 훼손, 정치범죄, 사회질서유지

등에 관한 온갖 종류의 법령과 명령이 만들어졌다. 1930 년대 초 농민들은 기아의 한계에 이르렀다. 유일한 탈출구는 외국으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은 타지 – 만주(19%), 시베리아(2.88%), 일본(16.85%)으로 떠났다.

사할린에 조선인이 처음으로 유입된 것은 1870–1880 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1897 년의 제1 차 전체 러시아 인구조사 기록으로 조선인은 67

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를 거쳐 사할린으로 이주한 이들 조선인들은 1920 년대 초반에는 러시아령인 북부사할린에

1400 여명, 일본령인 남부사할린에 1000 여명이었다. 이때만 해도 사할린의 조선인들은 식민지 조선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일자리를

찾아 온 자발적 이주민들이었다. 이후에도 조선인 이주자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는데 북부사할린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소련 정부에 의해 1937 년에 1187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기도 했다.

여기서 고려인이라는 아픈 역사의 단면이 그려진 이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 국가에서 고려인이란 독립국가연합(CIS)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통틀어 말하는데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아픈 상처의 하나로 치부되고 있다. 먼 곳의 이야기로 치자면 918 년 세운 고려의

옛 이름을 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조선에서 먹고 살기 위해 러시아로 이주했거나 나라를 잃어버렸을 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로 건너와 민족정신을 일으켜 세웠던 한국인의 선조를 말한다. 즉 조선의 먼 나라가 고려로 통용됐기에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이탈리아 노예로 팔려간 조선인 청년의 케이스와 똑같은 이름으로 불렀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사할린 한인들은 고려인과

차별을 두고 있다. 이유는 중앙아시아 고려인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편견인데 온전히 일제 강점기 때 끌려왔던 피해자로 부류해 고려인이 아닌

지구촌 한인사회의 일원으로 취급하기가 더 지배적이다.

그렇지만 애국심이 투철한 중앙아시아 고려인과 얼어붙은 땅 동토에 끌려와 반평생을 피해자로 살아온 1 세 사할린 한인들의 차이점에 그 어떤

정의를 논하기는 딱히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듯이 사할린이주의 유입 경로도 러시아이주에서

시작되고 그 이후 사할린이 자원보고로 알려지자

취업차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1905 년

남사할린이 일본에 넘겨 지자 일본은 전쟁수급의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조선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일본의 징집제가 도입되고

사할린에 모집이 시작한 시기가 1938 년대부터이다.

가장 절정에 달했을 때가 1939–1944 년이고 해방

전까지 모집이 자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1905 년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하고 1937 년 만주전쟁에서의

군대보장을 위한 산업에서 비롯된 노동력 부족을

빌미삼아 1939 년부터 조선에서도 강제모집을

강행했다. 일본은 사할린을 접수하자마자 철도를

부설하고 1907 년 화태청(가라후토)을 승격하고

식민지 개발을 급속도로 이어나갔다. 철도는 물론

도로 및 비행장 건설 등에 총동원령을 내렸고 특히나

천연가스와 석탄매장량이 많아서 자원개발에

"북진정책"을 펼쳐 사할린을 전쟁수급지로 개발해나갔다.

 

 일본으로의 재일한인의 이주와 정착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통치라는 역사적 조건하에서 진행됐다. 비록 이주의 형태와 동기는 다르더라도

식민지 통치시기에 강제로 끌려와서 착취당했다는 인식은 재일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모국과 거주국과의 관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일강제합병(1910)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882 년에 4 명, 1909 년에는 790

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은 유학생이고 소수가 외교관, 정치적 망명자들이다. 1907 년에 도쿄 유학생은 그 수가

거의 5백 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일본이 서구문명을 통하여 성공한 이유를 찾고자 했다. 이들은 학업을 마치기까지의 일시체류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하의 재일한인과는 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한일강제합병 이전에는 일본이 대부분의 산업에서 외국인노동자를 금지했기 때문에

조선 노동자의 유입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 당시에도 각종의 육체노동자들이 도일한 것으로 알려져 일본경제가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 조선인 노동력을 도입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일강제합병으로 인해 조선인은 일본제국의 신민이 됐고 외국인노동자 입국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1914 년 제1 차 세계대전의 파급효과로

활황을 맞은 일본으로 일거리를 찾아 건너가기 시작했다. 일본 자본가들은 국내의 노동력 부족과 임금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저임금의 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했다. 그들은 모집 브로커를 조선 지역에 파견하여 노동자 모집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재일조선인의 수는 1915 년의 3917

명에서 1920 년에는 30,189 명으로 5 년 만에 8 배가량 증가했다.

1920 년대에 들어서 도항하는 조선인이 급증한 것은 일본에서의 유인요인도 있었지만 조선에서의 유출요인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한일강제합병 후 일제는 강압정치를 시작했고 이때 식민지 경제정책의 중심이 된 것이 토지조사사업(1910 년 3 월–1918 년 11 월)이었다.

일제는 토지의 소유권을 실제로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인정한 것이 아니고 그 토지와의 연고관계를 신고한 사람에게 인정해 주는 신고주의를

채택했다. 신고하지 않은 토지는 일단 "국유"로 편입된 후 일본인 지주 및 토지회사에 불하됐다. 당시 대다수의 농민들이 문맹이었고 근대법에 무지했기

때문에 자작농이라 하더라도 토지소유관계를 신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많은 농민들이 지금껏 경작하던 토지를 잃게 됐다. 이로 인해 1920 년

조선인 농가 중 자영농이 23%, 반자작이 37%, 소작농이 40%였던 것이 1940 년이 되면 각각 18%, 23%, 59%로 바뀌었다. 이렇게 몰락한 농민들은

농촌에서 과잉인구로 집적되어 소작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악순환을 이루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국내의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거나

산간벽지의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해외로 유출됐다.

