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의: 소련시대의 사할린 한인의 생활 (계속)

(2) 한국에서의노력

 

1964 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일회담에 제출할 귀환요청서가 제출됐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회담에서 사할린 문제는 논의조차 하지 않은 채 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이후 한국 정부는 냉전의 벽을 핑계삼아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1966 년 2 월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외무부장관이 "공산지역(화태) 피억류교포 송환"에 관한 보고를 통하여 사할린 한인문제가 한국 국회에서 처음으로

거론됐다. 이어 1968 년 6 월 14 일 "사할린 억류교포 송환 촉진에 관한 건의안"이 의결됐다. 그 후 1970 년 8 월 이두훈 씨가 대구에서

"사할린억류교포귀국촉진회(1980 년 2 월 ‘중소 이산가족회’로 개칭)"를 결성하여 이산가족의 의견과 이익을 대변하고 이산가족 재회사업을 어려운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활동을 조력하고자 1972 년경에는 일본에서도 "사할린억류귀환한국인회에 협력하는 아내의 모임"이 결성되어

일본내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사할린 한인들에 관한 관심과 정책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1980 년대 말이었다. 물론 그 과정은 사할린 한인들의 피나는 노력과 그들의 일본에서의

승소, 일본 정부의 정책 전환 등에 힘입은 것이었다. 88 올림픽 개최와 북방정책의 채택, 그리고 소련의 변화 등으로 인한 정세의 변화는 한국 정부의 변화된

정책 실현을 가능하게 했다.

소련은 1988 년 9 월 이후 사할린 교민의 모국 방문과 영주 귀국을 허용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교섭에 나서게 됐다. 1989 년 8 월 한국

정부는 사할린 주정부와의 실무접촉을 개시하고 교섭창구를 대한적십자사로 지정하여 협상을 전개했다. 10 월에는 한국의 이산가족 30 명이 처음으로

사할린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0 년 9 월 한러수교가 성사되면서 협상은 더욱 신속히 전개 됐다. 마침내 1992 년 독신 노인 72 명의 영주귀국이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영주귀국 사업은 지속됐고, 안산시에는 고향마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2000 년부터는 1945 년 8 월 15 일 이전 출생자의 경우 일본 정부의 정착지원금을 받아 한국에 영주귀국할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그 이후 출생자들의

문제는 여전한 현안으로 남게 됐다. 또한 영주 귀국자 이외의 현지 한인들에 대한 지원문제도 중요한 현안으로 남아 있다. 사할린 한인 지원관련 특별법

제정 움직임은 17 대 18 대에 이어 현 19 대에도 전해철 의원(민주당, 안산)이 발의한 상태다. 17 대부터 발의된 법안들의 주요 내용은 영주귀국 대상의

확대와 사할린 현지 생존 1 세들에 대한 지원이다. 외교부의 반대와 국회 상황(18 대 경우 한미 FTA 처리) 등으로 국회임기만료 폐지됐다. 19 대에 발의된

전해철 의원 법안 역시 외통위 수석전문위원이 부정적인 검토의견을 제출하여 통과여부가 불투명한 상태다. 이명수 의원의 법안은 현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의 상설화에 초점인 법안인데 현정부의 의지가 관건이겠으나 이 역시 어렵다고

생각된다.

[사할린 한인 지원특별법 입법추진경위]

 

법안명

제안일자

현재 상태

사할린 한인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장경수 의원등 62인)

17대 국회

2005.10.13.

2005.10.14. 소관위 회부

2008.05.29. 임기만료 폐기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및 정착지원에 관한 특별법안(한명숙 의원등 91인)

17대 국회

2005.12.30.

2006.01.09. 소관위 회부

2008.05.29. 임기만료 폐기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및 정착지원에 관한 특별법안(김영진 의원등 29인)

18대 국회

2009.03.10.

2009.03.11. 소관위 회부

2009.07.20. 소위 회부

2009.11.23. 법안심사소위 상정

사할린 한인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

(이화수 의원등 10인)

18대 국회

2009.06.12.

2009.06.15. 소관위 회부

2009.07.20. 소위 회부

2009.11.23. 법안심사소위 상정

사할린 한인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

(박선영 의원등 24인)

18대 국회

2010.09.06.

