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의:소련시대의 사할린 한인의 생활 - Page7

4)사할린한인문제해결을위한노력들

 

(1)일본에서의노력

 

1975년 12월 "사할린억류귀환한국인회"(대표 박노학)가 사할린 코르사코프 거주의 엄수갑 등 4명이 일본 국가를 상대로

"사할린잔류자귀환청구소송"을 동경지방재판소에 제기하면서 사할린 한인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운동이 본격화됐다.

1975년 다카키 게니치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사할린 억류자 귀환 청구 소송»이란 법적 공방이 시작됐다.

1사할린재판(«사할린 잔류자 귀환 청구 소송»)은 사할린 억류 한인 4명(엄수갑73, 이덕림61, 조경수53,이지면64)을 원고로 하고

일본국을 피고로 하여, 1975년 12월 1일에 제기됐다. 청구의 취지는 «원고들을 일본으로 귀국시키라»는 것이었다. 청구의 원인으로서는:

피고는 국방 목적 달성을 위해 전시에 인적 및 물질적 자원을 통제•운영, 당시 한반도의 평범한 농민들이었던 원고들을 사할린으로 강제연행,

패전 후 그곳에 방치, 그당시 원고들은 분명히 일본 국적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일본국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원상회복의 조치를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원고들을 귀국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1976년 2월 20일 일본국의 답변서에는 본 청구는

피고 일본국에 대해 작위를 명하는 판결을 요청하는 급부의 소인데 내용과 범위, 양태가 명확하지 않고 그 실현을 위해서는 소련과의 외교교섭이

필요하므로, 이 것은 결과적으로 재판소가 피고 일본국에게 명하는 것이 되는데 삼권분리 원칙에 따라 재판소가 행정권에 내리는 것이

부적법하다라고 형식논리적인 법률론으로 대응한 글이 있다.

당년 4월 2일 일본국은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한다는 판결을 재판소에 대해 요청하면서 왜 일본국이 책임을 질 수 없는가에 대해 설명했다.

패전 후의 귀환은 연합국의 책임 아래에 이루어졌고, 일본국은 관여할 수 없었다.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에 의해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국적을

상실했고, 일본국은 사할린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원고들의 귀환 실현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래, 한국 정부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사할린 한인들에 관한 협력을 요청받고 소련과 접촉하는 등 가능한 한의 외교적

노력을 계속해왔지만, 소련측의 무반응으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1975년 이후 귀환 소송은, 그 동안 일본 국회 다부찌 데쯔야, 마쯔자와 야스지, 도가노 타이지, 구사카와 쇼조 등 의원들이 국회에서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일본 정부를 추궁했다. 1978년 당시 외무성이었던 소노다 나오가 이 문제를 «행정 당국은 인도적 문제라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는 인도적 이상의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고 확실히 말했다. 1983년에 “아시아에 대한 전후 책임을 생각하는 모임”이

발족됐고, 1987년 7월에는 야스아키 오누마 교수와 다가키 겐이치 변호사가 조직한 일본 국회 내에 초당파 의원 모임인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문제 의원간담회»(177명, 하라 분베 회장, 이가라시 코조 사무국장, 하토야마 유키오 사무국차장)가 발족해 활발한 활동이 펼쳐졌다[1].

이 의원간담회는 소련 정부와 접촉하여 출국규제완화를 건의했고, 한국 정부와 북한 정부의 이해를 구하면서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을

이끌어냈다. 1985년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추진되면서 사할린 잔류 한국인의 일본 방문이 완화되어 한국에 남은 가족과 상봉할 수

있게 됐다.

2사할린재판(«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보상 청구 소송»)으로 1990년 8월 29일에 보상소송이 제기됐는데, 원고로는 사할린 억류 한인 및 그들의

유족 혹은 가족 등 21명이고 일본국이 피고가됐다. 청구의 취지는 «피고 일본국은 원고들에 대해 각각 1천만엔을 지불하라»라는 것이었다.