1920 년대에 일제는 조선에서 산미증산계획을 실시하여 조선의 쌀생산은 증가했지만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욱 많아 조선의 식량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이농인구가 증가했으나 국내의 경제발전 수준이 낮아서 이들을 임금노동자로 수용하지 못하자 상당수가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려

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경제와 사회여건은 결코 조선인이 이주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1923 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에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넣는다고 믿은 일본인 민병대원들에 의해 6천  명 가량의 조선사람들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1929 년의 세계 대공황 이후

일본경제는 불경기와 실업문제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1931 년에 국내 실업자수는 3백만 명에 달했다. 일본의 실업문제가 심각하자 조선 총독부는

일본 내무성의 요청에 따라 1925 년 8 월에 도항저지제를 실시하여 조선인의 도항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도항하는 조선인의

수가 줄지 않고 증가하여 1920 년의 3.0189 명에서 1930 년에는 298,091 명, 1935 년에는 62.5678 명, 1940 년에는 119.0444 명, 1944 년에는

193.6843 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조선에서의 생활고가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의 생활고를 피해 일본으로 도항한 사람들은 농촌에서 유출된 과잉 인구의 일부분에 불과했고 지리적 관계로 일본에 도항한 사람들은 경상도,

제주도, 전라도와 같은 남한지역 출신들이 주류였다. 1923 년의 일본 내무성 경보국의 조사에 따르면 이 해 출신지가 알려진 도항자 72,815 명 가운데

경상남도 출신이 39%, 전라남도(제주도 포함) 출신이 25%, 경상북도 출신이 16%를 차지했다. 지연과 함께 친분관계도 도항에 영향을 주었다.

1927 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이주자의 73%가 친척 또는 친구를 통해서 일자리를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도항이 일본과 조선을 연결하는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조선에서 같은 지역 출신은 일본에서도 같은 지역과 산업에 집중되는 경향을 띠었다.

일본왕의 칙령 №33에 따라 1907 년 4 월 일본 정부가 만든 가라후토 총독체제는 이  영토에서 가능한  최대량의 천연자원을 유출하는 조치들을

실행시켰다. 예를 들면 1924–1934 년 8억 2190만엔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산업생산품이 섬의 외부로 유출됐다. 새로운  영토에서 가장

  수입이 좋은  산업은  무단으로 벌채한 목재의 생산과  가공이었다. 1906–1934 년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약 6천 8백만 입방미터의 목재를 생산했다.

목재의 가공이 일본제국  사할린 경제수탈의 중요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제지공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15–1934 년 일본인들은

202만 6천톤의  셀률로오스와 191만 톤의 종이를 생산했다. 일본지배 초기에는 주요 탄전들이 법으로 채굴을 금지시킨 "예비용"이라고 공표됐다.

하지만 셀룰로오스제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1920 년대에는 이 매장지들의 개발금지를 일부 폐쇄하고  1930 년대 초에는 이미 20 여개의

임산자원채굴기업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30 년대  중반부터는  남사할린  전체에서  30개에 달하는  새로운 탄광개발을  시작했다. 전시상황으로

1937 년에는 석탄수출이 지역소비보다 많아졌고 그 이듬해에는 계속 증가했다. 1941 년에는 4백만 톤 또는 가라후토 지역 연간생산량의 62%라는

가장 커다란 수치에 도달하게 됐다. 섬의 천연자원 개발을 위해 "오지세이시(임산업)", "미쓰비시"와 "미쓰이(석탄사업)"등과 같은 독점기업들의

혹독한 경쟁이 진행됐다.

1932 년 이후 일본경제의 군수화가 시작됐고 통화팽창 과정이  강화됐다. 일본제국은 자신의 영향력을 아시아대륙의 내륙으로 확장시키려고 노력했다.

1931 년 만주를 점령하고 1937 년 중국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소비에트와 몽골의 국경지역에서 도발행위를 조직했다.

1941 년 12 월 7 일 일본은 태평양과  인도차이나, 버마에서 미합중국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1937–1938 년  가라후토에서는

시수카(현 포로나이스크)와 도요하라(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군용비행장 건설을 시작했고 1936 년에는 도요하라 – 시수카 간 철도건설이 완료됐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군사 및 경제적 상황을 첨예화시켜 노동자원의 급격한 증대를 필요로 했고  이는 한반도에서 충당했다.


(2) 강제이주시기(1938– 1945)

일본은 1931 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 년 중일전쟁을 개시하면서 전선확대에 따른 병력과 일본 본토의 전시산업을 지탱할 노동력 확보가

필요하게 됐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1938 년 4 월에 국가총동원법을 발표하고 1939 년 7 월에 노동력 동원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1939 년 9 월에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 취급 요강"을 발표하여 강제연행이 시작됐다. 형식은 "모집"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제연행이었다. 탄광, 광산으로의

조선노동자 강제연행이 시작됐고, 후에 철강, 토목산업 등 그 외의 모집분야에도 확대됐다. 1941 년 태평양전쟁을 시작함에 따라 국민징용령을 1944 년

공포했다. 그러나 이미 그 전부터 군과 관련된 곳에 조선인 노동자징발과 학도징용이 이루어졌고, 이에 1939 년부터 1945 년까지 강제연행된 인원은

724,787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군인, 군속 365,263 명을 합하면 조선인 강제연행자 수는 100만 명을 넘는다. 여기에 추가하여 여성자원봉사대의

이름으로 20만 명의 여성이 동원됐는데 이 중 8만 명 가량이 소위 "종군위안부"로 동원됐다.

