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의: 소련시대의 사할린 한인의 생활 (계속) - стр.2

(1)    소련(러시아), 한인들을냉전의감옥에가두다

 

연합군측과의 합의에 의해 남북 사할린의 영유권을 확보하게 된 소련은 1945 년 8 월 23 일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과 일본인에 대한 출국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그리고 1946  년부터는 이들에 대해 거주등록을 실시했다. 소련 당국은 조선인들을 일본인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적극적으로 귀환시킬 의사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추측해 볼 수 있지만, 우선 정치정세가 매우 유동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반도에는 아직 미소 분할 점령 상태에서 정부 수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섭의 대상이 없었고, 자신들이 점령한 북한 당국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을 귀환시키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조선인들의 대부분은 38선 이남 출신이었기 때문에 38선 이북으로의 귀환은 쉽지

않은 조치였다. 설사 이들이 이북으로 귀환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고향을 찾아 남하할 것이고, 그러한 상황이 당시의 한반도 정세에서 특별히 유리한

국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소련의 입장에서 이들의 귀환을 서두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소련의 입장에서 남사할린 조선인들은 일본의 영향 하에 있던 사람들로서 그 성향에 관한 관찰이 필요했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남한으로 귀환하게 될때 정치적 파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소련은 1937 년 조선인들에 대한 강제이주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강제이주의 원인도 조선인들이 일본의 스파이 노릇을 할 것을 염려한 결과다. 남사할린 거주 조선인들은 아직 감시나 통제의 대상에서 제외하기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가능성이 높았다.

세 번째로 이 문제와 관련해 북사할린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에게 미칠 영향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이 귀환의사를 밝혔을 때,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당시 소련 당국은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던 사람들 중 지식인이나 당관료 등을 다시 사할린으로

복귀시켜 조선인들에 대한 "지도"를 꾀하고 있었고,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했던 일반 고려인들이 되돌아올 가능성은 높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로 여겼을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사할린에는 노동력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고, 일본인의 귀환으로 인한 공백 또한 큰 상황이었다는 점도 귀환에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일본인의 귀환 등으로 사할린에서의 노동력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이미 제정러시아 시대부터 노동력 확보에 큰

애로를 겪었던 소련은 1946–49년간 노동계약을 통하여 사할린과 캄챠트카로 북조선의 노동자를 수입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할린 개발을 위한 노동력이

절실했던 소련 역시 사할린 조선인의 귀환문제에 소극적이었다. 더욱이 소련은 종전직후 미국과의 교섭을 통해 조선인을 남한으로 귀환시키려는

계획보다는 북한으로 귀한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국가기록원에 입수된 소련 정부의 비밀문서(연합뉴스 이미지, 2013)

 

소련 정부가 일제 패망 후 사할린 거주 조선인 2만 2천 여명을  북한으로 이주시키려던 계획을 담은  문서가 공개됐다. 한국 국가기록원은 러시아 연방

기록청에 비밀해제를 요청해 소련 정부의 비밀 문서 214 건(1256 매)을 입수했다고 2009년 8월14일 발표했다. 문서에 따르면 소련 내무성 크루글로프는

외무부상 말리크에게  보낸 서한에서 "1947년 사할린 거주 조선인들을 일시에 북송하면 사할린 지역 사회에 경제·사회적 타격이 예상되므로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통제아래 단계적으로 이주시키는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할린 거주자의 공식적인 일본 귀환 논의는 1946 년 3 월 16 일 "인양에 관한 기본지령"으로 시작됐다. 이 지령은 1946 년 11 월

27 일 "소련지구 송환 미소잠정협정"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1946 년 12 월부터 1949 년 7 월 22 일까지 292,590명의 일본인이 귀환했다. 당시 사할린

조선인의 경우 법적으로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귀환이 당연히 이루어질 것으로 인식했으나 일본 정부는 카이로 선언, 즉 조선은 완전한 독립국임을

선언했다는 것을 이유로 조선인을 "일본인"의 범위에서 제외하여 귀환에서 배제했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의 귀환문제는 일본의

손을 떠나 미국, 소련의 태도에 의해 결정되게 됐다.

1947 년 2 월 17 일 소련 극동지방군관구 소속 본국 송환국은 사할린 남부 조선인 22,817명의 송환여부를 결정해 달라고 소련의 외무부차관 야.

말리크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결과 "소연방 각료회의 결정서 ○○호.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 조선인의 북조선 송환문제에 관하여"를 결정하고 다음과

같이 조선인 귀환 원칙을 정했다:

 소연방 각료회의 본국송환사무전권 대표(골리코프 동지)에게 조선인을 남사할린과 쿠릴열도에서 북조선으로 1948 년 7–10월간 송환하도록 승인한다.

 남부 사할린주 집행위원회(크류코프 동지)는 본국송환사무전권 대표(골리코프 동지)의 계획이 정한 기간 위의 인원을 임시캠프 379(홈스크 항)로

집결시킨다.  해군성(쉬르쇼프)은 이를 위해 본국송환사무전권 대표의 신청에 따라 선박을 임시캠프 379(홈스크 항)에 제공할 것을 지시한다.

 귀환 조선인의 모든 사유재산을 북조선에 양도할 것을 승인한다.

소연방 각료회의 의장 스탈린

소연방 각료회의 총무국장 차다예프

 

이 결정에 의해 실제로 어느 정도 규모의 조선인이 북한으로 귀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 귀환의 예로 1947 년 3 월 19 일 연해주 군관부 본국송환

사무국장 육군소장 포민은 본국송환사무 전권부 대표인 육군중장 골루베프에게 1947 년 3 월 19 일 사할린 조선인 233 명의 흥남항 귀환을 보고했다.

