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의:소련시대의 사할린 한인의 생활 - Page4

1999년 6월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사할린 한인  국제문제»라는 국제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되어 러시아. 한국의 학자들과 변호사들이 참여했는데

한국측에서는 지익표 국제변호사와 노영돈 법학과 박사가 참여하여 결의문을 일본수상, 러시아대통령, 대한민국대통령, 유엔기구 사무총장에게 각각

보낸 바 있다. 이 결의문에는 일본은 강제징용과 만행의 책임을 묻고 미국은 전후 일본과 한국을 통할하면서 잔류한인들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던 책임과 한국은 사할린 한인들을 고국으로 마땅히 귀환시킬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 22일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회담으로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보상을 일본에 면제해  줌으로 물질적 보상책임을 벗어나게 한 책임을 명백히 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마음대로 쓰다가 필요없는 한인들을 버리고 해방 후  사할린 «가미시스카»(현 레오니도보) 촌과 «미즈호»(현 포자르스코예)

촌에서 죄없는 한인들을 소련스파이 죄를 덮어 씌워 45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었으며, 소련은1946 – 1949년 일본인들만 본국으로 귀환시켰고

일본인 귀환으로 인구가 감소한 사할린 섬의 파괴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값싼 노동력을 한인으로 대치시켰다. 그리고도 포기하지 않고 숨 죽이며

고국의 라디오를 몰래 들으며 끊임 없이 고국가기만 기다렸고 그 열망은 한시도 식지 않았고 그러다 소련당국은 갑작스레 조국으로 귀환하고 싶은 자는

지역 OVIR(내무소)에 요청하라는 통보를 하게됐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한인들은 벌때처럼 몰려와 수 천명이 한국귀환을 신청했다. 하지만 소련당국은

공산주의 낙원을 버리려는 남한출신이 대다수인 한인들을 심리적 처벌을 가하기 위해 열성 귀환  주동자 가족5가구 40인을  지목해 정신병원에

감금하면서까지 하며(도만상(1911), 배상태(1916), 도미자(1940), 도규식(1946), 도태자(1943) 고문을 강행했고 소련당국의 지시에 의해

사할린KGB지부와 사할린주내무소의 합작음모에 희생되어 선량한 한인들이 북조선으로 추방됐다. 이로써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할린에서 북한으로

추방된 5가구 40인에 지역별로는

코르사코프시홈스카야거리 14 동, 9명: 도만상(1911), 배상태(1916), 도미자(1940), 도규식(1946), 도태자(1943), 도윤식(1949), 도미례(1952),

도윤류(1955), 도황구(1957);

홈스크시마트로소바거리 4a동 34호, 6명: 이창남(1931), 이미자(1963), 이수자(1937), 이성갑(1937), 이분녀(1957), 이분자(1959);

포로나이스크시 말로쉬콜나야 6동, 7명: 김일수(1926), 한도하(1938), 김옥녀(1963), 김옥남(1966), 김태운(1968) , 김옥순(1958), 김옥금(1961);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사도바야거리 28a동, 6명: 유길수(1925), 유춘형,(1968), 김경순(1930), 유강영(1954), 유상영(1956), 유천영(1959);

유즈노사할린스크시사할린스카야거리 153동, 12명: 황태령(1921), 황명순(1954), 황성운(1959), 황광운(1947), 신영자(1952), 환동석(1975),

황인나(1977), 허동화(1948), 황순읍(1950), 허헤성(1975), 황춘운(1957), 허올가 동화예브나(1977) 등 총 40명으로 밝혀졌다.(본 명단은 1990년 7월에

사할린주 OVIR가 사할린주 한인협회의 청구에 답변한 것을 인용했음) 사할린 한인사에서 도만상은 유명한 인물이다. ‘도만상 사건’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그는 1977년 자신과 가족이 포함된 총 5가구 40여 명의 북송 사건을 대표한다. 자신의 남한 귀환을 주장하며 코르사코프 시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귀환 운동에 앞장섰던 도만상과 그 가족은 1977년 1월에 소련 당국에 의해 전격적으로 북송됐다.