초기에 일본식민권력은 과대한 약속을 하면서 "달콤한 말로" 자원 모집을 하는 형태로 이주를 진행했지만 이것으로는 필요한 인적자원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38 년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총동원"에 대한 법령 №55를 공표했다. "조선과 타이완, 가라후토에서

전체동원령의 실행에 대한" 1938 년 5 월 4 일자 일본왕의 칙령 № 316에 준하여 1939 년 9 월부터 한국인들의 대규모 강제동원이 시작됐다.

같은 해 "국민직업능력신고"와 "노동동원"에 대한 법령이 통과됐고 이에 준하여 조선 총독부는 1940 년과 1944 년 가라후토와 태평양 남서부 지역의

도서에 파견할 젊은조선인 남성과 여성들에 대한 총동원을 실행시켰다. 30  여년간 사할린 한인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일본인 변호사 다카키 케니치의

말에 따르면 제2 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 약 2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송출됐고 그들의 약 6만 명이 가라후토로 보내졌다.

남사할린에서 조선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과정이 계속됐고 조선인에 대한 강제이주와 동원 작업이 계속됐다. 최고 절정은 1939–1945 년이었다.

식민화의 촉진을 위해 일본은 "북진" 정책을 진행했다. 천연 자원의 개발은 많은  인적 자원을 필요로 했다. 조선에서 값싼 노동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쓰비시", "미쓰이", "오지" 등의 기업들은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들은 일년짜리  계약을 체결하고 다양한 조세감면을

제공하고 높은 임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예를 들면, 1930 년까지 "가와카미"(현 사할린 시네고르스크) 탄광에는 약 500 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있었다.

1920 년 최초의 가라후토 주민 조사에 따르면 이곳에는  조선인 934 명이 살고 있었고 그중에서 도요하라 416 명, 마오카(현 홈스크) 176 명, 시스카

153 명, 토마리오루(현 토마리)  97명,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 92 명이었다. 북사할린에 대한 일본의 한시적 점령(1920–1925)이 끝난 후  다수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과 함께 남사할린으로 철수했다. 이것은 "자발적 징집" – 주로  한국의 남부에서 독신 또는 가족과 함께 젊은이들이 왔었다.

  하지만 1937 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징집의 성격은 매우 달라졌고 강제 이주적  형태를 띄게 됐다.

우선 일제가 조선인 징용, 즉 강제동원을 실시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또 어떤 배경(목적)에서였을까? 한국내 역사학계에 따르면, 조선인 징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7 년 중일전쟁 이후부터이며, 그 목적은 부족한 인적 자원 보충차원에서였다. 1937 년 말 일제는 당시 중국의 수도 남경(南京)을 함락하면

조만간 전쟁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장개석 국민정부가 "백년항전"을 선언하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이에 일제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인력과 물자 동원을 위해 1938 년 4 월 1 일 법률 제55 호로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공포했다.


 

이는 일제말기 전시 동원체제를 총괄하는 기본 골격이자 각종 동원의 법적 근거가

됐다. 그런데 국가총동원은 일본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을 비롯해 대만

·사할린 등 식민지 전역에도 적용됐는데, 조선에서는 한 달 뒤인 5 월 4 일자로

시행됐다. 이에 근거하여 일제는 '국민징용령'을 비롯해 '가격통제령', '조선징병령',

'식량관리령','농지관리령' 등을 잇따라 발포했다. 이로써 조선 총독부는 사람이면

사람, 물자면 물자, 토지면 토지, 즉 그들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경우 그 어떤 것이든

마음대로 조선에서 동원하고 또 징발할 수 있게 됐다. 당시 '국가총동원법'은 모든

법률에 우선하여 적용됐고 또 이를 어길 경우 형벌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정까지 두고

있어서 조선인들에게는 사상범 탄압용인 '치안유지법'과 함께 가장 두려운 법이었다.

이같은 연유로 한국내 역사학계는 물론 관련 국가기관에서도 조선인 강제동원

시점을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된 때를 기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등을 위해 2007 년에 제정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 제2 조(정의) 1 항은 '강제동원 희생자'를 '1938 년 4 월 1 일부터

1945 년 8 월 15 일 사이에 일제에 의하여 군인·군무원 또는 노무자 등으로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그 기간 중 또는 국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이 동원의 실행은  편의상 3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1938년 4월–1942년 2월)는 징집(모집)의 시기이며 일본기업들이 점령권력과

지역 관리들이 지원으로 실행시킨 '자발적 강제' 동원의 시기이다.