해방 후 사할린 조선인의 수, 이동에 관한 정확한 수를 알 수 있는 통계가 아직 발굴되지 않아 위의 정책으로 얼마만큼의 사할린 조선인이 북한으로

귀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68 년 박노학에 의하면, 북한으로 건너간 사할린 조선인은 약 8000 여명이라고 한다.

소련 당국자들은 1945 년 시기의 현지 조사 과정에서 사할린 조선인이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희생자임을 인식하게 됐다. 하지만 소련 치하 초기에

조선인의 생활은 일제시기에 비해 그리 개선되지 않았다.

첫째, 경제적으로 그러했다. 남사할린 내 조선인의 대표적인 강제동원 피해 작업장의 하나로 꼽히는 나이부치(현 브이코프) 탄광과 관련된 1946년 8월의

조사 기록을 보면 조선인 독신자 1,500 여명이 남아 있는 이 탄광은 "사할린우골" 광업 콤비나트 소속으로 편입됐지만 정작 조선인 독신 노동자들

"20–30명이 이와 빈대가 들끓는 30㎡ 남짓한 방에 개인 이불도 없이 생활하며, 기숙사에 단체 급식을 제공하는 어떤 체제도 없는 "상황인바, 대단히

열악한 한인 노동자들의 주거 및 일상생활 여건의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될 정도였다(가이소, 171–1–31, 42면). 일제시대 강제노동 당시의 합숙소

생활이 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연장됐음을 보여준다.

둘째로, 남사할린에서 신속한 소비에트화를 임무로 부여받았던 당시 당국자들에게 사할린의 조선인은 소비에트의 해방을 부여할 대상이기보다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안보상의 위험 요소로서 감시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비근한 예가 사할린 당국자와 국경수비대 간의 1급 비밀 자료이다.

1948년 8월 당시 쿠릴 열도에 살고 있던 조선인 거주민에 대해 언급하는 한 문서에는 1948년 8월 당시 "쿠릴의 여러 섬에 거주하는 986명의 ...

조선인들은 ... 국경 안보의 관점에서 ... 월경과 외국의 첩자로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 모두를 사할린 본섬으로 이주시켜야 할 것"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이소, 4–1–556, 60–61면).

소비에트 지방 정부 당국들의 눈에 전반적으로 "친일본적인" 태도에 경도되어 있고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인들은 한글 신문과 이동극장 등을

조직하여 공산주의 사상으로 시급히 교화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1948 년 남북 정부가 수립되면서 변화의 국면을 맞게 됐다. 남북 정부 수립 이후 소련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만을 공식 정부로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했기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 속에서 사할린 한인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했다. 1952 년 10 월부터 소련은 자유의사에 의하여

소련 국적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들 국적을 취득하면 소련공민, 북한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 한인들은 점차 이들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1960 년대에 이르면 북한국적자 65%, 소련국적자 25%, 무국적자 10% 정도의

비율이 됐다. 사할린 한인들 중 90% 이상이 38선 이남 지역 출신이라는 조사가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북한 국적을 취득한 비율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향으로의 귀환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서 사할린 한인들은 현지 정착을 통해 삶의 터전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1946 년 5 월 경이다. 북한으로부터의 파견 근로자가 4천톤 급 선박에 1천 여명이 타고 왔다. 오랫동안 전쟁에 지쳐 내핍생활을 한 탓인지 그들의

여장은 같은 동포이면서도 부끄러울 정도로 형편없었다. 사할린에 이미 정착해 있던 다른 동포들이 이들 가련한 사람들을 접대해 줬다. 그 후 몇 차례

선박이 도착했다. 이 때 건너온 노동자의 수는 약 5만 명. 그러나 이들은 우리들과는 사상이 다른 탓인가. 늘 쌍방 사이에는 불화가 있었으며 가끔

다투기도 했다.”

박노학의 수기에 나오는 북한 노동자들에 대한 회고이다. 북한은 1946 년부터 1947 년 사이에 노동자와 그 가족 약 2만 여명을 파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들에 관한 정확한 내용을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들의 존재는 명확히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단기간의 계약기간을

두고 파견됐기 때문에 대부분 1 년여를 근무하고 돌아갔다. 그 중 일부는 1950 년대 초반까지 있다가 돌아가기도 했고, 일부는 정착하기도 했다.

북한이 정부를 수립하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사할린에 노동력을 파견한 것이 소련의 복구를 위해서인지, 노동력 파견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을 고려한

것인지, 북한 내부의 실업난을 해소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친일파 지주 등 소위 "반동분자"들에 대한 유배적 성격이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정부 수립이전 북한 당국자들은 사할린을 귀국해야 할 한인들이 있는 유배의 땅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복구사업과 생산활동이 필요한 노동의

현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인식의 괴리와 소련 당국의 정책 등으로 인해 사할린에서는 친북적 성향의 한인들에 의해 1950년

5 월경 "조선 공산당"이 결성되고 비밀리에 귀국운동이 진행됐다가 실패했음이 확인되고 있기도 하다.

북한의 사할린과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인식은 정부가 수립되고 남북 간에도 냉전이 심화되면서, 그리고 북한 내부에서 전후복구와 산업개발을 위한

노동력 부족이 심화되면서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인식은 점차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 “사할린지역에는 2.8399 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

이중 2.2817 명은일본인들에 의해 보내진 이들이고

5582 명은 북한에서 모집된 이들로 주로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1947 년 러시아 당국의 한인 현황조사 문건, 한국국가기록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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