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의:소련시대의 사할린 한인의 생활

3)소련시대의사할린한인의생활

 

(1) 망향의고착화:(19451959)

1945년 8월 8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남사할린을 점령한 후, 8월 23일 일본인의 출국을 금지했다. 이 출국금지조치에 의하여 당시

일본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한인 약 4만3천 여명도 함께 억류됐다. 1945년 8월을 전후로 남사할린은 북사할린에서 남진하는 소련군과 일본군이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고, 당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조선인을 "스파이"로 몰며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됐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후처리과정에서 사할린에 남겨진 일본인과 조선인들에 대한 송환문제는 희비가 엇갈리게 됐다. 먼저 1946년

12월 체결된 "소련지구 인양(引揚)에 관한 미–소 협정"에 의해 일본인 귀환이 이루어졌는데, 1946년 12월 5일부터 1949년 7월 22일까지 총

292,590명이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 협정에서 귀환대상자는 "일본인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 때 일본은 일본호적에 등재된

사람만을 일본인으로 간주하여 조선호적에 포함되어 있는 조선인은 제외시켰다. 즉,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조선인을 모두 일본국적자로

처리했지만, 민족차별을 위해 호적을 일본호적과 조선호적으로 나누어 편제했는데, 이를 근거로 조선인을 제외시킨 것이다. 그 후 1956년 10월

일–소 양국이 국교수립을 하면서 발표한 "일–소 공동선언"으로 귀환이 이루어졌는데, 1957년 8월 1일부터 1959년 9월 28일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잔류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사망한 유골까지 송환됐다. 이때는 일본인과 결혼한 한인 및 그 가족의 귀환도 허용되어 일인과 결혼한

한인남자 및 그 가족 1541명만이 일본으로 귀환했다. 당시 일본은 한인을 외국인으로 취급했다. 즉 1951년 9월에 체결되어 1952년 4월 28일에

발효한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 제2조에서 일본은 조선(한국)의 독립을 승인한다고 한 것을 근거로 사할린 한인과 재일한인을 포함한 모든

한인의 일본국적을 박탈했다. 이미 이렇게 한인의 일본국적을 박탈한 상태에서 원칙적으로 한인은 귀환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게 됐던 것이다.

반면 남한을 점령하여 시정하고 있던 미군정청은 급격한 귀환민들의 증가가 가져오는 사회경제적 혼란(식량, 주택사정 등)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 후 이승만 정부는 1952년 한일교섭을 시작하여 식민지 지배 및 전쟁피해 배상에 대한 논의를 공식화 했다. 하지만, 일본이 소련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1958년 "재일조선인 북송문제" 등 북한과의 교류도 넓혀나가자 한일교섭은 중단되다시피 했다. 특히 "북송문제"를 비난하면서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승만 정부의 극단적인 배일정책과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는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했다.

 

(2) 기약없는귀향길:(19601988)

 

사할린에 남겨진 한인들은 냉전체제 하에서 질곡 깊은 운명을 겪는다. 그 단적인 예가 국적문제이다.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될 때 일본국적자였던

한인들은 종전으로 소련이 사할린을 편입하면서, 당시 소련국적법에 의하여 이들을 모두 무국적자로 처리하고 다만 신분증명서 뒷면에 "최종국적

일본"이라고 기록했다. 즉, 이 시점에서 사할린 한인은 일본의 국적법에 의하면 일본국적, 새로 영토를 차지하고 실제로 통치하는 소련의 국적법에

의해서는 무국적자였다. 그러던 중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을 계기로 사할린 한인의 일본국적을 박탈하여 일본의 관점에서는

외국인으로 만들어버렸고, 사할린 한인은 어느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무국적자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동지역의 개발과 노동력 손실을 염려한 소련은 사할린 한인에 대하여 소련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 소련 당국은

무국적자에게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어 국적취득을 유도했다. 무국적자의 경우 4Km이상의 여행을 금지했고, 소련의 어떤 법적 보호와 보장이