▲[징용대상자가 징용장을 받는 모습. 뒤편에 '국민징용'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국가기록원 제공)

 총동원 계획에 준하여 각 청구 기업에 대한 배당이 이루어졌다. 조선 농민들의 참기 힘든 생활 조건이 젊은 농민들을 징집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거절하는 경우 가족 전체가 불신자 명단에 들어가게 됐었다. 2단계(1942년 2월–1944년 9월)는 '국가의 조직적

징집(관 알선)'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은 군수사업과 관련된 제철기업들에 노동력이 매우 부족한 것을 경험하게

됐다. 1942년 2월 20일 '한국인의 일본 이주 소개서'가  발행됐다. 이 문서는 동원의 강제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1942년 2월 23일  일본 정부는

조선인 노동자의 사용에 관한 법령을 받아들이고 이에 준하여 정부 기관들은 파견하기 위한 노동자들을 직접 소개한다. 1941년 6월 괴뢰

집단인  "조선 노동 연맹"을 설립하여 공개적으로 대량의 '한국인 사냥'을 시작했다. 형식적으로 정부 기관의 소개를 거절할 수  있었지만 이

소개서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은 강제 후송을 당했다.

3단계(1944년 9월–1945년 8월)는 조선인들의 운명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기로 '노무(징용)'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됐다.  1939년 공포된 '국민 노무에 대한' 법령은 1944년 9월부터 한반도로 확대된다. 1944년 2월에는 국민 노무에

대한 명령이 공포되어 총동원이 실행됐다. 이것은 1944년까지 한국인 징집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계획했던  30만명을 다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실행된 것이다.

이것은 조선과 가라후토의 근로 대중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기였고 나라 전체가 기아의 배급 상태에 있었다. 조선 총독 코이소 쿠니아키는

1943년 5월 도쿄의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조선은 지금 소나무껍질과 쑥, 다른 풀들로 연명하고 있다". 이 시기 사건의

목격자들의 몇 가지 증언을 들어보겠다. "새고려신문" 편집국에서 일한 사할린 한인 젊은 세대 대표와의 만남에서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회 전 노인회장 우정구(1934년생)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할린으로 가는 노동자를 징집한다는 것을 알고 1942년 우리 아버지는 스스로 신청을 하고 혼자 떠났다. 1930년대 우리 부모님은 한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고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적은 토지를 소유한 가난한 농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사할린에서

돈을 벌어서 집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나를 학교에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년 후  9살 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으려

사할린으로 갔다. 아버지가 광부로 일하시는 가와카미 탄광에 도착해서 우리는 천막에서 살기 시작했다".

가라후토로 징집된 조선인들의 처지는 끔찍했다. 대부분 군용 비행장과  철도 건설,

탄광, 목재가공 등 고되고 위험한 조건에서 일을 해야 했다. 사할린주한인협회 전

노인회장 故 박해동의 이야기는 앞서 말한 내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라고 할 수

있다:  "1943년 1월 나는 고향 마을에서 잡혀 부산으로 이송됐다. 경찰서에서 죄수

작업복으로 갈아입혔다. 일주일간 우리는 창고에 같혀있었다. 와카나이에서 배에

태웠다. 한국인 42명은 가장 낮은 선창의 철제 바닥에 짐꾸러미처럼 던져젔다.

캄캄한 밤에 오도마리 항구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나이부치(현 브이코프)

탄광으로 실려 갔고 즉시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우리는 석탄을 캐기 위한 기계에

불과했다.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서서 밥을 먹고 교대를 위해서는 광부  1인당 2톤을

캐야했다. 안정 장치는 전혀 없었고 광부들이 붕괴 사고를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1940년대 탄광노동자들이 교육받는 모습(국가기록원 제공)]

최악의 생활 환경과 힘에 부치는 노동, 일본인 감독관과 그 조선인 앞잡이들의 천대로 인해 기아와 피로, 절망에 빠진 탄부들 중에 도망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붙잡혀 타고베야에 갇혔다. 일본과 가라후토에서 노동력을 이용하는 특성은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와 중세 시대에

널리 사용하던 일꾼들에 대한 박해를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착취의 가장 섬세한 형태 중의 하나가  '다코베야(또는 강고쿠베야)' 체계였다.

이것은 강제로 만드러진 노동자 기숙사의 종속 형태였다. 이것은 룸펜–프롤레타리아 징집을 통해 토지 건설 작업의 하청 회사들에 의해

조직됐다. 사할린 경제학박사 故 박수호는 다코베야의 발생을 설명하면서 "일본의 백과사전에서 다코베야는 홋카이도와 사할린 탄광에서

죄수들처럼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기숙사이다. 이 감금자들을 다코라고 불렀다"고 쓰고 있다. 다코는 강제노동을 위해 다코베야 수용소에

있던  감금자들이다. 만약 1886년 홋카이도 다코베야가 탄생하던 시기 다코가 정말 죄수들이었다면 1938–1945년 이들은 강제로 이송된

조선인들이었다. 코르사코프시 주민인 故 박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벌목장에서 일했고 우리는 나무를 베서 떠내려 보냈다. … 우리의 노동 조건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도주했다.

  붙잡힌 사람들은 반죽음이 될 때까지 구타 당했고 다코베야에 집어놓였다".

다코베야에는 가혹한 규율이 이었다. 일본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신체적 징벌을 가했다. 환자도 일을 하게 만들었으며 손으로 끌어냈다.

기준량을 완수하지 못하면 식사를 주지 않았다. 기준량은 다른 곳의 두배였다. 조선인들은 "한번 다코베야에 들어가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가장 고되고 위험한  구역에서 일을 했지만 다코의 노동은 전혀 보장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코는 항상

채무자로 남게되어 다코베야에서 평생을 남게되는 원인이 됐다. 다코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서도 안 되고 수갑을 채웠으며 질서와 규칙을

위반한 자는 가혹한 몽동이질을 당해 죽는 일도 다반사였다.

