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의:소련시대의 사할린 한인의 생활

3)소련시대의사할린한인의생활

 

(1) 망향의고착화:(19451959)

1945년 8월 8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남사할린을 점령한 후, 8월 23일 일본인의 출국을 금지했다. 이 출국금지조치에 의하여 당시

일본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한인 약 4만3천 여명도 함께 억류됐다. 1945년 8월을 전후로 남사할린은 북사할린에서 남진하는 소련군과 일본군이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고, 당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조선인을 "스파이"로 몰며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됐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후처리과정에서 사할린에 남겨진 일본인과 조선인들에 대한 송환문제는 희비가 엇갈리게 됐다. 먼저 1946년

12월 체결된 "소련지구 인양(引揚)에 관한 미–소 협정"에 의해 일본인 귀환이 이루어졌는데, 1946년 12월 5일부터 1949년 7월 22일까지 총

292,590명이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 협정에서 귀환대상자는 "일본인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 때 일본은 일본호적에 등재된

사람만을 일본인으로 간주하여 조선호적에 포함되어 있는 조선인은 제외시켰다. 즉,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조선인을 모두 일본국적자로

처리했지만, 민족차별을 위해 호적을 일본호적과 조선호적으로 나누어 편제했는데, 이를 근거로 조선인을 제외시킨 것이다. 그 후 1956년 10월

일–소 양국이 국교수립을 하면서 발표한 "일–소 공동선언"으로 귀환이 이루어졌는데, 1957년 8월 1일부터 1959년 9월 28일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잔류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사망한 유골까지 송환됐다. 이때는 일본인과 결혼한 한인 및 그 가족의 귀환도 허용되어 일인과 결혼한

한인남자 및 그 가족 1541명만이 일본으로 귀환했다. 당시 일본은 한인을 외국인으로 취급했다. 즉 1951년 9월에 체결되어 1952년 4월 28일에

발효한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 제2조에서 일본은 조선(한국)의 독립을 승인한다고 한 것을 근거로 사할린 한인과 재일한인을 포함한 모든

한인의 일본국적을 박탈했다. 이미 이렇게 한인의 일본국적을 박탈한 상태에서 원칙적으로 한인은 귀환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게 됐던 것이다.

반면 남한을 점령하여 시정하고 있던 미군정청은 급격한 귀환민들의 증가가 가져오는 사회경제적 혼란(식량, 주택사정 등)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 후 이승만 정부는 1952년 한일교섭을 시작하여 식민지 지배 및 전쟁피해 배상에 대한 논의를 공식화 했다. 하지만, 일본이 소련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1958년 "재일조선인 북송문제" 등 북한과의 교류도 넓혀나가자 한일교섭은 중단되다시피 했다. 특히 "북송문제"를 비난하면서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승만 정부의 극단적인 배일정책과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는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했다.

 

(2) 기약없는귀향길:(19601988)

 

사할린에 남겨진 한인들은 냉전체제 하에서 질곡 깊은 운명을 겪는다. 그 단적인 예가 국적문제이다.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될 때 일본국적자였던

한인들은 종전으로 소련이 사할린을 편입하면서, 당시 소련국적법에 의하여 이들을 모두 무국적자로 처리하고 다만 신분증명서 뒷면에 "최종국적

일본"이라고 기록했다. 즉, 이 시점에서 사할린 한인은 일본의 국적법에 의하면 일본국적, 새로 영토를 차지하고 실제로 통치하는 소련의 국적법에

의해서는 무국적자였다. 그러던 중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을 계기로 사할린 한인의 일본국적을 박탈하여 일본의 관점에서는

외국인으로 만들어버렸고, 사할린 한인은 어느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무국적자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동지역의 개발과 노동력 손실을 염려한 소련은 사할린 한인에 대하여 소련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 소련 당국은

무국적자에게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어 국적취득을 유도했다. 무국적자의 경우 4Km이상의 여행을 금지했고, 소련의 어떤 법적 보호와 보장이

없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이러한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국민"으로의 포섭은 미국, 일본, 한국과의 경쟁 속에서 체제우위를 점유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종전 이후 남사할린에는 고향땅으로 돌아갈 배편을 기다리며 남았던 조선인이 2만3498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46년 12월9일

체결된 «소련지구송환미소협정»에 따라 귀환대상자는 «일본인 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한정됐다. 문제는 «일반 일본인»이라는데 있다. 일본은

일본 호적을 기준으로 일본인만 받아들였고, 당시 조선 호적으로 편제된 조선인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일본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 당시 일본거주 조선인은 일본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되어 있었다. 제일동포는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한

날 비로소 일본국적을 상실했다. 그해 일본법무성은 «조선과 대만은 평화 조약 발효의 날부터 일본국 영토에서 분리하기 때문에, 따라서 조선인과

대만인은, 일본 내지 거주자를 포함하여 일본국적을 상실한다»고 했다. 1946년 12월5일부터 1949년 7월22일까지 총 29만2590명의 일본인만 일본

땅으로 귀환했다. 이때 사할린 조선인들도 귀국자 대상이 되어야 했다. 다카키 겐이치에 따르면  "종전 후 1946년 말부터 "소련지구귀환미소협정"에

의해 사할린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일본 본토로 돌아가게 됐다. 당시, 일본본토는 미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 따라서 소련과의 일본인

귀국관련 교섭은 일본 정부가 아닌 도쿄에 있던 미군 사령부가 했다. 하지만 소련도 미국도 사할린의 조선인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할린의 조선인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일본 정부 또한 뒤에서 소극, 적극적으로 대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 미군도 사할린에 조선인이 남아 있다는 문제를 몰랐다. 사할린으로부터 GHQ(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에 «조선으로 보내달라»는 귀국요망이 들어오자, 도쿄의 GHQ는 서울의 미군사령부에 문의를 했다. 이때 서울의 사령부는 맥아더 밑에

있던 조직이었다. 서울의 미군은 전후의 혼란을 이유로 사할린의 조선인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도쿄의 GHQ도 그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정권은 조선인에 대해 차별정책을 취하고 있었는데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도 추방시키려 했기 때문에 사할린의

조선인에 대해서는 더더욱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소극적이란 말은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은폐하려 하는 등 조선인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는

뜻이고, 적극적이란 말은 미국과 소련측에 적극적으로 조선인을 제외하고 일본인만을 돌봐달라고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1956년 10월9일 구소련과 일본은 수교에 합의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1957년 8월1일부터 1959년 9월28일까지 잔류 일본인, 일본인과

결혼한 조선인, 그 가족의 귀환도 이루어져 1541명의 조선인만 일본으로 송환됐다. 결국 종전 이후 1990년 한·소 수교에 이르기까지 45년간 2만여명의

강제동원 조선인과 그 후손들은 사할린에 방치되어 세상과 대중의 기억에서조차 점차 멀어져갔다. 50 년이상 계속되어진 이산가족문제가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문제이다. 1945년 패전국 일본은 사할린에 억류된 일본인의 귀환에 매우 빠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일본 국적이었던

조선인들의 한국 귀환은 철저히 통제된 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패망 후, 한국으로 가는 배가 올 것이라는 소식에 수만명의 한인들이 코르사코프

항구에 모여들었지만, 그들의 희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소련은 전후처리에 의하여 남사할린의 영토귀속이 변경됐을 때, 국제관행인

영토변경에 의한 국적선택제도를 실시한 것이 아니라 소련 국적법을 일방적으로 적용하여, 거주 한인들을 일괄적으로 무국적자로 처리했다. 1950년대

이후 소련은 사할린 한인에게 북한국적을 취득할 것을 권장하고, 동시에 소련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당시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거부했던