2010.09.07. 소관위 회부

영주귀국 사할린동포의 고국정착지원에 관한 특별법안

(이윤성 의원 등 12인)

18대 국회

2010.12.6

2010.12. 7 회부

 

2012 년 11 월 13 일 민주당 전해철 의원 대표발의로 "사할린 동포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이 해당위원회(외교통상통일위원회, 보건복지위원회)에

회부됐다. (의안번호 2549), 발의자로는 전해철, 임수경, 이상민, 배기운, 우윤근, 김성곤, 긴민기, 유대운, 서기호, 노웅래, 백재현, 김관영, 윤후덕,

박남춘, 유성엽, 정청래, 이낙연이다. 주요내용은 사할린 영주귀국자 대상확대(1945 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에서1945 년 9월 2일 이전 출생자로, 배우자

및 직계비속까지: 본인 + 배우자, 자식 1 인 + 배우자); 사할린 동포의 적립금 상환을 위해 외교적 노력: 국무총리산하 사할린동포지원위원회 신설

(영주귀국, 정착지원 담당), 기념사업 등을 위한 사할린동포지원재단 설립, 국내 유족(배우자)에 대한 생계급여와 의료급여 지원이다.

한편 한국 정부는 사할린 한인 문제에 대하여 조국을 그리워한 수많은 동포들에 대하여 지독하게 무관심했고, 반일, 반공의 문제로 사할린 한인 문제를

이용하면서 정권의 정당성 위기를 극복하는데 사용했을 뿐이었다. 더욱이 사할린 한인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일본에 있고, 따라서 일본이 먼저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면 한국도 그에 상응하여 나선다는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또한 일본이 1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책임은 법적 책임이

아니라 역사적, 도덕적, 인도적 책임에 불과하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수용하여 특별히 일본에게 법적 책임의 추궁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가졌다.

이러한 방침은 현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국 정부는 "사할린동포 영주귀국업무처리지침"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대응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일본 정부가

제시한 한∙일 정부를 주체로 한 것이 아닌 적십자사라는 민간기구를 통하여 "영주귀국사업"을 실시하자는 제안을 수용했고, 따라서 일본의 조치는

사할린 한인에 대한 "법적 책임"은 커녕 "역사적, 도덕적, 인도적 책임"도 아닌 "지원"이라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다.

일제 당시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됐던 한인들의 기록을 한국 정부가 2년전 확인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직접 러시아 측과의 협상 끝에 관련 기록

사본을 전달받았는데, 당시 사할린 한인들이 항일운동을 벌인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당시 일제가 작성한 것으로, 한인들의 출신지역과 강제노역에

시달린 탄광 등 근무지, 임금 내역 등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 심지어 개인의 용모와 성격, 이념적 성향까지도 꼼꼼히 기록돼 있다. 또 작업장에서

달아나 지명수배된 기록도 있는데, 이는 고통스런 강제노동을 견디다 못해 도주하거나 독립운동을 하다 쫓긴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강압적 조선 통치에

항의하는 성명도 발견돼 당시 사할린에서도 항일운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기록의 존재가 확인됨에 따라 적어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과 보상을 받을 길을 열 수 있다. 이 기록을 확보할 경우 강제동원 피해사실 규명은 물론 보상 문제도 길이 열리게 된다.

이 보도에 대해 외교부는 적절한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국내 거주 사할린 한인들이 북한 이탈주민과 다문화 정책지원 대상에서도 제외, 역사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정당한 대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충남도의회 장기승 의원은 충남도의회 제265회 임시회 도정질문에서 국내거주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강점기 어린 나이에 러시아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됐다가 노년기에 그리운 모국을 찾아 정착했지만 여러가지 생활여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국내에 사할린 한인이 4115명이 정착했고

충남에는 328명이 거주하고 있다”며 “국내거주 사할린 한인에 대한 지원을 위해 정부는 특별법 제정을, 충남도는 조례제정과 함께 전담공무원을 지정해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 의원은 또 “이들은 주거의 경우 13평 미만의 좁은 임대아파트에서 2인 기준의 입주조건을 맞추기 위해 법적재혼

또는 사실혼을 하거나 동거가구를 구성해 생활하다 보니 서로 갈등이 빈번히 발생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빈곤, 제한된 수준의 한국어 구사로 의사소통의

불편함, 가족이산으로 인한 외로움, 고령화로 인한 건강악화 등 많은 불편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들은)북한 이탈주민과 다문화

정책지원 대상에서도 제외됐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정당한 대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충남은 독립기념관이 소재하고 있는

곳으로 많은 독립운동가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가 살고 있는 지역이고 사할린 한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박승의’ 선생과 ‘공노원’