징용 대상자들에게도 군 입대자처럼 영서(令書), 즉 영장(令狀)이 발부됐다. 일본 본토의 경우 후생대신(厚生大臣)이, 조선에서는 일왕의

대리권자인 조선 총독이 발급했다. 초창기 징용은 조선인의 반발을 우려해 지원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신청자가 적어 필요한

숫자를 채우지 못하게 되자 총독부는 할 수 없이 동네별로 할당량을 정해 목표를 채우도록 강요했다. 당시 징용 영장을 받은 자는 지정된

사업장에 가서 복무하도록 돼 있었는데,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나 지역유지 등 힘있는 자들은 대부분 빠졌고,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서민들이 그 머릿수를 채우곤 했다.

한편 효율적인 노동력 동원을 위해 일제는 1939년 1월 7일자로 "국민직업능력신고령"을 공포했는데 조선에서는 6월 1일부터 시행됐다.

이어 그해 7월 일본 내무성과 후생성은 '조선인 노무자 내지(內地) 이주에 관한 건' 발표를 통해 조선인 노동자 강제연행의 근거를 마련했는데,

총독부가 9월 1일에 각 도지사 앞으로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취체요강(要綱)'을 통보함으로써 공식 발효됐다. 이 계획에 따라 조선

총독부는 단계별로 '모집'(1939.9–1942.1), '관(官)알선'(1942.2–1944.8), '강제징용'(1944.9–1945.8) 등으로 나누어 조선인 노무자 동원을

실시했다. 시기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 모두는 사실상 강제동원이었고, 또 노동력을 수탈했다는 점에서 흔히 '강제연행'으로 통칭되고 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하 노동자·군인·군속 등으로 강제 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는 1032,684명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배상 대상자인 사망자 숫자 21,919명(군인 6178명, 군속 15,741명)만 밝혔을 뿐 전체 강제동원 숫자와 명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간 국내에서 알려져 온 바로는 "한반도에서 600여만 명이 강제동원됐으며, 이들 가운데 70여만 명이 해외로 강제연행됐다"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지난 1990년 4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강제연행자 명부 일부를 공개했는데, 그 숫자는

71,476명으로 실제 인원수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결정적이고 구체적인 자료가 발굴된 것은 1991년초의 일이다. 동경제대 재학중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故 정기영씨(전 "1.20동지회" 부회장)는 학도병 출신자들의 모임인 1.20동지회 "회보" 제32호(1991.1.20)에서

1947년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라는 문건을 입수해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노무자 송출 등 조선인 징용자는 총 612, 6180명으로, 당시 조선인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이 가운데는 도내동원(1938–1945)이 536만여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관(官)알선"(1934–1945) 422,397명, 현원징용 260,145명,

국민징용 43,679명, 군요원 33,861명 등으로 나타났다.(여기에 징병, 학도병, 일본군위안부까지 합칠 경우 전체 강제동원 피해자 숫자는 거의

800만명에 육박). 이들 가운데 "도내동원", 즉 조선 내 동원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일본 본토를 비롯해 사할린, 동남아, 심지어 남양군도까지

강제로 끌려갔다. 일본으로 끌려간 징용자들의 경우 대개 탄광이나 군수공장 등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됐으며, 군속으로 차출된 경우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 지역의 군사기지 건설이나 철도 공사에 동원됐다.

특히 군속의 경우 전후 재판에서 B·C급 전범(戰犯)으로 몰려 희생되기도 했다. 특히 사할린 징용 조선인들의 경우 냉전으로 인해 한동안

고국으로 돌아올 수도 없었으며, 이마저도 살아남은 자들의 경우이며 죽은 자들은 아직도 타국땅에서 고혼으로 떠돌고 있는 실정이다.

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성노예"라고 일컫는다면 징용 피해자들은

"노동노예"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극도로 비참한 작업환경에서 힘든 강제노역을

감내해야 했으며, 게다가 이들 대다수는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재일사학자

故 박경식이 1965년에 펴낸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은 일제하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는 일본 북해도에

끌려가 탄광노동자로 강제노역을 당한 김영선의 생생한 증언이 실려 있다.

그 중 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 보고 싶어" 조선인 탄광 징용노동자가 지하 갱 벽에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쓴 글씨ⓒ 자료사진](국가기록원 제공)

"아침에는 4시에 일어나 5시 반에 갱에 들어갔다. 오후 7–8시가 되어야 겨우 숙소에 돌아왔다. 9시 정도가 되어 잠이 드는데 방에 들어가면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모두 외출하는 것을 막아 마치 형무소와 같았다. 아니 훨씬 혹독했다. 한 달에 세 번 쉬었지만 밖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방에서 빈둥거렸다. 하루에 5엔 준다고 해 놓고는 실제는 3엔도 주지 않았다. 3엔을 받아도 갱을 들고 날 때 신는 신발 빌리는 값

1엔15전, 짚신값 30전, 이부자리 값 35전, 식비 1엔20전, 이밖에 담배값을 빼고 월말 정산하면 1–2엔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히려 빚을

지는 일이 많았다. 그 때 신을 것이 없어서 갱을 들고 날 때 신는 신발 위에 짚신을 신었는데, 이것도 하루밖에 신지 못해 맨발로 일할 때가

많았다. 식사는 아침에는 소금국에 콩밥 한 공기 밖에 없었다. 점심 때 먹을 도시락을 아침에 먹어 점심을 굶었다. 간부들은 흰쌀밥에 된장국,

생선반찬으로 식사를 했지만…."