청구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피고 일본국은 1910년 한국병합조약을 조인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2. 피고 일본국은 다수의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3. 피고 일본국은 패전 후 일본인들을 귀환시키면서 한인들은 불법적으로 귀환시키지 않았다. 4. 피고 일본국은

오랫동안 원고들의 가족 재회•고향 방문의 희망을 유리해왔다. 5. 피고 일본국이 고용기간이 경과되면 귀환시킨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포츠담 선언» 제 9항의 «일본국 군대는 완전히 무장해제된 후 각자의 가정에 복귀하여 평화적이고 생산적인 생활을 영위할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

«일본국헌법» 전문의 «우리들은 평화를 유지하고,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협을 지상으로부터 영원히 제거하고자 노력»해야할 책무 및 국제관습법상의

«인도에 대한 죄»에 기초한 의무의 위반이다. 6. 피고 일본국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소련측이 일본이 받아들인다면 귀환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고들의  입국을 거부했다.

원고들은 자기의 의지에 반한 전쟁에 참가•협력, 강제 고향 이탈과 가족의 이산, 이에 따른 정신적•물질적 고통, 직업 박탈에 의한 재산상실, 일본의

패전 후 귀환을 불법적으로 방해받고 50여년간 망향의 설움을 격었다. 일제시대에 사할린 한인들은 가라후토에서 벌목, 탄광, 광산과 군사부지

건설등 고된 노역에 인해 신체장애인이 되고 건강을 잃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됐다. 이로 인해 유가족은 고통스러운 삶을 강요당했다.

남편, 아버지 혹은 아들을 잃은 고통에 대해 일본국은 1천만엔의 보상금을 지불해야 한다. 이 소송에서 다투어진 법적 쟁점으로 피고가 원고들의

귀환권리를 침해한 이유로 국가배상청구권의 성립 여부, 피고의 귀환시킬 의무의 불이행에 기초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성립 여부,

«인도에 대한 죄»의 위반에 따른 국제관습법에 기초한 보상청구권의 성립 여부인데 피고측은 여러 모로 반박했다. 그 결과 보상소송은

1995년 7월14일에1심판결이 선고되지 않해서 종결됐다. 이 보상소송은 여론을 환기시키고 재판과정에서 역사의 진상을 밝혔고, 사할린 잔류

한국인에 대한 전후보상에는 의원간담회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그결과 1993년도 추경예산에서32억엔의 영주귀국 시설건설비를 확보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귀국한 고령자들에게 항공비와 거주지 아니면 가구를 부담한 것이 실질적으로 보상 일부의 시행이라고 이해한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이 후에는 일본 정부가 자금을 대어 한일 양국 적십자 공동사업체도 발족했으며, 한국 정부의 협력을 얻어 서울과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오가는

전세기가 월 1회 운항돼 정기적 고향방문사업이 실시됐다. 1999년 인천 사할린 복지관, 2000년 2 월 안산시 1000명 수용 아파트  «고향 마을»,

2005년 11월 4일 사할린 한인 문화센터가 일본 정부가 38억 5000만엔의 예산을 책정한 건설비용으로 완공됐다. 이 사업이 금년 까지 약 20년간

유지되고 있으며 15,000명 이상이 고향을 일시 방문했고, 약 4300여명이 영주귀국하여 한국 24 곳에서 손자녀들과 생이별한 채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이  영주귀국에서는 진전이 있었으나, 귀국 후 극심한 생활고로 고향을 찾아 친지들과 만나 아이들에게 용돈조차 줄 수 없는 상태이다.

3사할린재판(«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우편저금 등 보상 청구 소송»)이 2007년 9월 25일에 제기됐다. 우편저금 소송은 사할린 및 일본 거주

한인(7인)과 한국에 영주귀국한 한인(4인) 등 11명을 원고로 일본국을 피고로 하여 청구의 취지는 «피고는 원고들에 대해 최저 12만 8640엔부터

최고 865만9400엔까지 총 2804만8720엔을 지불하라»라는 것이다. 원고들은 청구의 원인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제시했다.

1. 피고는 1905년 9월 5일의 포츠머스조약의 결과 남사할린의 영유권을 취득했고, 1910년 8월 군사적 강제에 의해 일한병합조약을 조인하게 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한 후,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하여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강제적으로 피고 일본국이 관장하는 우편저금과 간이보험에 가입하게 했다.

2. 패전 후 피고 일본국은, 소련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 사할린에 관해, «평화조약» 제2조(c)를 통해 그 영유권 등 모든 권리•권한•청구권을

포기하고, 제4조(a)를 통해 그 주민이 보유하는 재산의 처리에 관해 소련과의 사이에 특별협정을 체결할 의무를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민인 억류 한인들의 청구권을 현재까지55년간 계속 방치했다.