없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이러한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국민"으로의 포섭은 미국, 일본, 한국과의 경쟁 속에서 체제우위를 점유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종전 이후 남사할린에는 고향땅으로 돌아갈 배편을 기다리며 남았던 조선인이 2만3498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46년 12월9일

체결된 «소련지구송환미소협정»에 따라 귀환대상자는 «일본인 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한정됐다. 문제는 «일반 일본인»이라는데 있다. 일본은

일본 호적을 기준으로 일본인만 받아들였고, 당시 조선 호적으로 편제된 조선인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일본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 당시 일본거주 조선인은 일본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되어 있었다. 제일동포는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한

날 비로소 일본국적을 상실했다. 그해 일본법무성은 «조선과 대만은 평화 조약 발효의 날부터 일본국 영토에서 분리하기 때문에, 따라서 조선인과

대만인은, 일본 내지 거주자를 포함하여 일본국적을 상실한다»고 했다. 1946년 12월5일부터 1949년 7월22일까지 총 29만2590명의 일본인만 일본

땅으로 귀환했다. 이때 사할린 조선인들도 귀국자 대상이 되어야 했다. 다카키 겐이치에 따르면  "종전 후 1946년 말부터 "소련지구귀환미소협정"에

의해 사할린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일본 본토로 돌아가게 됐다. 당시, 일본본토는 미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 따라서 소련과의 일본인

귀국관련 교섭은 일본 정부가 아닌 도쿄에 있던 미군 사령부가 했다. 하지만 소련도 미국도 사할린의 조선인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할린의 조선인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일본 정부 또한 뒤에서 소극, 적극적으로 대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 미군도 사할린에 조선인이 남아 있다는 문제를 몰랐다. 사할린으로부터 GHQ(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에 «조선으로 보내달라»는 귀국요망이 들어오자, 도쿄의 GHQ는 서울의 미군사령부에 문의를 했다. 이때 서울의 사령부는 맥아더 밑에

있던 조직이었다. 서울의 미군은 전후의 혼란을 이유로 사할린의 조선인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도쿄의 GHQ도 그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정권은 조선인에 대해 차별정책을 취하고 있었는데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도 추방시키려 했기 때문에 사할린의

조선인에 대해서는 더더욱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소극적이란 말은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은폐하려 하는 등 조선인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는

뜻이고, 적극적이란 말은 미국과 소련측에 적극적으로 조선인을 제외하고 일본인만을 돌봐달라고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1956년 10월9일 구소련과 일본은 수교에 합의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1957년 8월1일부터 1959년 9월28일까지 잔류 일본인, 일본인과

결혼한 조선인, 그 가족의 귀환도 이루어져 1541명의 조선인만 일본으로 송환됐다. 결국 종전 이후 1990년 한·소 수교에 이르기까지 45년간 2만여명의

강제동원 조선인과 그 후손들은 사할린에 방치되어 세상과 대중의 기억에서조차 점차 멀어져갔다. 50 년이상 계속되어진 이산가족문제가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문제이다. 1945년 패전국 일본은 사할린에 억류된 일본인의 귀환에 매우 빠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일본 국적이었던

조선인들의 한국 귀환은 철저히 통제된 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패망 후, 한국으로 가는 배가 올 것이라는 소식에 수만명의 한인들이 코르사코프

항구에 모여들었지만, 그들의 희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소련은 전후처리에 의하여 남사할린의 영토귀속이 변경됐을 때, 국제관행인

영토변경에 의한 국적선택제도를 실시한 것이 아니라 소련 국적법을 일방적으로 적용하여, 거주 한인들을 일괄적으로 무국적자로 처리했다. 1950년대

이후 소련은 사할린 한인에게 북한국적을 취득할 것을 권장하고, 동시에 소련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당시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거부했던