일본 정부의 논리는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사할린 한인들이 모두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된 것은 아니므로 자유 모집에 응하여 자의로 이주한 사람과 강제동원된 사람 구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강제동원된 경우라 하더라도 일본 정부는 귀환의 법적 의무까지 부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 1946년 집단 송환시 일본은 연합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집단송환은 미·소간의 협정으로 실시된 것이며, 귀환 승선자의 선별은 소련 당국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으므로 일본 정부가 한인의 귀환 기회를 봉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의 억류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배경으로 하는 국제관계와 일제의 조선인 기민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생활고와 감시의 이중고 속에서도 소련 치하에서 사할린 한인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역시 고국으로의 귀환이었다. 한인들은 개인적으로 지방 당국에

"고국으로 놓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귀환 요청서"를 올렸다. 이에 대해 당국은 해당 "사업소의 당 조직이 한인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사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노동자들에게 정상적인 생활 및 생산 여건들을 만들어주지 못한 탓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진단하면서 소비에트 체제의

확산과 정상적인 삶의 여건이 조성되면 귀환의 염원도 함께 가라앉을 것으로 보았다(기아소[1], 4–1–344, 70면. 1947.9. 문서).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이 수집된 1950–1970년대 시기의 몇몇 행정기록을 통해 당시 역사적 사건들이 한인 사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한반도의 전쟁(6.25) 이후 공고화되는 소비에트 체제 속에 개인적 귀환의 열망은 공식적으로 표출되기가 더 어려워졌을 것이고

그 사이에 형성된 가족과 사회에 대한 다양한 관계망이 생존과 직결된 현실적 요구들을 불가피하게 수용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한인 귀환 운동의 중요한 시점이었다. 각처에서 한인들이 당국의 눈을 피하고자 친목회를 가장한 조직을 꾸려 문화 및 교육 활동에

나서는가 하면, 1950년대 말에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일본인 처와 결혼한 한인들이 사할린 한인 귀환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1960년대에는 개인들의 편지가 한국의 가족에게 전달됐다. 따라서 이 시기 귀환의 노력은 공공기록보다 개인적 소회가 토로된 자료 등

비공개된 민간 기록과 비교하여 조명될 필요가 있다.

1951년에 마카로브, 고르노자보드스크, 네벨스크와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지하 조선 공산당이 조직됐다. 이 조직은 반소 행위를 위한 것이 아니고

다만 사할린 한인들의 귀국을 위한 것이었다. 프로그램, 규약에 의해 활동했다. 공산당선언도 작성했고 “단결하자!”란 신문의 초판도 발행했다.

그 결과 25명의 젊은 조선인들이 입당했다.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사할린 방방곳곳에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소련 최고

기관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에게 우리의 조국으로의 귀환 탄원서를 여러 번 보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기관에서도 답변을 못 받았다.

그래서 사할린 조선인들은 단합하여 정치적인 대표들을 소련 최고 기관(모스크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평양), 한국 정부(서울),

일본 정부(도쿄)와 유엔(뉴욕)에 보내어 조국으로의 귀환 요구서를 전달하여야 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투쟁 없이 조선으로의 귀환은 거의 불가능하다".

소련 국가안전위원회(KGB) 사할린 지부는 이 조직을 불법이라 하여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신보균(20), 네벨스크에서 김영관(25), 마카로브와

고르노자보드스크에서 조선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을 채포했다. 신창우(24)와 김형주도 안기부에 소환(召喚)되어 신문(訊問)을 받았다.

신보균, 김영관, 김송매와 권명산은 1951년 소련 형사소송법 제58조에 의해 10년 형벌을 선고 받았다.  사할린 조선 공산당원들은 2003년에 복권됐다.

Син Чун У (24 года), Син Бо Гюн (20 лет), Ким Ен Гван (25 лет), Квон Мен Сан(25 лет)

[출처] 2014년 8월 15일 (음력 7월 20일) 새고려신문 (사할린 새고려신문) |작성자 baesoСин Чун У (24 года), Син Бо Гюн (20 лет), Ким Ен Гван

(25 лет), Квон Мен Сан(25 лет) [출처] 2014년 8월 15일 (음력 7월 20일) 새고려신문 (사할린 새고려신문) |작성자 baeso이 사실이 박형주의

«사할린 리포트», 진율랴의 “1951년 사변에 대한 진실”에서 밝혀졌다[2].


 

남사할린 코르사코프시 "망향의 언덕"에는 조각배 모양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이 언덕은 종전 직후 남사할린 전역의 조선인들이 어린아이와 봇짐을

등에 지고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 내려와 이제나 저제나 배편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곳이다. 대부분 남한이 고향인 조선인들은 고향땅도 밟지

못한 채 "동토의 땅" 사할린에서 추위에 얼어 죽고, 굶주려 죽고, 고향땅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다 죽어 갔었다. 강제동원된 지 70여년,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나면 이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고 증언할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현재 사할린섬에는 잔류 한인 1세 630여명을 포함해 후손 2만4천여명이

살고 있다. 1958년 일본인 처와 함께 일본으로 귀환한 박노학은 사할린 한인 동지들의 조국 귀환문제를 일본 사회에 호소했다. 당년 2월 6일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의 3인을 비롯한 약 20명의 사할린 귀환 한인들이 모여 "화태 억류 귀환자 동맹본부"(후에 "화태 억류 귀환자 한국인회",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이하 "한국인회")로 명칭을 바꾸었음)를 결성했다. "한국인회"는 동포의 귀환 촉진을 관계기관과 일본 사회에 대해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그 요구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응했고, 매스컴도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1975년 "한국인회"는 일본변호사연합회에

인권구제 신청을 했고, "사할린 억류자 귀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976년에 일·소 관계가 악화되어서 사할린 한인 문제에 소련 정부도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소련에서의 출국은 까다로워졌고 친족 재회를 위한 도항도 어려워 졌다. 바로 이런 상황이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준 사례가 "나홋카의 4인"

사건이다. 사할린동포 황인갑, 강명수, 백낙도, 안태식 4명이  소련 출국 허가를  받고   고향으로 귀국하기 위해 나홋카까지 갔으나 그 망향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왔었다. 1976년 6월 어느날 일본외무성 북동아시아과 시모무라 사무관은 그 4명의  문제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가

7월 5일(4명의 소련 출국기한)까지 한국입국허가를 내줄 수 있는지 알수 없다고 하면서, 여하간 나홋카에서 기다리는 4명의 신원보증을 서라는

것이었다. "한국인회" 박노학회장이 필요한 서류를 일본 법무성에 제출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본외무성은 이틀 후에 한국 대사관이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 4명은 할수 없이 사할린으로 되돌아갔다고 알리었다. 그들은 나홋카로 떠날 때 전재산을 처리했고, 연금과 거주권리조차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후의 생활이 어떠했겠는가 짐작할 수 있다. 재출국신청은 받아주지도 않았다. 당시 이 4명이 소련출국허가를 받았다는 것은 기적적인

사실이었다. 염원의 귀국을 하게 된 그들은 하늘에라도 올라간 기분으로 사할린을 떠났다. 나홋카에 일본 영사관이 있으니 거기서 허가를 받아서

일본으로 건너가려고 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한국으로의 귀환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사할린에서 직접  한국으로 갈 수가 없어서 일단 일본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매일매일 일본 정부의 입국허가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으나 소련 정부가 정한 출국기한까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사할린으로 되돌아 온후 일본 정부의 입국허가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소련이 출국허가의  연장도, 재발행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그후 사할린에서 사망했다.

안태식이 사망직전에 고향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일본 박노학을 걸쳐서):

"석환에게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서  궁금하구나.

이곳 아비는 고향에 돌아가서 너희들을 보고싶어 견딜 수 없는 심정이다. 힘을  다해서 노력해  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보람이 없구나.