3. 원고들의 우편저금과 간이보험은 피고 일본국의 관장 아래 있다가 1947및 1949년 피고 우정공사의 소관으로 옮겨졌으며, 동시에 그 원금 및

이자의 지불을 피고 일본국이 보장하는 것으로 됐다.

4. 피고 일본국은 일본국회에서의 발언 등을 통해, 원고들의 우편저금과 간이보험이 확정채무이며, 피고 일본국에게 지불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5. 1998년 3월 19일에 센고쿠 요시토 의원이 사할린 잔류 한국인의 미지급 우편저금과 간이보험에 대해 국회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우정성

저금국 담당자는 미지급 우편저금의 계좌수가 1997년 3월 현재 우편저금이 59만 계좌로 현재 잔고가 1억 8700만엔이며, 간이보험은 22만 건으로

1억7000만엔이라고 답변했다. 다카키 켄이치 변호사는 1940년대 초반 인구비례를 근거로 상기 1억 8700만엔의 1/7 정도가 사할린 한인의

우편저금이라고 추정한다.

6. 1945년 당시와 현재를 비교할때 화폐가치가 2000배 이상에 이르렀다는 것을 고려할때 피고인은 원고들에게 우편저금의 액면 가액에

2000배를 곱한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7. 1945년 8월 15일 이후 피고들이 원고들에게 환급장소, 방법을 통지•고지등에 의해 알리지 않았으므로 원고들은 오늘날까지 우편저금의 환급을

청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피고들이 원고들에게 2000배를 곱한 현재의 화폐가치로 금액을 지불받을 수 없게 된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이에 피고들은 아래와 같이 반박했다. 채권의 존재및 그 상속관계를통장 등에 의해 입증하고, 조치법에 의해 그 권리가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경우에는 금액을 지불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다. 원고들이 구소련(러시아) 국적인 경우 위에 지적한 금액을 지불할 수 있지만,

한국 국적일 경우(한국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들도 포함) 그들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이 소급 적용돼, 일본에 대해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다고 피고들은 주장한다. 사할린 한인의 개인 청구권 문제에 대해서는 동 협정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며, 국가의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청구에 응할 의사가 있음을 표시했다. 이에 한국 외교통상부는 2010년8월 4일의 답변자료에서 «사할린 한인의 개인 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일본 정부에 반환 책임이 있으며, 한일청구권 협정은 서명일을 기준으로 존재하는 양국 및 그

국민간 재산권을 대상으로 하는바 한국 정부는 청구권 협정 서명일 이후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을 이유로 재산권이 소멸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입장을 2009년 9월에 서면으로 제공했으며, 원고측은 이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우편저금•간이보험의 경우 일본 정부로서도 환급

의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법적으로 볼때 원고 승소의 가능성이 높다. 이미 전후 65년이 지나 전쟁 전에 갖고 있던 우편저금통장 등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사람도 매우 적어 소련 시대에  우편저금을 폐기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가라후토 우편저금의 원부를 사할린에 방치해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다수 우편저금 채권자들이 이미 사망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본 정부는 사할린 잔류 한국인에게 귀속되어야

할 금액(100억 내지 200억엔)을 기금으로 제공해야 하고 당사자 및 그 자손들에게 적정금액을 지급하는 한편, 사할린 잔류 한국인을 위한 아파트

건설, 자손들의 교육지원 및 영주 귀국자 생활지원을 해야 한다.

1990년 8월28일, 최초의 «전후보상재판»으로 불린 «사할린 잔류 한인  보상청구소송»이 진행되지만 원고 21명으로 구성된 이 소송 또한 1994년

취하한다. 당시 일본 정부가 사할린 한인 관련 «50주년에 관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어 재판 결과가 부정적일 경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원고 측에 소송 취소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50주년 파일럿 프로젝트»라는 당시 일본의 지원책에는 영주 귀국자와 사할린

잔류자에 대한 지원, 사망자 유골 송환 등 포괄적인 내용이 있었다는 증언들이 이어지고 있으나 문서로 공식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세 번째로2007년 9월25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우편저금 등 보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우편저금에 관한

일본 우정성의 조사(1997년 3월 현재 59만계좌, 액면가 1억8000만엔)를 근거로, 강제 적립된 우편저금과 간이보험 등에 대한 소송을 통해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사할린 한인 기금»을 설치해 사할린 잔류 1세와 후손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사업에 총 700여억원을 지원했다. 2000년 안산 사할린 «고향마을» 건물 건립비 32억엔,

2005년 «사할린 한인 문화센터» 건설비 6억엔, 일시모국방문사업비, 2007년 재개된 영주귀국사업 항공료, 정착 관련 일회성 물품 및 생필품

지원비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일본 정부는 수만명에 대한 법적 배상책임과 전후 방치책임을 애써 외면한 채 제할 일을 다 했다는 표정이다.