김씨의 경우 하루 14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휴식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했으며, 일과 후에도 "우리"에 갇힌 가축처럼 지내야만 했다.

당시 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은 죄수의 유치장 노역에 버금갈 정도의 힘든 노동에다 최악의 주거환경과 불량한 식사 등 개·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강제징용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작업장에서의 탈주나 작업

거부는 물론 적극적으로는 파업이나 폭동 봉기로 맞서기도 했다. 또 더러는 작업장 내에서 항일조직을 결성하여 비밀리에 운동을 전개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 내무성 조사에 의하면, 1939–1942년 사이에 일본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가운데 257,907 명이 탈주를 시도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1)    이중징용(전환배치)

최근까지 알려진 바로는 사할린 강제징용수가 2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할린에 징용된 조선인은 쿠릴열도까지 동원됐고 건설, 도로, 탄광

등에 남사할린 전체에 투입됐다. 허나 탄광에 동원된 1 세 조선인들의 정확한 동원인원이 분명치가 않다.

가장 많이 연행됐을 때가 6만 명이라고 했다가 탄광 전환 혹은 재징용되어 일본 본토로 이동한 이후로 2만 명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광부로

이중징용에 동원됐던 인원은 북쪽을 포함해 조선인 3190명이 사할린에서 일본내지로 동원됐다. 이것이 이중 징용된 조선인 탄부이다. 이는 조선

총독부 자료에도 일본내지, 남양군도 등을 제외한 사할린에 조선인 노무자는 1.6114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중 석탄 채굴에 종사한 노무자는

10,500명에 해당됐다. 나머지는 산림, 제지, 수산, 토목건축에 투입됐다.

일본 정부는 남사할린을 점령한 이후 자원개발과 확보를 위해 많은 노동력을 투입했다. 남사할린에 투입된 조선인의 수는 점차 늘어나

1920년대에는 중국인의 수를 상회했다. 직종별로는 탄광종사자가 다수여서 1939–1943 년간 집단이입노무자 1,6114 명 가운데 석탄산 종사

조선인 노무자는 65%(10,509 명)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인다. 그 외 토목건축현장과 삼림장 및 제지공장, 수산업, 농업에 종사했다.

일본 정부가 남사할린 소재 탄광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는 1930 년대 이후이다. 채탄에 관한 조사 작업을 거쳐 수송을

위한 인프라(철도, 도로)가 마련된 이후 화태청의 정책적 지원아래 1940년부터 거대 기업이 진출했다. 이후 1945 년까지 남사할린에서 가동한

탄광은 56 개소였는데, 이 가운데 1940–1945 년간 조선인이 취로한 탄광은 36 개소이다. 지역적으로는 에스도로(현 우글레고르스크)와 마오카

(현 홈스크) 지청 관하인 서안 지역이 가장 다수이고, 가미시스카(현 레오니도보) 지청 관하인 동안 지역이 뒤를 잇고 있으며, 중부지역인

도요하라(현 유즈노–사할린스크) 지청 관하 탄광은 4개소에 그쳤다. 전시 인력동원에 의해 1940 년부터 조선인 탄광부의 숫자는 증가했으나

일본 정부의 자원 확보 정책에 따라 조선인이 소속한 탄광의 수는 감소되는 현상을 보였다.

일본은 1942 년경부터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 등 인적·물적 자원의 통제 및 운용에 관한 법적 근거에 의해 노동력의 전환배치를 했다.

1944 년에 사할린의 탄광노동력을 일본 본토로 이동한 사례도 전체적인 인력 재배치 작업의 일환이다.

남사할린 조선인 탄광부의 전환배치는 1944년 8월 11일 각의결정 "화태(樺太) 및 쿠시로 탄광근로자, 자재 등의 급속전환에 관한 건"을 근거로

실시됐다. 이 조치로 휴·폐광된 탄광은 채탄규모가 크고, 탄질도 우수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문제와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휴·폐광 조치됐다.

화태청은 남사할린에 가동 중인 탄광에 대해 세 가지 보조금을 지급했으나 보조금 지급 조치에 비례해 출탄실적이 저조한 탄광이 있었으므로

탄광정리가 불가피했다. 출탄실적이 우수한 탄광의 경우에는 수송문제가 배경이 됐다. 남사할린 탄광에서 생산되는 석탄의 대부분은 일본

본토에서 사용됐는데, 1942 년 후반부터 선박부족과 연합군 공격으로 인해 수송선의 피해가 늘어나자 석탄적취선의 배선이 급격히 줄어들다가

1944년 8월에는 배선중단 상태를 맞게 됐다. 이로 인해 수송하지 못한 석탄의 저탄율이 급증하자 자연발화의 위험이 있었고 정부의 재정부담

문제가 대두됐다. 당시 일본 정부는 저탄된 석탄에 대해 매입가격보상금을 지급하고 융자 및 차입금의 이자 보급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 비용이 계속 늘어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배경으로 인해 탄광을 휴·폐광하고, 노동력을 일본 본토로 전환배치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게 됐다.