날개라도 있으면  날아가겠는데, 가슴만 타지. 아마 여기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봐.죽으면 사망날자는 누군가 전할 것이다. 그런줄 알어라.

안태식 서신"

 



[1]  기아소 (ГИАСО) ㅡ 사할린주 국립 역사 문서 보관소.

[2] 박형주. 사할린 리포트. 유즈노사할린스크. 파인디자인, 2004. 43 – 45쪽, 진율랴. 1951년 사변에 대한 진실. 새고려신문. 2014년 8월 15일호.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미공개 상태이기는 하지만 한국 국가기록원에는 "기아소" 기록보다 더 많은 민간 기록이 수집되어 있다. 한국의 중소이산가족회

소장 기록과 일본에서 들어온 이희팔 소장 기록물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극적인 한 사건의 주인공인 도만상(都万相) 관련 기록물의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귀환의 염원과 노력의 처절함을 함께 느껴보고자 한다.

해방이 되고 사할린에 갖혀버린 조선인들. 우리 동포들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말 한번 제대로 못하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사할린에서는 1970년대 초반,

동포들 사이에 영주귀국운동이 시작됐다. 숨도 쉬기 힘들었던 그 시절, 한국으로 보내달라는 말이 나온 것은 한국 정부가 1970년 초반부터 사할린

동포들을 데려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한국 정부는 소련과 수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을 내세웠다. 원래 사할린 억류 조선인의 많은 수는

남한출신인데, 냉전시대 한소국경이 없던 상황에서 한국과 소련간의 직접적인 교섭이 어려워서 귀환운동이 제대로 성공적으로 완수되지 못했다.

특히 1970년대 전반까지 한국은 사할린 한인   억류의 책임이 원래 원인 제공자인 일본에게 있기 때문에 일본이 자신들의 경비부담으로 사할린 한인들을

돌려 보내는 데에 책임을 질 것을 요구했다. 반면에 일본 정부는 그들이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서 이들에 대한 귀환책임을 계속 회피하고

있었다. 특히 소련은 그 당시 냉전시대 적성국인 한국으로의 귀환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지만 반면에 원래 동원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일본으로의

귀환은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계속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사할린 한인들을 데려오려면 일본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국은 1976년경부터 경비부담 같은 것은  더 이상 일본 정부에 요구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귀환운동에 나서달라, 중개역할을 해 달라»는 적극적

자세를 촉구했고 일본도 그때부터 자세변화를 보여서 이들이 일단 일본으로 귀환하기 위한 증명서 발급을 해주겠다는 적극적 자세로 변했다.

계속 소련은 그 당시 일본으로의 귀환은 인정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귀환을 원하는 많은 사할린 한인들이 우선 일본을 거쳐 고향을 갈 수

있다는 희망에서 귀환운동이 그 당시 크게 벌어졌다. 이렇게 1975년에 한국에서 사할린에 사는 동포들을 초청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갈 사람 신청하라는 광고가 붙었을 때 소련 정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천명의 한인들이 한국을 가겠다는 신청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소련 정부가 판단하기에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은 사할린에 남으리라 판단했는데 한인들은 가족단위로 영주귀국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 전부터

일본 방송을 듣고 많은 사할린 한인들이 일본을 통해서 한국을 가자고 신청을 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귀환을 원하는 많은 사할린 동포들이 우선 일본을

거쳐 고향을 갈 수 있다는 희망에서 귀환운동이 그 당시 크게 벌어졌다.

이에 대해 사할린주 당국은 해당 «사업소의 당 조직이 한인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사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노동자들에게 정상적인 생활

및 생산 여건들을 만들어 주지 못한 탓»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진단하면서 소비에트 체제의 확산과 정상적인 삶의 여건이 조성되면 귀환의 염원도 함께

가라앉을 것으로 보았다(기아소, 4–1–344, 70면. 1947.9. 문서).

그러나 이 시기는 한인 귀환 운동의 중요한 시점이었다. 사할린 각처에서 한인들이 당국의 눈을 피하고자 간친회로 위장한 조직을 만들어 문화 및 교육

활동에 나섰다. 1957년 8 월부터 1959년 9 월까지 총 2345명이 2년 동안 일본인 부인과 함께 한인 동포들, 그리고 자녀들이 일본으로 귀국했다.

1958년에 일본으로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이 일본인 아내와 함께 귀환했다. 박노학은 일본에서 사할린 동포들을 귀환시키기 위하여 '가라후토 억류

귀환 한국인회'를 결성했다. 그들이 사할린 한인 귀환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1960년대에는 개인들의 편지가 한국의 가족에게 전달됐다.

그중에서 비극적인 한 사건, 즉 한국귀환운동 주동자 가족 소련첩보당국에 의해 북한으로 비밀리 추방에 관련의 주인공인 도만상(都万相) 일행을

소개한다.

이 사건은 1977년 소련당국에 의해 북조선으로 강제 추방된 사할린 한인 들의 이야기이며, 현재 생존해 있는 1 세대인 허갑순(93) 할머니의 애닲은

심정을 담은 모자 찾기에 비롯돼 1990년 소련 KGB중앙본부로 송달된 «북조선으로 끌려간 가족찾기 호소문»과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시도렌코

시장에게 건의되면서 최초로 공개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그후 1996년 2월 28일 러시아 외무성 에.프리마코브 장관에게 북한으로 추방된 사할린 한인

 5가족 40인의 행방을 찾아 달라는 요청서를 보내었고 2002년 5월 17일 LA 한민족국제포럼에서 «사할린 한인 의 영주귀국 및 보상현황과 그에 대한

우리의 요구»라는 발제문에서 잠시 언급되어 해외동포들에게 높은 관심을 가진 바 있었으며, 2004년 4월 7일 러시아 연방국회의원 이.쥐다카예프로부터

1977년 구 소련 정부에 의해 통행통제소 «하산»을 거쳐 북조선으로 전송됐던 5가구 40인의  사할린 한인  생사여부의 질문에서 당시 40인은

소련내무성에 의해 추방당했고 사할린 KGB지부와   사할린주내무소의 합작경호 하에서 실행됐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27년이란 세월이  지나 고문서를 없앤 상태라 더 이상 상세한 정보는 알려 줄 수는 없다는  사할린주내무소 여권.거주증(오비르) 담당부장

무스타핀으로부터 통보 받았다. 또한 1990년 KGB 중앙본부는5가구 40인의  확인은 인정되나 소련 정부의 권한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대책을 강구하고

북조선과의 외교절차에 따라 소련외무성과 KGB는 정확한 답변은 많은 시간이 요구되므로 필요시 다른 기관인 소련적십자사에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당시 소련 정부와 KGB는 우방관계인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의식해 또는 소련 정부가 개입된 사실이 국제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북한으로

추방당한 사할린 한인 들의 북조선 추방을 숨기기에 바빴던 것으로 생각된다며 생사여부를 물었던 의뢰인들은 밝히고 있다.