«90년 한·소 수교 이래 한국 정부의 대응을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수교 당시 최소한 수만명의 운명이 걸린 «사할린 한인 관련 법적지위협정»

체결은 외면한 채 일본 정부가 제시한 대로 한·일 양국 적십자사를 사업주체로 하는 반쪽짜리 «영주귀국사업» 수용이 정책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 차원의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안» 논의 과정에서도 과연 모국 정부인지를 의심케 하는 발언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사할린동포 2–3세대의 국적 이탈을 조장할 수 있는 등 러시아와의 외교적 마찰 가능성, 사할린 한인 1세(1945년 8월15일 이전 출생자)인 기존

영주귀국자와의 형평성,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일본 정부와의 지원 중복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등등…                                                                                                                                                                                               

2000년 안산 사할린 «고향마을»을 비롯해 지난 3월 말까지 한국의 24개 지역으로 4300여명의 사할린 한인들이 ‘영주귀국’했으나,

이들은 직계가족을 동반할 수 없다는 영주귀국 조건에 의해 또다시 자식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2인 1세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낯선 사람과 짝을 이루어 한 집에서 살아야만 했다.

앞으로 할 일도 수없이 많다. 우선 사할린 잔류 한인에 대해 영주 귀국한 한인 지원에 똑같은 지원책 등 한국 정부의 책무를 규정한

«사할린 한인 지원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 남사할린 전역의 한인 실태에 대한 한국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실태조사도 필요하다.

이와 함께 사라져가는 사할린 한인들의 강제동원 70여년 역사와 한인문화를 기억하고 보존할 «사할린 한인 역사기념관»을 시급히 현지에

건립해야 한다. 또한 사할린 잔류자에 대해 한·러 양국의 협의 아래 20만 해외입양인처럼 하루속히 이중국적을 부여해 이들이 고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 정부의 인도적인 ‘위로금’ 지급 등 지원책에서 사할린 현지 한인 유족들이 소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는 분명한 원칙을

정해 일본 정부의 사할린 한인 강제동원과 전후 방치 책임, 강제 우편저금 반환 등은 물론 피해자와 유가족, 그 후손들에 대한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과 전후 방치 책임에 대한 유엔 차원의 현장 실태조사가 긴요하다.

남사할린 전역에서 삶을 마감한 수만명의 한인 1세 유골 문제(실태조사, 현지 위령시설 건립, 유골 반환문제 등)도 한·러·일 세 나라 정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제1차 소송은 15년간 지속되면서 1983년 4월 "아시아에 대한 전후책임연구회"가 결성되는 성과를 얻었다. «15년 재판»으로 명명된 이 소송은

취지가 개선된 점을 들어1심 판결도 없이1989년 6월 15일에 원고 4명 중 3명이 사망하고 남은 1명이 영주귀국했기에 소송 취하로 종결됐다.

이후 1987년 7월 17일 일본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사할린잔류한국·조선인문제 의원간담회(일본국회의원 155명 참여)"가 발족됐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88년 4월 일본 외상은 사할린잔류한인에 대해 일본이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1989년 7월 한∙일 양국 적십자사로

구성된 "사할린거주한국인지원공동사업체"를 설립함으로써 모국방문(일시방문 및 영주귀국) 문제를 담당하게 됐다.

제2차 사할린 재판은 1994년 7월 14일 취하되고 말았지만 "50년 파일럿 프로젝트"를 실시함으로써 일본이 모국방문, 역방문, 영주귀국의

한 비용, 영주귀국자의 거주시설 건설, 사할린 잔류자들을 위한 문화센터 건설을 지원하는 결과를 야기시켰다.

2001년에 사할린주 한인회, 노인회와 이산가족회가 일본 정부에 사할린 한인들의 요망서를 제출했는데 일본외무성이 다음과 같은 회답을 통고했다:

사할린주 한인회.

