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의:소련시대의 사할린 한인의 생활 - Page6

나홋카의 4명의 사건, 이 비극을 가져온 것은 일본, 소련, 한국  정부의 무정하고 야박한 태도의 결과다.

1950년도 말 북한은 사할린 한인들에 대하여 국적취득을 적극적으로 선동했다. 1958년에 소련 연해주 나홋카에 북한 영사관이 개설됐다. 북한은 영사관

선전요원까지 파견하여 사할린 한인들에게 유학, 취업 등의 혜택을 빌미로 북한국적 취득을 유인했다.

그때부터 총영사관 서기관 리태식이 사할린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선전했다. 그리고 북한의 임의의 대학에 무시험 입학시켜 주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했다.

그 바람에 사할린 조선 중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북한 국적을 획득해 큰 희망을 걸고 유학을 떠났다. 조국에 가서 모국어를 계속 공부하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었다. "마음대로 대학을 선택할 수 있고 1 년이 지나면 부모 방문을 허락하겠다고 했는데, 그 어느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사할린에 돌아오겠다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국경을 넘어오다가 붙들렸다는 소문이 나돈 뒤 행방불명됐다"고 유즈노사할린에서거주하는 한

여인이 자기 동생에 대해서 말했다.

영주하고 싶은 가족들을 데려갈 목적으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대표단은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서 집중적인 선전사업을 펼쳐놓았다.

그 허위선전에 빠진 많은 젊은이들과 가족들은 앞으로 선조의 땅 대한민국으로 넘어갈 희망으로 북한으로 떠나가게 됐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사할린 친척들과의 연락도 끊어지게 됐다. 1000여명의 사할린 청년들이 북한의

탄압 정책에 견딜 수가 없어 두만강과 압록강을 불법적으로 건너다가 총살당했거나 붙잡혀 처형됐다는 소식이 사할린 한인 부모들을 후회하고

한탄하게 했다. 한겨울에 만주의 강추위에 얼아붙은 강을 건널 때 조선 국경 수비대원의 총알을 맞아 죽지 않으면 중국 군인에게서 총살을 당했고

다행히도 아무르강 소련 국경을 넘을 때는 소련 수비대원이 총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는데 소수의

학생들이 소련 블라고웨센스크시 부근이나 연해주에서 국경을 무사히 지냈다. 사할린주 포로나이스크시에서 만난 한 청년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평양에서 예술대에서 조선 전통 무용을 전공했는데 북한 김일성 주체 사상에 적응되지 못해 탈출을 시도했다. 두만강을 건널 때 두 발에 동상을

입게 됐다. 겨우 목숨을 구해 소련 하바로프스크 변강에 입국해서 일년 이상 치료를 받아 전에 살았던 포로나이스크시로 돌아왔다.

그 후 카자흐스탄 알마띄 조선 예술단에 취직하여 조선 무용을 가르쳤다고 한다.

북한으로 이주한 사할린 한인 대다수는 행방불명됐다. 그들의 생사를 알 수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북한 국적을 획득하여 그들을 찾으러 갔었다.

"외무성으로 교화소로 별곳을 다 찾아다니며 탐문했으나 누구도 대답을 주지 않고 손만 내벌린다는 것이었다. 동생이 필경 월경하다가 총살됐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 그는 돌아오자마자 북조선 공민증을 내던져 버렸다"고 권모란 사람이 증명했다.(장윤기 "환향길 50년").

이전 일본국적을 갖고 있었던 나머지 한인들은 운명의 농락에 맡겨 버린 채로 됐는데 다음 그들은 무국적 신분이됐고, 1960–70년대에 와서는

고향으로 귀국할 아무런 희망을 잃은 사할린 한인들은 드디어 소련 국적을 내야만 했다.

이러한 소련과 북한의 국적취득 정책으로 1973년에는 소련국적 35%, 북한국적 50% 무국적 15%로, 85%의 한인이 소련이나 북한국적을

취득했으나, 1990년대 들어 소련이 붕괴되자 사할린 한인은 극소수 예외적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러시아국적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인 1세(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들은 한국국적법에 따라 소정의 절차와 기간이 지나 한국국적자로 됐다.

이처럼 사할린에 정착시키려는 소련과 북한으로의 유입에 대한 유혹 속에서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1977년에는 한국으로의 영주귀국을 요구한 도만상 가족 8명을 북한으로 강제 추방했고,

같은 해 그 외에도 황태용, 유길수, 김일수, 이창남 가족들도 북한으로 강제 추방했다. 이와 같이 냉전시대에는 그들의 귀향길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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