1999년 6월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사할린 한인  국제문제»라는 국제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되어 러시아. 한국의 학자들과 변호사들이 참여했는데

한국측에서는 지익표 국제변호사와 노영돈 법학과 박사가 참여하여 결의문을 일본수상, 러시아대통령, 대한민국대통령, 유엔기구 사무총장에게 각각

보낸 바 있다. 이 결의문에는 일본은 강제징용과 만행의 책임을 묻고 미국은 전후 일본과 한국을 통할하면서 잔류한인들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던 책임과 한국은 사할린 한인들을 고국으로 마땅히 귀환시킬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 22일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회담으로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보상을 일본에 면제해  줌으로 물질적 보상책임을 벗어나게 한 책임을 명백히 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마음대로 쓰다가 필요없는 한인들을 버리고 해방 후  사할린 «가미시스카»(현 레오니도보) 촌과 «미즈호»(현 포자르스코예)

촌에서 죄없는 한인들을 소련스파이 죄를 덮어 씌워 45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었으며, 소련은1946 – 1949년 일본인들만 본국으로 귀환시켰고

일본인 귀환으로 인구가 감소한 사할린 섬의 파괴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값싼 노동력을 한인으로 대치시켰다. 그리고도 포기하지 않고 숨 죽이며

고국의 라디오를 몰래 들으며 끊임 없이 고국가기만 기다렸고 그 열망은 한시도 식지 않았고 그러다 소련당국은 갑작스레 조국으로 귀환하고 싶은 자는

지역 OVIR(내무소)에 요청하라는 통보를 하게됐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한인들은 벌때처럼 몰려와 수 천명이 한국귀환을 신청했다. 하지만 소련당국은

공산주의 낙원을 버리려는 남한출신이 대다수인 한인들을 심리적 처벌을 가하기 위해 열성 귀환  주동자 가족5가구 40인을  지목해 정신병원에

감금하면서까지 하며(도만상(1911), 배상태(1916), 도미자(1940), 도규식(1946), 도태자(1943) 고문을 강행했고 소련당국의 지시에 의해

사할린KGB지부와 사할린주내무소의 합작음모에 희생되어 선량한 한인들이 북조선으로 추방됐다. 이로써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할린에서 북한으로

추방된 5가구 40인에 지역별로는

코르사코프시홈스카야거리 14 동, 9명: 도만상(1911), 배상태(1916), 도미자(1940), 도규식(1946), 도태자(1943), 도윤식(1949), 도미례(1952),

도윤류(1955), 도황구(1957);

홈스크시마트로소바거리 4a동 34호, 6명: 이창남(1931), 이미자(1963), 이수자(1937), 이성갑(1937), 이분녀(1957), 이분자(1959);

포로나이스크시 말로쉬콜나야 6동, 7명: 김일수(1926), 한도하(1938), 김옥녀(1963), 김옥남(1966), 김태운(1968) , 김옥순(1958), 김옥금(1961);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사도바야거리 28a동, 6명: 유길수(1925), 유춘형,(1968), 김경순(1930), 유강영(1954), 유상영(1956), 유천영(1959);

유즈노사할린스크시사할린스카야거리 153동, 12명: 황태령(1921), 황명순(1954), 황성운(1959), 황광운(1947), 신영자(1952), 환동석(1975),

황인나(1977), 허동화(1948), 황순읍(1950), 허헤성(1975), 황춘운(1957), 허올가 동화예브나(1977) 등 총 40명으로 밝혀졌다.(본 명단은 1990년 7월에

사할린주 OVIR가 사할린주 한인협회의 청구에 답변한 것을 인용했음) 사할린 한인사에서 도만상은 유명한 인물이다. ‘도만상 사건’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그는 1977년 자신과 가족이 포함된 총 5가구 40여 명의 북송 사건을 대표한다. 자신의 남한 귀환을 주장하며 코르사코프 시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귀환 운동에 앞장섰던 도만상과 그 가족은 1977년 1월에 소련 당국에 의해 전격적으로 북송됐다.

도만상은 1911 년 02월 23일 경북 성주군 벽진면에서 태어났다. 1937년경 조선에서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생활하던 그는 1942년 사할린 니시나이부치

〔西內淵〕(현 자고르스키) 탄광으로 동원되어 1945년 해방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소련 치하에서 코르사코프시에 정착했고 도만상이 가까이 지냈던 인물

중에는 박노학과 이희팔이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두 사람은 1958년에 일본에서 한인의 귀환 운동을 시작한 장본인이다. 도만상은 사할린주

코르사코프시에서 오랫동안 여려 직장에서 영접공, 목수로,  박노학은 이발소에서 일했다. 두 사람은 박노학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박노학을 돕는 적극적인 귀환 운동가로 활동하는 한편으로 자신과 가족의 귀환을 모색했다. 박노학이 1961년에 사할린을 방문했을때 도만상은

자기 집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한국에 남긴 친척들에게 보낼 사할린 한인들의 편지들과 귀국 신청서들을 전달했다.

그러던 중 소련이 귀국 희망자 신청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귀환을 위해 적극 나섰지만 노력이 무위로 끝나자 1970년대에 과감하게

코르사코프시청사 앞 시위 등으로 자신과 한인들의 염원을 알렸다. 당시로서는 거의 무모하다고 할 도만상의 활동은 1977년 1월 27일 본인과 가족,

그리고 그와 깊은 관련을 맺고 귀환의 노력을 벌였던 다른 한인 총 40명의 강제적인 북한 송환으로 돌아왔고, 지금까지 북송된 이들의 생존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과 한국에서 수집된 개인 기록들에서 도만상의 기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록들을 시계열적으로 살펴본

결과,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방일권, 기록속의 사할린 한인, 103쪽) 도만상에 관한 기록 중 시간적으로 가장 앞선 것은

1966년도에 일본에서 박노학이 작성한 «화태억류동포귀환희망자명부» 속의 기재 내용이다. 도만상이 이미 1960년대 전부터 일본과 여러 차례 서신

교환을 했음을 보여준다. 앞서 간략히 소개된 도만상에 대한 소개는 이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다음으로 이번에 수집된 민간 기록들 속에서 나온

도만상의 개인 편지들이 있다.

1974년에 발송된 그와 가족의 이름이 병기된 귀국 청원서 형식의 편지와, 이희팔 앞으로 보낸 새해 축하 카드가 그것이다. 그 내용은 사할린에서 일본의

박노학과 이희팔 등에게 발송된 다른 개인들의 편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주목을 끄는 기록은 1975년 3월 25일로 작성일이 표기된 이희팔 수신

편지이다:

«박노학 씨와 이희팔 친구에게

… 동일한 편지를 3통 보냈으나 받았는지 알 수 없어 다시 편지하네. 사할린에서 모스크바 소련 상임위원회에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약 15일 가량이 지나자 豊原(유즈노–사할린스크) 외국인 취급소인 오비르에서 직접 찾아와서 일본에서 일본입국소환증명서를 요구한다고 했네.

그러하니 일본입국소환증명서를 구할 방법이 있겠는가? 일본 입국소환증명서만 있으면 일본으로 가려는 희망자는 나갈 수 있다네. 다음으로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청원한 사람은 소련과 한국이 수교를 하면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군. 친우여 일본입국소환증명서 한 장 만들어 보내 주시게.

꼭 부탁하네. 일본입국소환증명서가 준비된다고 해도 개인에게 발송하게 되면 도중에 유실되는 경우가 있으니 소련 주재 일본 대사관으로 보내주어야

하네».