일본 각의결정에 의해 1944년 9월 태평양에서 군사행동이 활발해졌을 때 남사할린 지역에 가동 중이던 26 개소 탄광 가운데 서해안 탄전지구의

14개소 탄광이 정리되고 인원(조선인 3000 명, 일본인 6000 명) 및 생산자재가 일본 본토로 긴급 배치됐다. 조선인들은 1944년 8월 19일부터

3 일간 징용령을 받고, 8 월 25 일부터 9 월 16 일 까지 일본 본토에 입항했다. 이들은 후쿠오카 17개소 탄광, 후쿠시마 1 개소 탄광, 나가사키

4 개소 탄광, 이바라기 4 개소 탄광 등 총 4개현 26개소 탄광으로 전환배치됐다. 45명은 이바라기 탄광으로 후송되고 남은  3000명은 큐수

탄광으로 갔다. 작업장 배치 원칙은 동일한 계열 회사이다.

그러나 수행과정에서 약간의 변경이 이루어졌다. 당초 3022명이 징용령을 받았으나 입산한 조선인은 3191명이고, 전환배치 지역도 후쿠오카

입산 예정 조선인 가운데 일부가 나가사키와 이바라기로 변경 배치되는 등 변동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167명의 배치 작업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 탄광지역

징용수(명)

일본 탄광지역

징용수(명)

안베쯔

134

모로쓰무연탄광

27

고난

148

도로 미쯔비시

204

니시사꾸탄

378

도로 가네보

667

나요시

145

다이헤이, 스토루(덴나이)

599

도요하타

148

도로 하꾸자와

348

산부쿠  무연탄광

370

합계

3,190

기타고자와

22

 

 

▲[사할린 한인  이중징용 일본 내지 탄광 배치표] 

급작스러운 전환배치 과정은 "가족원호" "징용원호"를 내세운 회유와 경찰관의 승선이라는 감시 및 통제를 통해 진행됐다. 이들은 사할린에서도

열악한 노동 상황 아래 놓여 있었으나 일본 본토 배치 이후에는 노동조건이 더욱 열악하여 사고사도 빈번했다. 그러나 전환배치의 가장 큰

후유증은 가족 이산이다. 전환배치된 조선인 노무자들은 대부분 가족을 남겨두고 떠났다. 가족을 동반한 사례는 후쿠시마 지역에 입산한 조선인

149명과 가족 125명이다. 이들은 가족을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족수송계획은 문서상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사할린에 남은 가족들은 어떠한 삶을 살게 됐는가?  사할린에 남은 가족들이 겪은 전환배치의 첫 번째 산물은 생활고,

두 번째 산물은 민족적·사회적 차별, 세 번째 산물은 가정의 해체로 인한 후유증이다.

 가장의 부재로 유소년기를 결손가정에서 보내야했기에 사회적 차별을 당해야 했고, 자신의 뿌리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도 겪어야 했다.

해방을 맞아 일본에서 일하던 조선인노무자들은 가장이 가족을 만나기 위해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일본에서

고향으로 귀국을 함으로써 평생토록 만나지 못하거나 수십 년이 지나서야 해후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귀환의 방향을 가족이 있는

사할린이 아니라 한국으로 잡았던 이유는,  첫째, 당시 여건이 사할린으로 돌아가기 어려웠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할린 상황에 대한 정보 부족

문제가 있다. 사할린으로 돌아간 소수의 조선인들은 노동의 후유증으로 귀환 후 조기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한국으로 귀환한 경우에도 가족 이산의 아픔은 계속됐다. 전란의 혼란 속에서 가족을 사할린에 남겨두고 고국행을 택해야 했던 사람들은 사할린과

연락을 시도하거나 가족과 재회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언제까지 막연한 기다림만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극소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고, 일부는 노년에 가족과 재회했으나 대부분은 고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다가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용어에 대해서 살펴보면, 일본의 연구가 "재징용", "전환배치", "현원징용" 등을, 한국내 연구는 "이중징용"이라고 하여 유가족회가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당시 인력동원의 재배치와 이동이 빈번하게 시행됐고,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조치와 관련한 공식적인 용어인

"전환배치" 보다는 "이중징용"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전쟁이 긑날 때까지 이들은 사할린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만날 수가 없었다. 그  광부들의 자녀들의 회상을 인용해 보면, "이중징용"이라는 2차례

강제 동원된 한인들의 사할린 사회단체 대표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진길(1944): "아버지의 이름은 소자근(1905), 어머니는 이점순(1917)이다. 1942년 아버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제 동윈을 당해서 도로 탄광

(현 사할린주의 샤흐초르스크)로 이송됐고 그런 다음 1944년 다시 큐수 탄광으로 동원됐다. 나는 아버지가 떠나고 난 3개월 후에 태어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임태환(1934): "내가 7살이 됐을 때 나의 어머니는 아이들  둘을 데리고  토요하타 탄광(현 사할린주의 레소고르스크 마을)에 강제 동원된 아버지를

찾으려고 사할린에 갔다.  이때는 중일전쟁의 절정기였다. 그래서 1944년 9월  아버지는 이바라기 탄광(일본)으로 이송됐다. 가족은 사할린에 남겨졌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는 우리가 모두 전쟁 중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갔다".

하경수:  "나의 아버지 하인준과 삼촌 두명은 사할린 "미쓰비시"사의 도로 탄광으로 강제 이송됐다.