선생의 연고지로서 특별한 관심과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며 “타시도의 경우 이미 사할린 한인에 대한 각종 행정적 지원을 하고 있지만 충남도는

전담공무원이 없고 지원조례도 없으며 사할린이 정착한 도내 시군간의 연계를 위한 광역적 역할 조차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    소련(러시아), 한인들을냉전의감옥에가두다

 

연합군측과의 합의에 의해 남북 사할린의 영유권을 확보하게 된 소련은 1945 년 8 월 23 일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과 일본인에 대한 출국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그리고 1946  년부터는 이들에 대해 거주등록을 실시했다. 소련 당국은 조선인들을 일본인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적극적으로 귀환시킬 의사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추측해 볼 수 있지만, 우선 정치정세가 매우 유동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반도에는 아직 미소 분할 점령 상태에서 정부 수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섭의 대상이 없었고, 자신들이 점령한 북한 당국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을 귀환시키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조선인들의 대부분은 38선 이남 출신이었기 때문에 38선 이북으로의 귀환은 쉽지

않은 조치였다. 설사 이들이 이북으로 귀환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고향을 찾아 남하할 것이고, 그러한 상황이 당시의 한반도 정세에서 특별히 유리한

국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소련의 입장에서 이들의 귀환을 서두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소련의 입장에서 남사할린 조선인들은 일본의 영향 하에 있던 사람들로서 그 성향에 관한 관찰이 필요했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남한으로 귀환하게 될때 정치적 파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소련은 1937 년 조선인들에 대한 강제이주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강제이주의 원인도 조선인들이 일본의 스파이 노릇을 할 것을 염려한 결과다. 남사할린 거주 조선인들은 아직 감시나 통제의 대상에서 제외하기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가능성이 높았다.

세 번째로 이 문제와 관련해 북사할린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에게 미칠 영향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이 귀환의사를 밝혔을 때,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당시 소련 당국은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던 사람들 중 지식인이나 당관료 등을 다시 사할린으로

복귀시켜 조선인들에 대한 "지도"를 꾀하고 있었고,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했던 일반 고려인들이 되돌아올 가능성은 높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로 여겼을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사할린에는 노동력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고, 일본인의 귀환으로 인한 공백 또한 큰 상황이었다는 점도 귀환에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일본인의 귀환 등으로 사할린에서의 노동력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이미 제정러시아 시대부터 노동력 확보에 큰

애로를 겪었던 소련은 1946–49년간 노동계약을 통하여 사할린과 캄챠트카로 북조선의 노동자를 수입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할린 개발을 위한 노동력이

절실했던 소련 역시 사할린 조선인의 귀환문제에 소극적이었다. 더욱이 소련은 종전직후 미국과의 교섭을 통해 조선인을 남한으로 귀환시키려는

계획보다는 북한으로 귀한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국가기록원에 입수된 소련 정부의 비밀문서(연합뉴스 이미지, 2013)

 

소련 정부가 일제 패망 후 사할린 거주 조선인 2만 2천 여명을  북한으로 이주시키려던 계획을 담은  문서가 공개됐다. 한국 국가기록원은 러시아 연방

기록청에 비밀해제를 요청해 소련 정부의 비밀 문서 214 건(1256 매)을 입수했다고 2009년 8월14일 발표했다. 문서에 따르면 소련 내무성 크루글로프는

외무부상 말리크에게  보낸 서한에서 "1947년 사할린 거주 조선인들을 일시에 북송하면 사할린 지역 사회에 경제·사회적 타격이 예상되므로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통제아래 단계적으로 이주시키는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할린 거주자의 공식적인 일본 귀환 논의는 1946 년 3 월 16 일 "인양에 관한 기본지령"으로 시작됐다. 이 지령은 1946 년 11 월

27 일 "소련지구 송환 미소잠정협정"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1946 년 12 월부터 1949 년 7 월 22 일까지 292,590명의 일본인이 귀환했다. 당시 사할린

조선인의 경우 법적으로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귀환이 당연히 이루어질 것으로 인식했으나 일본 정부는 카이로 선언, 즉 조선은 완전한 독립국임을

선언했다는 것을 이유로 조선인을 "일본인"의 범위에서 제외하여 귀환에서 배제했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의 귀환문제는 일본의

손을 떠나 미국, 소련의 태도에 의해 결정되게 됐다.