일본 정부의 논리는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사할린 한인들이 모두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된 것은 아니므로 자유 모집에 응하여 자의로 이주한 사람과 강제동원된 사람 구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강제동원된 경우라 하더라도 일본 정부는 귀환의 법적 의무까지 부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 1946년 집단 송환시 일본은 연합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집단송환은 미·소간의 협정으로 실시된 것이며, 귀환 승선자의 선별은 소련 당국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으므로 일본 정부가 한인의 귀환 기회를 봉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의 억류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배경으로 하는 국제관계와 일제의 조선인 기민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생활고와 감시의 이중고 속에서도 소련 치하에서 사할린 한인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역시 고국으로의 귀환이었다. 한인들은 개인적으로 지방 당국에

"고국으로 놓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귀환 요청서"를 올렸다. 이에 대해 당국은 해당 "사업소의 당 조직이 한인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사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노동자들에게 정상적인 생활 및 생산 여건들을 만들어주지 못한 탓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진단하면서 소비에트 체제의

확산과 정상적인 삶의 여건이 조성되면 귀환의 염원도 함께 가라앉을 것으로 보았다(기아소[1], 4–1–344, 70면. 1947.9. 문서).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이 수집된 1950–1970년대 시기의 몇몇 행정기록을 통해 당시 역사적 사건들이 한인 사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한반도의 전쟁(6.25) 이후 공고화되는 소비에트 체제 속에 개인적 귀환의 열망은 공식적으로 표출되기가 더 어려워졌을 것이고

그 사이에 형성된 가족과 사회에 대한 다양한 관계망이 생존과 직결된 현실적 요구들을 불가피하게 수용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한인 귀환 운동의 중요한 시점이었다. 각처에서 한인들이 당국의 눈을 피하고자 친목회를 가장한 조직을 꾸려 문화 및 교육 활동에

나서는가 하면, 1950년대 말에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일본인 처와 결혼한 한인들이 사할린 한인 귀환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1960년대에는 개인들의 편지가 한국의 가족에게 전달됐다. 따라서 이 시기 귀환의 노력은 공공기록보다 개인적 소회가 토로된 자료 등

비공개된 민간 기록과 비교하여 조명될 필요가 있다.

1951년에 마카로브, 고르노자보드스크, 네벨스크와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지하 조선 공산당이 조직됐다. 이 조직은 반소 행위를 위한 것이 아니고

다만 사할린 한인들의 귀국을 위한 것이었다. 프로그램, 규약에 의해 활동했다. 공산당선언도 작성했고 “단결하자!”란 신문의 초판도 발행했다.

그 결과 25명의 젊은 조선인들이 입당했다.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사할린 방방곳곳에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소련 최고

기관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에게 우리의 조국으로의 귀환 탄원서를 여러 번 보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기관에서도 답변을 못 받았다.

그래서 사할린 조선인들은 단합하여 정치적인 대표들을 소련 최고 기관(모스크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평양), 한국 정부(서울),

일본 정부(도쿄)와 유엔(뉴욕)에 보내어 조국으로의 귀환 요구서를 전달하여야 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투쟁 없이 조선으로의 귀환은 거의 불가능하다".

소련 국가안전위원회(KGB) 사할린 지부는 이 조직을 불법이라 하여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신보균(20), 네벨스크에서 김영관(25), 마카로브와

고르노자보드스크에서 조선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을 채포했다. 신창우(24)와 김형주도 안기부에 소환(召喚)되어 신문(訊問)을 받았다.

신보균, 김영관, 김송매와 권명산은 1951년 소련 형사소송법 제58조에 의해 10년 형벌을 선고 받았다.  사할린 조선 공산당원들은 2003년에 복권됐다.

Син Чун У (24 года), Син Бо Гюн (20 лет), Ким Ен Гван (25 лет), Квон Мен Сан(25 лет)

[출처] 2014년 8월 15일 (음력 7월 20일) 새고려신문 (사할린 새고려신문) |작성자 baesoСин Чун У (24 года), Син Бо Гюн (20 лет), Ким Ен Гван

(25 лет), Квон Мен Сан(25 лет) [출처] 2014년 8월 15일 (음력 7월 20일) 새고려신문 (사할린 새고려신문) |작성자 baeso이 사실이 박형주의

«사할린 리포트», 진율랴의 “1951년 사변에 대한 진실”에서 밝혀졌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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