자신이 «일본 입국소환증명서를 구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 편지는 당시의 분위기와 도만상의 귀환 노력을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있지만 이제껏 알려진

것 보다 훨씬 구체적인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우선, 일본인만 귀환시킨 소련에 대해 한인들이 체념 상태로만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인 중에는

도만상과 같이 소련 중앙 기관에 더욱 적극적으로 귀환 요청을 올린 사례가 있었고, 한인의 청원 소식이 외국인 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외국인 등록처

(OVIR)에 전해졌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귀환의 방법에 대한 당국자 간 연락도 진행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편지의 내용을 통해 기존 명부에

기록된 도만상 관련 내용의 불명확한 의미를 해독할 수 있다. 즉 «화태억류귀환희망자명부»의 916번으로 기재된 도만상 관련 비고란에는 도만상의

동서, 처남 등 친척의 이름과 ‘1976. 7. 15, 日本入國 許可, 10名’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즉 도만상이 북송되기 반년 전 쯤 박노학 회장 등은 10명의

일본입국 허가와 관련된 자료를 발송하고 곧 그를 일본에서 만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노학 회장이 발송한 자료가 도만상의 손에까지

도착했는가는 확인되지 않지만 1976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시청 앞에서 벌인 도만상 개인의 시위가 이 자료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되는 일이다. 일본 입국 허가 자료가 자신과 가족에게 한정된 기록이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도만상은 소련의 지시를 모두 이행했음에도

출국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을 단지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방일권, 기록속의 사할린 한인, 103쪽) 북한에 추방당한 40명 중

1950–60년대에 북한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 대다수다. 북한은 소련 정부의 협조를 받아 나홋카 영사관의 영사 리태식을 파견하여 희망자들에게

즉석에서 북조선 공민권을 발급했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조국은 분단됐지만 곧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선전을 믿고 북한을 통해서라도 조국으로

간다는 희망 때문에 북조선 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무익한 희망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사람들은 대량으로 북한국적을 거부했다. 도윤식(1949)과

  도미례(1952)는 이미 소련 국적을 취득하여 대륙에서 재학 중이었으나 강제적으로 소련국적을 북한국적으로 전환시켜 북한으로 추방당했다.

도만상이 그들을 한국귀환희망자 명단에 올렸기 때문이다. 도만상의 맏아들 도찬영(1938)은 그 명단에 들어있지 않아서 유일하게 사할린에 남게

됐는데 자기의 추방당한 부모형제의 생사확인도 못한채 2006년 코르사코프시에서 세상을 떴다.

«남편의 평생 소원이었던 귀국은 큰 아들(허동화, 1948)의 피맺힌 노력의 결과이었습니다. 개방이 되지 않았던 시기부터 아들은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소련당국에 한국으로의 영주귀국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소련당국은 우방국이었던 북조선 기관에 의뢰하여 아들 가족을 비롯해

영주귀국운동에 기담했던 40명의 가족들을 북한으로 추방하게 됐습니다. 며느리와 겨우 3개월된 손녀와 1년3개월의 어린 것들을 데리고 다시 오지 못할

북한으로 추방(1977)하게 됐던 것입니다. 아직도 러시아 당국과 북조선은 이 사건을 두고 아무런 대책과 보상도 없이 오늘날까지 묵묵부담(모르쇠)

입니다. 그로부터 그 한 많은 일생을 발자국 소리에, 차지나가는 소리에, 비행기 소리에 그저 아들이 돌아 올 줄만 알았습니다….

2009.11.30. 러시아 사할린에서 허갑순».

(허갑순 할머니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과 대한 적십자사 유종하 총장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가 강점한 조선반도 3천만 인구속에서 강제로 차출되어 끌려가 우리 민족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모진 고통과 희생을

당했지만 그동안 모국과 7천만 동포들로부터 잊혀진 민족이 되어 왔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보상도 받지 못한채 죽기전의 한을 풀고자 어렵고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 이후 사할린에서의 한인 귀환운동은 얼어붙고 말았다.

1970년대 초에 사할린 한인의 귀환은 억류 당사국인 소련의 유연한 입장선회로 새로운 희망을 기대할만한 상황을 맞았다. 일본 수상 다나카(田中)와

소련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의 면담에서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가 언급되고, 한국내에서도 1973–1975년 사이에 200여명의 사할린 한인을

귀국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소련 측의 입장이 바뀐 배경으로서 경제적인 측면이나 체제 경쟁에서 남한에 비해 월등한 상태임을 자신했던

소련이 이미 사반세기 이상 사할린에서 정착한 온 한인들에게 인도적 제스처로서 귀환의 가능성을 언급한다고 해도 그 호응은 크지 않으리라는 예상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한인 귀환 희망자들의 청원이 쇄도하자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했고, 도만상 사건은 소련의 그 같은

의도를 단번에 구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도만상의 가족(1954년) (2014.04.02. 김정자 소장)

 

▲도만상의 가족(1961년) ( 2014.04.02. 김정자 소장)

그런데 이번에 일본과 한국에서 수집된 개인 기록들에서 도만상의 기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록들을 시계열적으로 살펴 본 결과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수집된 기록 중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자료는 오성호라는 이의 편지다. 1977년 2월 13일에 작성된 이 편지에서 작성자는 도만상이 "수차 일본으로 보내라고 요구한 결과에 금년 1월 27일에 일본으로 보내지 않고 북조선으로 보냈습니다"는 내용에 이어 "이 문제 때문에 이곳 ... 다른 분들이 겁을 내고 있다"고 적고 있다(오성호의 1977.2.13자 편지, 이희팔 5–6–1, 258–260면).

 

▲한인 귀환에 대한 일체의 보도를 금지하는 1952.11.11자 지시문(기아소, 131–1–3 일부), 도만상이 박노학에게 보낸 일본어 편지(1975.3.25, 부분)


나홋카의 4명의 사건, 이 비극을 가져온 것은 일본, 소련, 한국  정부의 무정하고 야박한 태도의 결과다.

1950년도 말 북한은 사할린 한인들에 대하여 국적취득을 적극적으로 선동했다. 1958년에 소련 연해주 나홋카에 북한 영사관이 개설됐다. 북한은 영사관

선전요원까지 파견하여 사할린 한인들에게 유학, 취업 등의 혜택을 빌미로 북한국적 취득을 유인했다.

그때부터 총영사관 서기관 리태식이 사할린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선전했다. 그리고 북한의 임의의 대학에 무시험 입학시켜 주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했다.

그 바람에 사할린 조선 중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북한 국적을 획득해 큰 희망을 걸고 유학을 떠났다. 조국에 가서 모국어를 계속 공부하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었다. "마음대로 대학을 선택할 수 있고 1 년이 지나면 부모 방문을 허락하겠다고 했는데, 그 어느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사할린에 돌아오겠다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국경을 넘어오다가 붙들렸다는 소문이 나돈 뒤 행방불명됐다"고 유즈노사할린에서거주하는 한

여인이 자기 동생에 대해서 말했다.

영주하고 싶은 가족들을 데려갈 목적으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대표단은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서 집중적인 선전사업을 펼쳐놓았다.

그 허위선전에 빠진 많은 젊은이들과 가족들은 앞으로 선조의 땅 대한민국으로 넘어갈 희망으로 북한으로 떠나가게 됐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사할린 친척들과의 연락도 끊어지게 됐다. 1000여명의 사할린 청년들이 북한의

탄압 정책에 견딜 수가 없어 두만강과 압록강을 불법적으로 건너다가 총살당했거나 붙잡혀 처형됐다는 소식이 사할린 한인 부모들을 후회하고

한탄하게 했다. 한겨울에 만주의 강추위에 얼아붙은 강을 건널 때 조선 국경 수비대원의 총알을 맞아 죽지 않으면 중국 군인에게서 총살을 당했고

다행히도 아무르강 소련 국경을 넘을 때는 소련 수비대원이 총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는데 소수의

학생들이 소련 블라고웨센스크시 부근이나 연해주에서 국경을 무사히 지냈다. 사할린주 포로나이스크시에서 만난 한 청년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평양에서 예술대에서 조선 전통 무용을 전공했는데 북한 김일성 주체 사상에 적응되지 못해 탈출을 시도했다. 두만강을 건널 때 두 발에 동상을

입게 됐다. 겨우 목숨을 구해 소련 하바로프스크 변강에 입국해서 일년 이상 치료를 받아 전에 살았던 포로나이스크시로 돌아왔다.

그 후 카자흐스탄 알마띄 조선 예술단에 취직하여 조선 무용을 가르쳤다고 한다.

