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의:소련시대의 사할린 한인의 생활 - Page2

 

남사할린 코르사코프시 "망향의 언덕"에는 조각배 모양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이 언덕은 종전 직후 남사할린 전역의 조선인들이 어린아이와 봇짐을

등에 지고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 내려와 이제나 저제나 배편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곳이다. 대부분 남한이 고향인 조선인들은 고향땅도 밟지

못한 채 "동토의 땅" 사할린에서 추위에 얼어 죽고, 굶주려 죽고, 고향땅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다 죽어 갔었다. 강제동원된 지 70여년,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나면 이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고 증언할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현재 사할린섬에는 잔류 한인 1세 630여명을 포함해 후손 2만4천여명이

살고 있다. 1958년 일본인 처와 함께 일본으로 귀환한 박노학은 사할린 한인 동지들의 조국 귀환문제를 일본 사회에 호소했다. 당년 2월 6일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의 3인을 비롯한 약 20명의 사할린 귀환 한인들이 모여 "화태 억류 귀환자 동맹본부"(후에 "화태 억류 귀환자 한국인회",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이하 "한국인회")로 명칭을 바꾸었음)를 결성했다. "한국인회"는 동포의 귀환 촉진을 관계기관과 일본 사회에 대해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그 요구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응했고, 매스컴도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1975년 "한국인회"는 일본변호사연합회에

인권구제 신청을 했고, "사할린 억류자 귀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976년에 일·소 관계가 악화되어서 사할린 한인 문제에 소련 정부도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소련에서의 출국은 까다로워졌고 친족 재회를 위한 도항도 어려워 졌다. 바로 이런 상황이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준 사례가 "나홋카의 4인"

사건이다. 사할린동포 황인갑, 강명수, 백낙도, 안태식 4명이  소련 출국 허가를  받고   고향으로 귀국하기 위해 나홋카까지 갔으나 그 망향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왔었다. 1976년 6월 어느날 일본외무성 북동아시아과 시모무라 사무관은 그 4명의  문제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가

7월 5일(4명의 소련 출국기한)까지 한국입국허가를 내줄 수 있는지 알수 없다고 하면서, 여하간 나홋카에서 기다리는 4명의 신원보증을 서라는

것이었다. "한국인회" 박노학회장이 필요한 서류를 일본 법무성에 제출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본외무성은 이틀 후에 한국 대사관이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 4명은 할수 없이 사할린으로 되돌아갔다고 알리었다. 그들은 나홋카로 떠날 때 전재산을 처리했고, 연금과 거주권리조차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후의 생활이 어떠했겠는가 짐작할 수 있다. 재출국신청은 받아주지도 않았다. 당시 이 4명이 소련출국허가를 받았다는 것은 기적적인

사실이었다. 염원의 귀국을 하게 된 그들은 하늘에라도 올라간 기분으로 사할린을 떠났다. 나홋카에 일본 영사관이 있으니 거기서 허가를 받아서

일본으로 건너가려고 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한국으로의 귀환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사할린에서 직접  한국으로 갈 수가 없어서 일단 일본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매일매일 일본 정부의 입국허가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으나 소련 정부가 정한 출국기한까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사할린으로 되돌아 온후 일본 정부의 입국허가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소련이 출국허가의  연장도, 재발행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그후 사할린에서 사망했다.

안태식이 사망직전에 고향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일본 박노학을 걸쳐서):

"석환에게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서  궁금하구나.

이곳 아비는 고향에 돌아가서 너희들을 보고싶어 견딜 수 없는 심정이다. 힘을  다해서 노력해  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보람이 없구나.

날개라도 있으면  날아가겠는데, 가슴만 타지. 아마 여기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봐.죽으면 사망날자는 누군가 전할 것이다. 그런줄 알어라.

안태식 서신"

 



[1]  기아소 (ГИАСО) ㅡ 사할린주 국립 역사 문서 보관소.

[2] 박형주. 사할린 리포트. 유즈노사할린스크. 파인디자인, 2004. 43 – 45쪽, 진율랴. 1951년 사변에 대한 진실. 새고려신문. 2014년 8월 15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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