도만상은 1911 년 02월 23일 경북 성주군 벽진면에서 태어났다. 1937년경 조선에서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생활하던 그는 1942년 사할린 니시나이부치

〔西內淵〕(현 자고르스키) 탄광으로 동원되어 1945년 해방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소련 치하에서 코르사코프시에 정착했고 도만상이 가까이 지냈던 인물

중에는 박노학과 이희팔이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두 사람은 1958년에 일본에서 한인의 귀환 운동을 시작한 장본인이다. 도만상은 사할린주

코르사코프시에서 오랫동안 여려 직장에서 영접공, 목수로,  박노학은 이발소에서 일했다. 두 사람은 박노학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박노학을 돕는 적극적인 귀환 운동가로 활동하는 한편으로 자신과 가족의 귀환을 모색했다. 박노학이 1961년에 사할린을 방문했을때 도만상은

자기 집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한국에 남긴 친척들에게 보낼 사할린 한인들의 편지들과 귀국 신청서들을 전달했다.

그러던 중 소련이 귀국 희망자 신청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귀환을 위해 적극 나섰지만 노력이 무위로 끝나자 1970년대에 과감하게

코르사코프시청사 앞 시위 등으로 자신과 한인들의 염원을 알렸다. 당시로서는 거의 무모하다고 할 도만상의 활동은 1977년 1월 27일 본인과 가족,

그리고 그와 깊은 관련을 맺고 귀환의 노력을 벌였던 다른 한인 총 40명의 강제적인 북한 송환으로 돌아왔고, 지금까지 북송된 이들의 생존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과 한국에서 수집된 개인 기록들에서 도만상의 기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록들을 시계열적으로 살펴본

결과,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방일권, 기록속의 사할린 한인, 103쪽) 도만상에 관한 기록 중 시간적으로 가장 앞선 것은

1966년도에 일본에서 박노학이 작성한 «화태억류동포귀환희망자명부» 속의 기재 내용이다. 도만상이 이미 1960년대 전부터 일본과 여러 차례 서신

교환을 했음을 보여준다. 앞서 간략히 소개된 도만상에 대한 소개는 이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다음으로 이번에 수집된 민간 기록들 속에서 나온

도만상의 개인 편지들이 있다.

1974년에 발송된 그와 가족의 이름이 병기된 귀국 청원서 형식의 편지와, 이희팔 앞으로 보낸 새해 축하 카드가 그것이다. 그 내용은 사할린에서 일본의

박노학과 이희팔 등에게 발송된 다른 개인들의 편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주목을 끄는 기록은 1975년 3월 25일로 작성일이 표기된 이희팔 수신

편지이다:

«박노학 씨와 이희팔 친구에게

… 동일한 편지를 3통 보냈으나 받았는지 알 수 없어 다시 편지하네. 사할린에서 모스크바 소련 상임위원회에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약 15일 가량이 지나자 豊原(유즈노–사할린스크) 외국인 취급소인 오비르에서 직접 찾아와서 일본에서 일본입국소환증명서를 요구한다고 했네.

그러하니 일본입국소환증명서를 구할 방법이 있겠는가? 일본 입국소환증명서만 있으면 일본으로 가려는 희망자는 나갈 수 있다네. 다음으로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청원한 사람은 소련과 한국이 수교를 하면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군. 친우여 일본입국소환증명서 한 장 만들어 보내 주시게.

꼭 부탁하네. 일본입국소환증명서가 준비된다고 해도 개인에게 발송하게 되면 도중에 유실되는 경우가 있으니 소련 주재 일본 대사관으로 보내주어야

하네».

자신이 «일본 입국소환증명서를 구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 편지는 당시의 분위기와 도만상의 귀환 노력을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있지만 이제껏 알려진

것 보다 훨씬 구체적인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우선, 일본인만 귀환시킨 소련에 대해 한인들이 체념 상태로만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인 중에는

도만상과 같이 소련 중앙 기관에 더욱 적극적으로 귀환 요청을 올린 사례가 있었고, 한인의 청원 소식이 외국인 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외국인 등록처

(OVIR)에 전해졌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귀환의 방법에 대한 당국자 간 연락도 진행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편지의 내용을 통해 기존 명부에