북한으로 이주한 사할린 한인 대다수는 행방불명됐다. 그들의 생사를 알 수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북한 국적을 획득하여 그들을 찾으러 갔었다.

"외무성으로 교화소로 별곳을 다 찾아다니며 탐문했으나 누구도 대답을 주지 않고 손만 내벌린다는 것이었다. 동생이 필경 월경하다가 총살됐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 그는 돌아오자마자 북조선 공민증을 내던져 버렸다"고 권모란 사람이 증명했다.(장윤기 "환향길 50년").

이전 일본국적을 갖고 있었던 나머지 한인들은 운명의 농락에 맡겨 버린 채로 됐는데 다음 그들은 무국적 신분이됐고, 1960–70년대에 와서는

고향으로 귀국할 아무런 희망을 잃은 사할린 한인들은 드디어 소련 국적을 내야만 했다.

이러한 소련과 북한의 국적취득 정책으로 1973년에는 소련국적 35%, 북한국적 50% 무국적 15%로, 85%의 한인이 소련이나 북한국적을

취득했으나, 1990년대 들어 소련이 붕괴되자 사할린 한인은 극소수 예외적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러시아국적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인 1세(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들은 한국국적법에 따라 소정의 절차와 기간이 지나 한국국적자로 됐다.

이처럼 사할린에 정착시키려는 소련과 북한으로의 유입에 대한 유혹 속에서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1977년에는 한국으로의 영주귀국을 요구한 도만상 가족 8명을 북한으로 강제 추방했고,

같은 해 그 외에도 황태용, 유길수, 김일수, 이창남 가족들도 북한으로 강제 추방했다. 이와 같이 냉전시대에는 그들의 귀향길은 보이지 않았다.


4)사할린한인문제해결을위한노력들

 

(1)일본에서의노력

 

1975년 12월 "사할린억류귀환한국인회"(대표 박노학)가 사할린 코르사코프 거주의 엄수갑 등 4명이 일본 국가를 상대로

"사할린잔류자귀환청구소송"을 동경지방재판소에 제기하면서 사할린 한인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운동이 본격화됐다.

1975년 다카키 게니치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사할린 억류자 귀환 청구 소송»이란 법적 공방이 시작됐다.

1사할린재판(«사할린 잔류자 귀환 청구 소송»)은 사할린 억류 한인 4명(엄수갑73, 이덕림61, 조경수53,이지면64)을 원고로 하고

일본국을 피고로 하여, 1975년 12월 1일에 제기됐다. 청구의 취지는 «원고들을 일본으로 귀국시키라»는 것이었다. 청구의 원인으로서는:

피고는 국방 목적 달성을 위해 전시에 인적 및 물질적 자원을 통제•운영, 당시 한반도의 평범한 농민들이었던 원고들을 사할린으로 강제연행,

패전 후 그곳에 방치, 그당시 원고들은 분명히 일본 국적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일본국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원상회복의 조치를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원고들을 귀국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1976년 2월 20일 일본국의 답변서에는 본 청구는

피고 일본국에 대해 작위를 명하는 판결을 요청하는 급부의 소인데 내용과 범위, 양태가 명확하지 않고 그 실현을 위해서는 소련과의 외교교섭이

필요하므로, 이 것은 결과적으로 재판소가 피고 일본국에게 명하는 것이 되는데 삼권분리 원칙에 따라 재판소가 행정권에 내리는 것이

부적법하다라고 형식논리적인 법률론으로 대응한 글이 있다.

당년 4월 2일 일본국은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한다는 판결을 재판소에 대해 요청하면서 왜 일본국이 책임을 질 수 없는가에 대해 설명했다.

패전 후의 귀환은 연합국의 책임 아래에 이루어졌고, 일본국은 관여할 수 없었다.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에 의해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국적을

상실했고, 일본국은 사할린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원고들의 귀환 실현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래, 한국 정부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사할린 한인들에 관한 협력을 요청받고 소련과 접촉하는 등 가능한 한의 외교적

노력을 계속해왔지만, 소련측의 무반응으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1975년 이후 귀환 소송은, 그 동안 일본 국회 다부찌 데쯔야, 마쯔자와 야스지, 도가노 타이지, 구사카와 쇼조 등 의원들이 국회에서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일본 정부를 추궁했다. 1978년 당시 외무성이었던 소노다 나오가 이 문제를 «행정 당국은 인도적 문제라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는 인도적 이상의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고 확실히 말했다. 1983년에 “아시아에 대한 전후 책임을 생각하는 모임”이

발족됐고, 1987년 7월에는 야스아키 오누마 교수와 다가키 겐이치 변호사가 조직한 일본 국회 내에 초당파 의원 모임인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문제 의원간담회»(177명, 하라 분베 회장, 이가라시 코조 사무국장, 하토야마 유키오 사무국차장)가 발족해 활발한 활동이 펼쳐졌다[1].

이 의원간담회는 소련 정부와 접촉하여 출국규제완화를 건의했고, 한국 정부와 북한 정부의 이해를 구하면서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을

이끌어냈다. 1985년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추진되면서 사할린 잔류 한국인의 일본 방문이 완화되어 한국에 남은 가족과 상봉할 수

있게 됐다.

2사할린재판(«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보상 청구 소송»)으로 1990년 8월 29일에 보상소송이 제기됐는데, 원고로는 사할린 억류 한인 및 그들의

유족 혹은 가족 등 21명이고 일본국이 피고가됐다. 청구의 취지는 «피고 일본국은 원고들에 대해 각각 1천만엔을 지불하라»라는 것이었다.

청구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피고 일본국은 1910년 한국병합조약을 조인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2. 피고 일본국은 다수의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3. 피고 일본국은 패전 후 일본인들을 귀환시키면서 한인들은 불법적으로 귀환시키지 않았다. 4. 피고 일본국은

오랫동안 원고들의 가족 재회•고향 방문의 희망을 유리해왔다. 5. 피고 일본국이 고용기간이 경과되면 귀환시킨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포츠담 선언» 제 9항의 «일본국 군대는 완전히 무장해제된 후 각자의 가정에 복귀하여 평화적이고 생산적인 생활을 영위할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

«일본국헌법» 전문의 «우리들은 평화를 유지하고,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협을 지상으로부터 영원히 제거하고자 노력»해야할 책무 및 국제관습법상의

«인도에 대한 죄»에 기초한 의무의 위반이다. 6. 피고 일본국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소련측이 일본이 받아들인다면 귀환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고들의  입국을 거부했다.

원고들은 자기의 의지에 반한 전쟁에 참가•협력, 강제 고향 이탈과 가족의 이산, 이에 따른 정신적•물질적 고통, 직업 박탈에 의한 재산상실, 일본의

패전 후 귀환을 불법적으로 방해받고 50여년간 망향의 설움을 격었다. 일제시대에 사할린 한인들은 가라후토에서 벌목, 탄광, 광산과 군사부지

건설등 고된 노역에 인해 신체장애인이 되고 건강을 잃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됐다. 이로 인해 유가족은 고통스러운 삶을 강요당했다.