1947 년 2 월 17 일 소련 극동지방군관구 소속 본국 송환국은 사할린 남부 조선인 22,817명의 송환여부를 결정해 달라고 소련의 외무부차관 야.

말리크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결과 "소연방 각료회의 결정서 ○○호.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 조선인의 북조선 송환문제에 관하여"를 결정하고 다음과

같이 조선인 귀환 원칙을 정했다:

 소연방 각료회의 본국송환사무전권 대표(골리코프 동지)에게 조선인을 남사할린과 쿠릴열도에서 북조선으로 1948 년 7–10월간 송환하도록 승인한다.

 남부 사할린주 집행위원회(크류코프 동지)는 본국송환사무전권 대표(골리코프 동지)의 계획이 정한 기간 위의 인원을 임시캠프 379(홈스크 항)로

집결시킨다.  해군성(쉬르쇼프)은 이를 위해 본국송환사무전권 대표의 신청에 따라 선박을 임시캠프 379(홈스크 항)에 제공할 것을 지시한다.

 귀환 조선인의 모든 사유재산을 북조선에 양도할 것을 승인한다.

소연방 각료회의 의장 스탈린

소연방 각료회의 총무국장 차다예프

 

이 결정에 의해 실제로 어느 정도 규모의 조선인이 북한으로 귀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 귀환의 예로 1947 년 3 월 19 일 연해주 군관부 본국송환

사무국장 육군소장 포민은 본국송환사무 전권부 대표인 육군중장 골루베프에게 1947 년 3 월 19 일 사할린 조선인 233 명의 흥남항 귀환을 보고했다.

해방 후 사할린 조선인의 수, 이동에 관한 정확한 수를 알 수 있는 통계가 아직 발굴되지 않아 위의 정책으로 얼마만큼의 사할린 조선인이 북한으로

귀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68 년 박노학에 의하면, 북한으로 건너간 사할린 조선인은 약 8000 여명이라고 한다.

소련 당국자들은 1945 년 시기의 현지 조사 과정에서 사할린 조선인이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희생자임을 인식하게 됐다. 하지만 소련 치하 초기에

조선인의 생활은 일제시기에 비해 그리 개선되지 않았다.

첫째, 경제적으로 그러했다. 남사할린 내 조선인의 대표적인 강제동원 피해 작업장의 하나로 꼽히는 나이부치(현 브이코프) 탄광과 관련된 1946년 8월의

조사 기록을 보면 조선인 독신자 1,500 여명이 남아 있는 이 탄광은 "사할린우골" 광업 콤비나트 소속으로 편입됐지만 정작 조선인 독신 노동자들

"20–30명이 이와 빈대가 들끓는 30㎡ 남짓한 방에 개인 이불도 없이 생활하며, 기숙사에 단체 급식을 제공하는 어떤 체제도 없는 "상황인바, 대단히

열악한 한인 노동자들의 주거 및 일상생활 여건의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될 정도였다(가이소, 171–1–31, 42면). 일제시대 강제노동 당시의 합숙소

생활이 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연장됐음을 보여준다.

둘째로, 남사할린에서 신속한 소비에트화를 임무로 부여받았던 당시 당국자들에게 사할린의 조선인은 소비에트의 해방을 부여할 대상이기보다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안보상의 위험 요소로서 감시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비근한 예가 사할린 당국자와 국경수비대 간의 1급 비밀 자료이다.

1948년 8월 당시 쿠릴 열도에 살고 있던 조선인 거주민에 대해 언급하는 한 문서에는 1948년 8월 당시 "쿠릴의 여러 섬에 거주하는 986명의 ...

조선인들은 ... 국경 안보의 관점에서 ... 월경과 외국의 첩자로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 모두를 사할린 본섬으로 이주시켜야 할 것"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이소, 4–1–556, 60–61면).

소비에트 지방 정부 당국들의 눈에 전반적으로 "친일본적인" 태도에 경도되어 있고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인들은 한글 신문과 이동극장 등을

조직하여 공산주의 사상으로 시급히 교화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1948 년 남북 정부가 수립되면서 변화의 국면을 맞게 됐다. 남북 정부 수립 이후 소련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만을 공식 정부로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했기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 속에서 사할린 한인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했다. 1952 년 10 월부터 소련은 자유의사에 의하여

소련 국적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들 국적을 취득하면 소련공민, 북한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 한인들은 점차 이들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1960 년대에 이르면 북한국적자 65%, 소련국적자 25%, 무국적자 10% 정도의