1944년 10월 아버지는 다시 일본의 큐슈 탄광으로 동원됐다. 사할린에 가족과 할머니, 숙모가

남았다. 1945년 4월 여동생이 태어났다. 가장이 없어서 여자들과 아이들은  굶주렸고 여동생이

태어나고 한 달반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1945년 전쟁이 긑나고 아버지는 아버지처럼 두

번이나 강제 동원된 사람들 세명과 함께 밀수업자들의 배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할린에 돌아왔다. 1988년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친척들의 초청장을 받았지만

그 다음날(9월 29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와 같이 전환배치는 해방 이후 새로운 가족 이산의 아픔을 남겼다. 그러나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은 단지 개인적으로 한탄하거나 자책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원인 및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두고 온 아내와 세 아이들 일본 큐슈 후쿠오카현 치쿠호(筑豊) 탄광에 강제연행돼 혹사당한

끝에 사망한 한국인 노동자의 품에서 나온 가족사진ⓒ 독립기념관 소장]


 

(4) 사할린한인의대량학살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왕은 라디오로 일본의 패전을 공포했다. 이를 들은 일본인들은 죄없는 조선인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소비에트군의 공격병 중에 조선인들이 있다는 소문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사실 이것은 오로크, 길랴크, 니브히등의 사할린 토착민들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조선인들은 러시아인들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고 이 «개»들이

그들을 도울 것이다. 그들은 러시아의 간첩들이다. 그들을 죽여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죽였다. 

진격해오는 소비에트군을 피해 일본군은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앴고 쌀이며 다른 음식물을 진흙에 뿌리고 저수지에 석유를 부었다.

2012년8월15일 1940년대 소련 정부가 일본이 사할린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서를 포함해 사할린에 강제 동원됐

조선인들의 역사가 담긴 희귀 동영상과 사진 등이 공개됐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할린 조선인을 대량 학살했을 것이라는 소련 정부의 보고서가 입수됐다. 그동안 밝혀진 일본의 사할린 조선인

학살은 수십명 정도의 사례뿐이어서 이번 보고서 공개를 계기로 당시 일본의 만행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요구된다. 대량 학살의 증거와 함께

일제에 의해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1,2천 여명의 명부도 공개됐다. 한국 국가기록원이 러시아 사할린 국립문서보존소에서 입수해1946년 소련

정부의 인구 보고서 초안에는 사할린 에스토루 지역의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대량 학살 가능성이 언급돼 있다. 보고서 초안은 한 장짜리 질

나쁜 시험지로, 1945년 당시 현장을 누빈 러시아 민정국 인구조사담당자가 직접 손으로 썼다. 이 담당자는 보고서 초안에서 전쟁 전에는 사할린

에스토루 지역에 조선인이 1만229명 살았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는 5천332명으로 인구가 감소한 이유로 피난이나 귀환에 따른 인구이동과 함께

"일본군국주의자의 조선인 살해"를 꼽았다. 정확히 몇 명이 언제, 어떻게 살해됐는지는 문서에 나와있지 않다. 기록원 김갑섭 기록관리부장은

"사할린 지역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일본군의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을 많이 해왔는데, 그동안에는 근거가 없었다"면서, "일본군이 사할린에서

한인을 학살했다는 근거가 외국 정부의 보고서에 적시됐다는 점이 의미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나온 근거를 토대로 추가자료가 있는지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외대 방일권 교수는 "그동안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나 친척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증언 등 광범위한 민간인 살해

이야기가 떠돌았는데 기록이 없었다"며 "그러나 1945년 당시 현장을 누빈 소련 정부 민정국 담당자가 일본 군국주의자의 사할린 한인 살해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민간인 살해라는 비인도적인 처사가 광범위하게 이뤄졌다는 증거가 나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방 교수는 "일본군의 한인

대량학살에 대해 더 확정적으로 이야기하려면 재판이나 조사기록 등을 추가로 확보해야 할 것"이라며 "학살관련 기록은 남아있기가 어려운데,

정보계통이나 군계통에 관련기록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의 사할린 조선인 학살은 1945년 8월 21–23일 일본 헌병과 경찰이 사할린 가미시스카

(현 레오니도보)에서 남성 19명을, 미즈호(현 포쟈르스코예)에서 임신부와 어린아이를 포함해 27명을 무차별적으로 해한 사례 정도가 있다.

가미시스카 사건 당시 일본 경찰은 조선인들을 경찰서에서 총살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경찰서에 휘발유을 뿌리고 불을 지른 뒤 퇴각했다가

다음날 아침 현장으로 돌아와 타지 않은 시체를 찾아 석탄더미 위에 던져 완전히 태우는 등 잔학한 면모를 보였다.

가미시스카에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려 대한민국에서 오는 서울시 주민 故김경순의 말이다:  "1945년 8월 18일 가미시스카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인 18명을 천막에 넣고 산채로 불을 질렀고 거기에 아버지 김경백(54)과 오빠 김정대(18)가 있었다. 사할린의 북쪽으로부터

소비에트 군의 공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 장교들이 한국인들을 소비에트군의 첩자라는 죄를 씌워 헌병대로 끌고 갔고 재판도 조사도 없이

천막에  넣고 불에 태워 죽였다".

크. 가포넨코가 또 다른 비극적인 사건을 이야기한다: "1945년 8월 20–23일 일본인들이 미주호촌에서 27명의 한인 주민들을 칼로 찔렀는데 그들

중에는 여자 3명과 아이들 6명이 있었다".

이는 소련군과 KGB 수사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한편, 국가기록원은 이날 사할린 한인 관련 희귀 기록물 공개 보도자료에서 일본군의 사할린

대량학살 가능성이 있다는 소련 정부 보고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기록원은 당초 이 내용을 포함해 보도자료를 내려 했으나, 한일관계가

민감해진 상황에 정부 차원에서 대량학살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기가 부담스러워 최종 보도자료에서 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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