남편, 아버지 혹은 아들을 잃은 고통에 대해 일본국은 1천만엔의 보상금을 지불해야 한다. 이 소송에서 다투어진 법적 쟁점으로 피고가 원고들의

귀환권리를 침해한 이유로 국가배상청구권의 성립 여부, 피고의 귀환시킬 의무의 불이행에 기초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성립 여부,

«인도에 대한 죄»의 위반에 따른 국제관습법에 기초한 보상청구권의 성립 여부인데 피고측은 여러 모로 반박했다. 그 결과 보상소송은

1995년 7월14일에1심판결이 선고되지 않해서 종결됐다. 이 보상소송은 여론을 환기시키고 재판과정에서 역사의 진상을 밝혔고, 사할린 잔류

한국인에 대한 전후보상에는 의원간담회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그결과 1993년도 추경예산에서32억엔의 영주귀국 시설건설비를 확보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귀국한 고령자들에게 항공비와 거주지 아니면 가구를 부담한 것이 실질적으로 보상 일부의 시행이라고 이해한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이 후에는 일본 정부가 자금을 대어 한일 양국 적십자 공동사업체도 발족했으며, 한국 정부의 협력을 얻어 서울과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오가는

전세기가 월 1회 운항돼 정기적 고향방문사업이 실시됐다. 1999년 인천 사할린 복지관, 2000년 2 월 안산시 1000명 수용 아파트  «고향 마을»,

2005년 11월 4일 사할린 한인 문화센터가 일본 정부가 38억 5000만엔의 예산을 책정한 건설비용으로 완공됐다. 이 사업이 금년 까지 약 20년간

유지되고 있으며 15,000명 이상이 고향을 일시 방문했고, 약 4300여명이 영주귀국하여 한국 24 곳에서 손자녀들과 생이별한 채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이  영주귀국에서는 진전이 있었으나, 귀국 후 극심한 생활고로 고향을 찾아 친지들과 만나 아이들에게 용돈조차 줄 수 없는 상태이다.

3사할린재판(«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우편저금 등 보상 청구 소송»)이 2007년 9월 25일에 제기됐다. 우편저금 소송은 사할린 및 일본 거주

한인(7인)과 한국에 영주귀국한 한인(4인) 등 11명을 원고로 일본국을 피고로 하여 청구의 취지는 «피고는 원고들에 대해 최저 12만 8640엔부터

최고 865만9400엔까지 총 2804만8720엔을 지불하라»라는 것이다. 원고들은 청구의 원인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제시했다.

1. 피고는 1905년 9월 5일의 포츠머스조약의 결과 남사할린의 영유권을 취득했고, 1910년 8월 군사적 강제에 의해 일한병합조약을 조인하게 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한 후,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하여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강제적으로 피고 일본국이 관장하는 우편저금과 간이보험에 가입하게 했다.

2. 패전 후 피고 일본국은, 소련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 사할린에 관해, «평화조약» 제2조(c)를 통해 그 영유권 등 모든 권리•권한•청구권을

포기하고, 제4조(a)를 통해 그 주민이 보유하는 재산의 처리에 관해 소련과의 사이에 특별협정을 체결할 의무를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민인 억류 한인들의 청구권을 현재까지55년간 계속 방치했다.

3. 원고들의 우편저금과 간이보험은 피고 일본국의 관장 아래 있다가 1947및 1949년 피고 우정공사의 소관으로 옮겨졌으며, 동시에 그 원금 및

이자의 지불을 피고 일본국이 보장하는 것으로 됐다.

4. 피고 일본국은 일본국회에서의 발언 등을 통해, 원고들의 우편저금과 간이보험이 확정채무이며, 피고 일본국에게 지불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5. 1998년 3월 19일에 센고쿠 요시토 의원이 사할린 잔류 한국인의 미지급 우편저금과 간이보험에 대해 국회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우정성

저금국 담당자는 미지급 우편저금의 계좌수가 1997년 3월 현재 우편저금이 59만 계좌로 현재 잔고가 1억 8700만엔이며, 간이보험은 22만 건으로

1억7000만엔이라고 답변했다. 다카키 켄이치 변호사는 1940년대 초반 인구비례를 근거로 상기 1억 8700만엔의 1/7 정도가 사할린 한인의

우편저금이라고 추정한다.

6. 1945년 당시와 현재를 비교할때 화폐가치가 2000배 이상에 이르렀다는 것을 고려할때 피고인은 원고들에게 우편저금의 액면 가액에

2000배를 곱한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7. 1945년 8월 15일 이후 피고들이 원고들에게 환급장소, 방법을 통지•고지등에 의해 알리지 않았으므로 원고들은 오늘날까지 우편저금의 환급을

청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피고들이 원고들에게 2000배를 곱한 현재의 화폐가치로 금액을 지불받을 수 없게 된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이에 피고들은 아래와 같이 반박했다. 채권의 존재및 그 상속관계를통장 등에 의해 입증하고, 조치법에 의해 그 권리가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경우에는 금액을 지불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다. 원고들이 구소련(러시아) 국적인 경우 위에 지적한 금액을 지불할 수 있지만,

한국 국적일 경우(한국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들도 포함) 그들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이 소급 적용돼, 일본에 대해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다고 피고들은 주장한다. 사할린 한인의 개인 청구권 문제에 대해서는 동 협정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며, 국가의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청구에 응할 의사가 있음을 표시했다. 이에 한국 외교통상부는 2010년8월 4일의 답변자료에서 «사할린 한인의 개인 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일본 정부에 반환 책임이 있으며, 한일청구권 협정은 서명일을 기준으로 존재하는 양국 및 그

국민간 재산권을 대상으로 하는바 한국 정부는 청구권 협정 서명일 이후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을 이유로 재산권이 소멸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입장을 2009년 9월에 서면으로 제공했으며, 원고측은 이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우편저금•간이보험의 경우 일본 정부로서도 환급

의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법적으로 볼때 원고 승소의 가능성이 높다. 이미 전후 65년이 지나 전쟁 전에 갖고 있던 우편저금통장 등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사람도 매우 적어 소련 시대에  우편저금을 폐기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가라후토 우편저금의 원부를 사할린에 방치해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다수 우편저금 채권자들이 이미 사망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본 정부는 사할린 잔류 한국인에게 귀속되어야

할 금액(100억 내지 200억엔)을 기금으로 제공해야 하고 당사자 및 그 자손들에게 적정금액을 지급하는 한편, 사할린 잔류 한국인을 위한 아파트

건설, 자손들의 교육지원 및 영주 귀국자 생활지원을 해야 한다.

1990년 8월28일, 최초의 «전후보상재판»으로 불린 «사할린 잔류 한인  보상청구소송»이 진행되지만 원고 21명으로 구성된 이 소송 또한 1994년

취하한다. 당시 일본 정부가 사할린 한인 관련 «50주년에 관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어 재판 결과가 부정적일 경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원고 측에 소송 취소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50주년 파일럿 프로젝트»라는 당시 일본의 지원책에는 영주 귀국자와 사할린

잔류자에 대한 지원, 사망자 유골 송환 등 포괄적인 내용이 있었다는 증언들이 이어지고 있으나 문서로 공식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세 번째로2007년 9월25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우편저금 등 보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우편저금에 관한

일본 우정성의 조사(1997년 3월 현재 59만계좌, 액면가 1억8000만엔)를 근거로, 강제 적립된 우편저금과 간이보험 등에 대한 소송을 통해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사할린 한인 기금»을 설치해 사할린 잔류 1세와 후손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사업에 총 700여억원을 지원했다. 2000년 안산 사할린 «고향마을» 건물 건립비 32억엔,

2005년 «사할린 한인 문화센터» 건설비 6억엔, 일시모국방문사업비, 2007년 재개된 영주귀국사업 항공료, 정착 관련 일회성 물품 및 생필품

지원비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일본 정부는 수만명에 대한 법적 배상책임과 전후 방치책임을 애써 외면한 채 제할 일을 다 했다는 표정이다.