비율이 됐다. 사할린 한인들 중 90% 이상이 38선 이남 지역 출신이라는 조사가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북한 국적을 취득한 비율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향으로의 귀환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서 사할린 한인들은 현지 정착을 통해 삶의 터전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1946 년 5 월 경이다. 북한으로부터의 파견 근로자가 4천톤 급 선박에 1천 여명이 타고 왔다. 오랫동안 전쟁에 지쳐 내핍생활을 한 탓인지 그들의

여장은 같은 동포이면서도 부끄러울 정도로 형편없었다. 사할린에 이미 정착해 있던 다른 동포들이 이들 가련한 사람들을 접대해 줬다. 그 후 몇 차례

선박이 도착했다. 이 때 건너온 노동자의 수는 약 5만 명. 그러나 이들은 우리들과는 사상이 다른 탓인가. 늘 쌍방 사이에는 불화가 있었으며 가끔

다투기도 했다.”

박노학의 수기에 나오는 북한 노동자들에 대한 회고이다. 북한은 1946 년부터 1947 년 사이에 노동자와 그 가족 약 2만 여명을 파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들에 관한 정확한 내용을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들의 존재는 명확히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단기간의 계약기간을

두고 파견됐기 때문에 대부분 1 년여를 근무하고 돌아갔다. 그 중 일부는 1950 년대 초반까지 있다가 돌아가기도 했고, 일부는 정착하기도 했다.

북한이 정부를 수립하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사할린에 노동력을 파견한 것이 소련의 복구를 위해서인지, 노동력 파견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을 고려한

것인지, 북한 내부의 실업난을 해소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친일파 지주 등 소위 "반동분자"들에 대한 유배적 성격이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정부 수립이전 북한 당국자들은 사할린을 귀국해야 할 한인들이 있는 유배의 땅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복구사업과 생산활동이 필요한 노동의

현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인식의 괴리와 소련 당국의 정책 등으로 인해 사할린에서는 친북적 성향의 한인들에 의해 1950년

5 월경 "조선 공산당"이 결성되고 비밀리에 귀국운동이 진행됐다가 실패했음이 확인되고 있기도 하다.

북한의 사할린과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인식은 정부가 수립되고 남북 간에도 냉전이 심화되면서, 그리고 북한 내부에서 전후복구와 산업개발을 위한

노동력 부족이 심화되면서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인식은 점차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 “사할린지역에는 2.8399 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

이중 2.2817 명은일본인들에 의해 보내진 이들이고

5582 명은 북한에서 모집된 이들로 주로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1947 년 러시아 당국의 한인 현황조사 문건, 한국국가기록원, 2012)

 

 

 

 

 


 

5)영주귀국사업의실시: 마침내귀향길에

 

(1) 민간시설등으로의개별영주귀국실시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양국의 적십자사를 통해 재정을 지원해 사할린 한인 1세들의 모국방문사업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일시방문사업이

주가 됐으나, 1992 년부터 영주귀국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개별적인 영주귀국은 1990 년부터 있었다). 이후 1994년 한–일 정상회담시 사할린

한인문제에 대한 포괄적 해결방안의 조기 마련에 합의하고, 사할린 한인 1세 대상의 "영주귀국시범사업"으로 "100명수용 요양원" 및 "500세대 아파트"

건립 추진에 합의했다. 이를 위하여 한국 정부는 1997 년 9–10월 사할린잔류한인 4만2천명중 3만명을 대상으로 영주귀국에 대한 대규모 설문조사

(한국 정부가 예산 1억6천만원 투입, 러시아정부가 조사 대행)를 실시했다. 이렇게 하여 사할린 한인 1세들의 평생의 꿈이었던 고향방문과 친척방문이

이루어지게 됐다. 1989–95 년까지 연인원 7천여명이 일시방문을 했고, 1991–2014년사이 경북 고령 대창양로원, 인천 사할린복지관, 안산 고향마을,

전국에 산재한 임대아파트 등으로 총 4296 명이 영주귀국했다.

서울 올림픽 및 한·소관계 개선 이후 한·일 적십자사를 통해 사할린 한인의 모국방문과 영주귀국이 활성화됐다.

– 민간시설 등으로의 개별 영주귀국 실시

○ 1989 년: 사할린동포 모국방문 시작(일본을 경유).

○ 1992 년: 외무부 및 적십자사 주관으로 영주귀국 시작.

○ 1993 년: 경북 고령군 대창양로원 사할린동포 50 여명 입소.