사할린주 한인노인회.

사할린주 한인이산가족회.

금년 3월13일자로된 귀 단체들의 요청에 대한 회답으로 아래와 같이 통고합니다.

 

1. 보상, 배상지급에대하여

 

우리들로서는 사할린에 잔류된 한인들이 일본통치 시절, 일본의 전쟁에서 패전한 후, 냉전기, 다시말해서 세계정세 변화시기에 겪은 고생을 인식하고

있으며, 지난때 고독한 일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문제 발생의 역사적 사실들을 밟으면서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1988년부터 예산시책으로 일시 귀국, 영주귀국자들에 지원차로 왕복여비,

채재비용과 영주귀국관련 비용을 비롯하여 주택, 복지관을 건설하고 생계지원책 등을 강구하여 사할린 한인들에게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할린에서 일본인들의 귀환은 연합국들의 협정으로 1946년에 소련지구에서 일본인 귀환 미·소협정에 따라 연합국들의 책임하에

실행됐습니다. 이외에 일본 정부는 산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으로 인한 조선반도 출신자들은 일본국적을 상실했기에  이들을 귀환시킬 책임이

없었습니다.

이상에 지적한 사실로 일본 정부는 귀환책임 불이행으로 조선반도 출신자들인 사할린 한인들에게 보상, 배상 지불할 책임이없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귀측의 양해를 바라며 향후 일본 정부는 여러분들이 조국으로 영주귀국, 이산가족 재회사업을 위하여 모든 역량을 쏟아 주력할

예정입니다.

 

2. 사할린과한국에주택건설관련문제

 

일본 정부는 32억엔을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자들의 문화주택건설 비용으로 계상했습니다. 이 비용으로 복지관 및 집단주거주택건설이 조직됐습니다.

이외에 일본측은 영주귀국시에 필요한 교통비용, 귀국과 관련된 비용 및 복지관의 직원봉급 등을 부담하고 있습니다. 금년 7월에는 영주귀국자들이

사할린의 남은 가족들과 재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목적으로 일화 1억4천700만엔(1.4700만엔)을 할당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될 수 있는 한 더 많은

사람들이 영주귀국할 수 있도록 협조하려 합니다.

현 단계에서는 상기한 집단주거 주택들을 건립 비용을 확보하는 데는 예산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향후 일본 정부는 영주귀국조직 사업에 협조하려

합니다.

사할린에 거주 주택 건설 관련은 예산확보가 난처함을 지적하고, 일본 정부 이 지방의 요구에 터전을 두고 "문화센터" 건립 비용으로 5억엔의 예산을

계상했습니다. 현재 동 문화센터 건립을 위하여 시공 특별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화센터 건립에 일차적인 관심으로 보고 있기에 조기건립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3. 기금창설에 , 우편저금이용에대하여

 

저금은 총액을 지불가능성이 있는데(원금에 법으로 정해진 이자 첨가를 포함 원금의 4–5배)로 러시아 국적 또는 무국적증 소지자들에게는 지불받을

법적권리가 있으며, 그들의 지불요청과 원본 통장 제출이 필요합니다.

현행 일본 법으로는 본 우편저금을 수급자는 본인이라야 합니다. 법적으로 타인에게 지불은 금지되어 있기에 "기금 창설"에 이용한다는 것은 극히

난처합니다.

 

4. 가칭 "사할린문화센터" 건설에대하여

 

최근에 귀하들에게 제기하는 대상에 대한 소유권 관련 문제조사, 연구와 더불어 건설부지, 위치, 절차, 허가…등과 모든 법적 관련 문제연구 등이

있으며 건설도중에 중단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모든 문서 정리를 비롯한 법적 절차를 지척시키고 있습니다. 건물 시공의 지연 원인은 절대로

일본측의 부정적 처지로 야기된 것이 아닙니다.

사할린주 행정부,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행정부, 관련단체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은 한 우리로서는 본 대상의 설계를 앞으로 진척시킬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귀하들이 우리에게 협조하여 주실 것을 앙원합니다.

                                    일본 외무성                                                  2001년 7월자



[1] 다카키 켄이치. 사할린 잔류한국인 문제와 일본 국내 재판//사할린 동포 현안, 어떻게 풀 것인가? – 서울, 20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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