«90년 한·소 수교 이래 한국 정부의 대응을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수교 당시 최소한 수만명의 운명이 걸린 «사할린 한인 관련 법적지위협정»

체결은 외면한 채 일본 정부가 제시한 대로 한·일 양국 적십자사를 사업주체로 하는 반쪽짜리 «영주귀국사업» 수용이 정책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 차원의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안» 논의 과정에서도 과연 모국 정부인지를 의심케 하는 발언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사할린동포 2–3세대의 국적 이탈을 조장할 수 있는 등 러시아와의 외교적 마찰 가능성, 사할린 한인 1세(1945년 8월15일 이전 출생자)인 기존

영주귀국자와의 형평성,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일본 정부와의 지원 중복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등등…                                                                                                                                                                                               

2000년 안산 사할린 «고향마을»을 비롯해 지난 3월 말까지 한국의 24개 지역으로 4300여명의 사할린 한인들이 ‘영주귀국’했으나,

이들은 직계가족을 동반할 수 없다는 영주귀국 조건에 의해 또다시 자식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2인 1세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낯선 사람과 짝을 이루어 한 집에서 살아야만 했다.

앞으로 할 일도 수없이 많다. 우선 사할린 잔류 한인에 대해 영주 귀국한 한인 지원에 똑같은 지원책 등 한국 정부의 책무를 규정한

«사할린 한인 지원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 남사할린 전역의 한인 실태에 대한 한국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실태조사도 필요하다.

이와 함께 사라져가는 사할린 한인들의 강제동원 70여년 역사와 한인문화를 기억하고 보존할 «사할린 한인 역사기념관»을 시급히 현지에

건립해야 한다. 또한 사할린 잔류자에 대해 한·러 양국의 협의 아래 20만 해외입양인처럼 하루속히 이중국적을 부여해 이들이 고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 정부의 인도적인 ‘위로금’ 지급 등 지원책에서 사할린 현지 한인 유족들이 소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는 분명한 원칙을

정해 일본 정부의 사할린 한인 강제동원과 전후 방치 책임, 강제 우편저금 반환 등은 물론 피해자와 유가족, 그 후손들에 대한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과 전후 방치 책임에 대한 유엔 차원의 현장 실태조사가 긴요하다.

남사할린 전역에서 삶을 마감한 수만명의 한인 1세 유골 문제(실태조사, 현지 위령시설 건립, 유골 반환문제 등)도 한·러·일 세 나라 정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제1차 소송은 15년간 지속되면서 1983년 4월 "아시아에 대한 전후책임연구회"가 결성되는 성과를 얻었다. «15년 재판»으로 명명된 이 소송은

취지가 개선된 점을 들어1심 판결도 없이1989년 6월 15일에 원고 4명 중 3명이 사망하고 남은 1명이 영주귀국했기에 소송 취하로 종결됐다.

이후 1987년 7월 17일 일본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사할린잔류한국·조선인문제 의원간담회(일본국회의원 155명 참여)"가 발족됐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88년 4월 일본 외상은 사할린잔류한인에 대해 일본이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1989년 7월 한∙일 양국 적십자사로

구성된 "사할린거주한국인지원공동사업체"를 설립함으로써 모국방문(일시방문 및 영주귀국) 문제를 담당하게 됐다.

제2차 사할린 재판은 1994년 7월 14일 취하되고 말았지만 "50년 파일럿 프로젝트"를 실시함으로써 일본이 모국방문, 역방문, 영주귀국의

한 비용, 영주귀국자의 거주시설 건설, 사할린 잔류자들을 위한 문화센터 건설을 지원하는 결과를 야기시켰다.

2001년에 사할린주 한인회, 노인회와 이산가족회가 일본 정부에 사할린 한인들의 요망서를 제출했는데 일본외무성이 다음과 같은 회답을 통고했다:

사할린주 한인회.

사할린주 한인노인회.

사할린주 한인이산가족회.

금년 3월13일자로된 귀 단체들의 요청에 대한 회답으로 아래와 같이 통고합니다.

 

1. 보상, 배상지급에대하여

 

우리들로서는 사할린에 잔류된 한인들이 일본통치 시절, 일본의 전쟁에서 패전한 후, 냉전기, 다시말해서 세계정세 변화시기에 겪은 고생을 인식하고

있으며, 지난때 고독한 일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문제 발생의 역사적 사실들을 밟으면서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1988년부터 예산시책으로 일시 귀국, 영주귀국자들에 지원차로 왕복여비,

채재비용과 영주귀국관련 비용을 비롯하여 주택, 복지관을 건설하고 생계지원책 등을 강구하여 사할린 한인들에게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할린에서 일본인들의 귀환은 연합국들의 협정으로 1946년에 소련지구에서 일본인 귀환 미·소협정에 따라 연합국들의 책임하에

실행됐습니다. 이외에 일본 정부는 산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으로 인한 조선반도 출신자들은 일본국적을 상실했기에  이들을 귀환시킬 책임이

없었습니다.

이상에 지적한 사실로 일본 정부는 귀환책임 불이행으로 조선반도 출신자들인 사할린 한인들에게 보상, 배상 지불할 책임이없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귀측의 양해를 바라며 향후 일본 정부는 여러분들이 조국으로 영주귀국, 이산가족 재회사업을 위하여 모든 역량을 쏟아 주력할

예정입니다.

 

2. 사할린과한국에주택건설관련문제

 

일본 정부는 32억엔을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자들의 문화주택건설 비용으로 계상했습니다. 이 비용으로 복지관 및 집단주거주택건설이 조직됐습니다.

이외에 일본측은 영주귀국시에 필요한 교통비용, 귀국과 관련된 비용 및 복지관의 직원봉급 등을 부담하고 있습니다. 금년 7월에는 영주귀국자들이

사할린의 남은 가족들과 재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목적으로 일화 1억4천700만엔(1.4700만엔)을 할당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될 수 있는 한 더 많은

사람들이 영주귀국할 수 있도록 협조하려 합니다.

현 단계에서는 상기한 집단주거 주택들을 건립 비용을 확보하는 데는 예산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향후 일본 정부는 영주귀국조직 사업에 협조하려

합니다.

사할린에 거주 주택 건설 관련은 예산확보가 난처함을 지적하고, 일본 정부 이 지방의 요구에 터전을 두고 "문화센터" 건립 비용으로 5억엔의 예산을

계상했습니다. 현재 동 문화센터 건립을 위하여 시공 특별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화센터 건립에 일차적인 관심으로 보고 있기에 조기건립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3. 기금창설에 , 우편저금이용에대하여

 

저금은 총액을 지불가능성이 있는데(원금에 법으로 정해진 이자 첨가를 포함 원금의 4–5배)로 러시아 국적 또는 무국적증 소지자들에게는 지불받을

법적권리가 있으며, 그들의 지불요청과 원본 통장 제출이 필요합니다.

현행 일본 법으로는 본 우편저금을 수급자는 본인이라야 합니다. 법적으로 타인에게 지불은 금지되어 있기에 "기금 창설"에 이용한다는 것은 극히

난처합니다.

 

4. 가칭 "사할린문화센터" 건설에대하여

 

최근에 귀하들에게 제기하는 대상에 대한 소유권 관련 문제조사, 연구와 더불어 건설부지, 위치, 절차, 허가…등과 모든 법적 관련 문제연구 등이

있으며 건설도중에 중단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모든 문서 정리를 비롯한 법적 절차를 지척시키고 있습니다. 건물 시공의 지연 원인은 절대로

일본측의 부정적 처지로 야기된 것이 아닙니다.

사할린주 행정부,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행정부, 관련단체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은 한 우리로서는 본 대상의 설계를 앞으로 진척시킬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귀하들이 우리에게 협조하여 주실 것을 앙원합니다.

                                    일본 외무성                                                  2001년 7월자



[1] 다카키 켄이치. 사할린 잔류한국인 문제와 일본 국내 재판//사할린 동포 현안, 어떻게 풀 것인가? – 서울, 20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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