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의:소련시대의 사할린 한인의 생활 - Page2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미공개 상태이기는 하지만 한국 국가기록원에는 "기아소" 기록보다 더 많은 민간 기록이 수집되어 있다. 한국의 중소이산가족회

소장 기록과 일본에서 들어온 이희팔 소장 기록물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극적인 한 사건의 주인공인 도만상(都万相) 관련 기록물의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귀환의 염원과 노력의 처절함을 함께 느껴보고자 한다.

해방이 되고 사할린에 갖혀버린 조선인들. 우리 동포들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말 한번 제대로 못하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사할린에서는 1970년대 초반,

동포들 사이에 영주귀국운동이 시작됐다. 숨도 쉬기 힘들었던 그 시절, 한국으로 보내달라는 말이 나온 것은 한국 정부가 1970년 초반부터 사할린

동포들을 데려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한국 정부는 소련과 수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을 내세웠다. 원래 사할린 억류 조선인의 많은 수는

남한출신인데, 냉전시대 한소국경이 없던 상황에서 한국과 소련간의 직접적인 교섭이 어려워서 귀환운동이 제대로 성공적으로 완수되지 못했다.

특히 1970년대 전반까지 한국은 사할린 한인   억류의 책임이 원래 원인 제공자인 일본에게 있기 때문에 일본이 자신들의 경비부담으로 사할린 한인들을

돌려 보내는 데에 책임을 질 것을 요구했다. 반면에 일본 정부는 그들이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서 이들에 대한 귀환책임을 계속 회피하고

있었다. 특히 소련은 그 당시 냉전시대 적성국인 한국으로의 귀환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지만 반면에 원래 동원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일본으로의

귀환은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계속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사할린 한인들을 데려오려면 일본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국은 1976년경부터 경비부담 같은 것은  더 이상 일본 정부에 요구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귀환운동에 나서달라, 중개역할을 해 달라»는 적극적

자세를 촉구했고 일본도 그때부터 자세변화를 보여서 이들이 일단 일본으로 귀환하기 위한 증명서 발급을 해주겠다는 적극적 자세로 변했다.

계속 소련은 그 당시 일본으로의 귀환은 인정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귀환을 원하는 많은 사할린 한인들이 우선 일본을 거쳐 고향을 갈 수

있다는 희망에서 귀환운동이 그 당시 크게 벌어졌다. 이렇게 1975년에 한국에서 사할린에 사는 동포들을 초청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갈 사람 신청하라는 광고가 붙었을 때 소련 정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천명의 한인들이 한국을 가겠다는 신청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소련 정부가 판단하기에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은 사할린에 남으리라 판단했는데 한인들은 가족단위로 영주귀국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 전부터

일본 방송을 듣고 많은 사할린 한인들이 일본을 통해서 한국을 가자고 신청을 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귀환을 원하는 많은 사할린 동포들이 우선 일본을

거쳐 고향을 갈 수 있다는 희망에서 귀환운동이 그 당시 크게 벌어졌다.

이에 대해 사할린주 당국은 해당 «사업소의 당 조직이 한인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사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노동자들에게 정상적인 생활

및 생산 여건들을 만들어 주지 못한 탓»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진단하면서 소비에트 체제의 확산과 정상적인 삶의 여건이 조성되면 귀환의 염원도 함께

가라앉을 것으로 보았다(기아소, 4–1–344, 70면. 1947.9. 문서).

그러나 이 시기는 한인 귀환 운동의 중요한 시점이었다. 사할린 각처에서 한인들이 당국의 눈을 피하고자 간친회로 위장한 조직을 만들어 문화 및 교육

활동에 나섰다. 1957년 8 월부터 1959년 9 월까지 총 2345명이 2년 동안 일본인 부인과 함께 한인 동포들, 그리고 자녀들이 일본으로 귀국했다.

1958년에 일본으로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이 일본인 아내와 함께 귀환했다. 박노학은 일본에서 사할린 동포들을 귀환시키기 위하여 '가라후토 억류

귀환 한국인회'를 결성했다. 그들이 사할린 한인 귀환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1960년대에는 개인들의 편지가 한국의 가족에게 전달됐다.

그중에서 비극적인 한 사건, 즉 한국귀환운동 주동자 가족 소련첩보당국에 의해 북한으로 비밀리 추방에 관련의 주인공인 도만상(都万相) 일행을

소개한다.

이 사건은 1977년 소련당국에 의해 북조선으로 강제 추방된 사할린 한인 들의 이야기이며, 현재 생존해 있는 1 세대인 허갑순(93) 할머니의 애닲은

심정을 담은 모자 찾기에 비롯돼 1990년 소련 KGB중앙본부로 송달된 «북조선으로 끌려간 가족찾기 호소문»과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시도렌코

시장에게 건의되면서 최초로 공개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그후 1996년 2월 28일 러시아 외무성 에.프리마코브 장관에게 북한으로 추방된 사할린 한인

 5가족 40인의 행방을 찾아 달라는 요청서를 보내었고 2002년 5월 17일 LA 한민족국제포럼에서 «사할린 한인 의 영주귀국 및 보상현황과 그에 대한

우리의 요구»라는 발제문에서 잠시 언급되어 해외동포들에게 높은 관심을 가진 바 있었으며, 2004년 4월 7일 러시아 연방국회의원 이.쥐다카예프로부터

1977년 구 소련 정부에 의해 통행통제소 «하산»을 거쳐 북조선으로 전송됐던 5가구 40인의  사할린 한인  생사여부의 질문에서 당시 40인은

소련내무성에 의해 추방당했고 사할린 KGB지부와   사할린주내무소의 합작경호 하에서 실행됐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27년이란 세월이  지나 고문서를 없앤 상태라 더 이상 상세한 정보는 알려 줄 수는 없다는  사할린주내무소 여권.거주증(오비르) 담당부장

무스타핀으로부터 통보 받았다. 또한 1990년 KGB 중앙본부는5가구 40인의  확인은 인정되나 소련 정부의 권한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대책을 강구하고

북조선과의 외교절차에 따라 소련외무성과 KGB는 정확한 답변은 많은 시간이 요구되므로 필요시 다른 기관인 소련적십자사에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당시 소련 정부와 KGB는 우방관계인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의식해 또는 소련 정부가 개입된 사실이 국제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북한으로

추방당한 사할린 한인 들의 북조선 추방을 숨기기에 바빴던 것으로 생각된다며 생사여부를 물었던 의뢰인들은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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