기록된 도만상 관련 내용의 불명확한 의미를 해독할 수 있다. 즉 «화태억류귀환희망자명부»의 916번으로 기재된 도만상 관련 비고란에는 도만상의

동서, 처남 등 친척의 이름과 ‘1976. 7. 15, 日本入國 許可, 10名’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즉 도만상이 북송되기 반년 전 쯤 박노학 회장 등은 10명의

일본입국 허가와 관련된 자료를 발송하고 곧 그를 일본에서 만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노학 회장이 발송한 자료가 도만상의 손에까지

도착했는가는 확인되지 않지만 1976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시청 앞에서 벌인 도만상 개인의 시위가 이 자료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되는 일이다. 일본 입국 허가 자료가 자신과 가족에게 한정된 기록이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도만상은 소련의 지시를 모두 이행했음에도

출국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을 단지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방일권, 기록속의 사할린 한인, 103쪽) 북한에 추방당한 40명 중

1950–60년대에 북한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 대다수다. 북한은 소련 정부의 협조를 받아 나홋카 영사관의 영사 리태식을 파견하여 희망자들에게

즉석에서 북조선 공민권을 발급했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조국은 분단됐지만 곧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선전을 믿고 북한을 통해서라도 조국으로

간다는 희망 때문에 북조선 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무익한 희망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사람들은 대량으로 북한국적을 거부했다. 도윤식(1949)과

  도미례(1952)는 이미 소련 국적을 취득하여 대륙에서 재학 중이었으나 강제적으로 소련국적을 북한국적으로 전환시켜 북한으로 추방당했다.

도만상이 그들을 한국귀환희망자 명단에 올렸기 때문이다. 도만상의 맏아들 도찬영(1938)은 그 명단에 들어있지 않아서 유일하게 사할린에 남게

됐는데 자기의 추방당한 부모형제의 생사확인도 못한채 2006년 코르사코프시에서 세상을 떴다.

«남편의 평생 소원이었던 귀국은 큰 아들(허동화, 1948)의 피맺힌 노력의 결과이었습니다. 개방이 되지 않았던 시기부터 아들은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소련당국에 한국으로의 영주귀국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소련당국은 우방국이었던 북조선 기관에 의뢰하여 아들 가족을 비롯해

영주귀국운동에 기담했던 40명의 가족들을 북한으로 추방하게 됐습니다. 며느리와 겨우 3개월된 손녀와 1년3개월의 어린 것들을 데리고 다시 오지 못할

북한으로 추방(1977)하게 됐던 것입니다. 아직도 러시아 당국과 북조선은 이 사건을 두고 아무런 대책과 보상도 없이 오늘날까지 묵묵부담(모르쇠)

입니다. 그로부터 그 한 많은 일생을 발자국 소리에, 차지나가는 소리에, 비행기 소리에 그저 아들이 돌아 올 줄만 알았습니다….

2009.11.30. 러시아 사할린에서 허갑순».

(허갑순 할머니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과 대한 적십자사 유종하 총장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가 강점한 조선반도 3천만 인구속에서 강제로 차출되어 끌려가 우리 민족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모진 고통과 희생을

당했지만 그동안 모국과 7천만 동포들로부터 잊혀진 민족이 되어 왔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보상도 받지 못한채 죽기전의 한을 풀고자 어렵고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 이후 사할린에서의 한인 귀환운동은 얼어붙고 말았다.

1970년대 초에 사할린 한인의 귀환은 억류 당사국인 소련의 유연한 입장선회로 새로운 희망을 기대할만한 상황을 맞았다. 일본 수상 다나카(田中)와

소련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의 면담에서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가 언급되고, 한국내에서도 1973–1975년 사이에 200여명의 사할린 한인을

귀국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소련 측의 입장이 바뀐 배경으로서 경제적인 측면이나 체제 경쟁에서 남한에 비해 월등한 상태임을 자신했던

소련이 이미 사반세기 이상 사할린에서 정착한 온 한인들에게 인도적 제스처로서 귀환의 가능성을 언급한다고 해도 그 호응은 크지 않으리라는 예상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한인 귀환 희망자들의 청원이 쇄도하자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했고, 도만상 사건은 소련의 그 같은

의도를 단번에 구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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