○ 1994 년 3월, 7월

– 한·일 정상회담에서 사할린 한인에 대한 지원논의 결과 사할린 한인 1세 대상의 「영주귀국시범사업」으로 『500 세대 사할린 한인  전용 아파트 및

100 명 수용 요양원』건립 추진 합의,  한국은 건립부지 제공, 일본은 건설경비 지원, 한·일간 합의에 따라 사할린 한인 1세를 "1945. 8. 15. 이전

출생자로서 1945. 8. 15. 이전 사할린에 이주하여 계속 거주중인 자"로 정의,

– 2003 년 사할린 한인 지원 공동사업체 운영위원회에서 2004 년부터 사할린 이외 대륙 거주 한인 1세를 포함시키기로 결정.

○ 1997. 12–1998. 9: 조기귀국사업으로 82가구 영주귀국, 서울 강서구 등촌동 42가구, 인천 부평구 삼산동 40가구 등 입주.

○ 1999. 2 월: 100개 병상의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요양시설)" 완공,

○ 1999. 12 월: 건교부 주관(주택공사)으로 안산시에 영구임대주택 건립

– 2000. 2 월초 입주시작, 안산시 예산지원 시작,

– 2001 년, 안산에 대규모 사할린 한인  거주지를 조성하는 대신 국가가 생계급여, 장애수당 등의 안산시 부담분을 지원.

○ 2005. 9 월: 일본적십자사와 안산시 공동부담으로 안산요양원 개원.

○ 2007–2009: 영주귀국 확대사업 실시:

– 약 2000 명(2007 년 611 명, 2008 년 647 명, 2009 년 837 명) 영주귀국, 2007 년까지는 사할린 한인 1세만을 영주귀국 대상으로 실시되어 왔으나,

2008 년부터 사업 확대로 1세와 혼인한 2세 등 배우자(러시아계 비한인 등 포함)도 영주귀국 사업 대상에 포함.

○ 2010 년 이후 영주귀국 사업:

– 당초 영주귀국 확대사업은 3 년간 실시 후 마무리 예정이었으나, 잔류 1 세들의 영주귀국 희망 등을 감안하여 2010 년 이후에도 한·일 공동으로

영주귀국 사업 추진,

– 2010 년 127 명,

– 2011 년 102 명,

– 2012년 108 명,

2013년 영주귀국은 12월18일에 70명이 신규 아파트에 입주(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선유지구), 7명은 인천복지회관, 안산고향마을, 천안임대아파트로

가게 됐다.

영주귀국의 대상자 범위는 초기 사할린 한인 1세(1945 년 8 월 15 일 이전 사할린 이주 또는 사할린 출생자)에 한정했다가 2008 년부터 1세의 배우자와

장애자녀도 동반귀국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직계비속의 가족도 동반할 수 없어 자녀 및 손자녀들과 또 다른 이산가족이 되어야 하며,

또 2인 1세대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독신자나 부부가 함께 영주귀국을 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 사람은 영주귀국을 포기하거나 낯선 사람과 부부로

만들어 와서 살아야만 한다.

(2) 영주귀국사할린한인  현황

 주거시설(영구임대 및 국민임대)

 2012 9월 말                                                              

시,도

시군구

지구

인원 (명)

비고

서울

강서구

등 촌

61

영구(외교)

부산

기장군

정 관

120

 

인천

남동구

논 현

509

 

부평구

삼 산

51

영구(외교)

경기

김포시

통진 서암

133

 

양곡 솔터

71

 

남양주시

진 접

60

 

안산시

사동고향마을

759

 

화성시

향 남

94

 

오산시

세 교

96

 

파주시

당 동

94

 

선 유

29

 

강원

원주시

문 막

76

 

충북

청원군

오 송

75

 

음성군

신 천

69

 

제천시

영 천

120

 

충남

아산시

신 창

102

 

천안시

청 수

96

 

서천군

사 곡

116

 

경남

김해시

율 하

99

 

양산시

대 석

76

 

합계

   

2906

 

 

입소시설

2012. 9월말                                                                                   (단위 : 명)

시도

시군구

시설명

인원

비고

인천

연수구

사할린동포복지회관

84

 

경기

안산시

안 산 요 양 원

2

 

경북

고령군

대 창 양 로 원

24

 

강원

춘천시

광림사랑의집치매센터

9

 

합계

 

 

119

 

 


 

(3) 영주귀국사할린한인 

지원근거: “국무총리 주재 재외동포정책위원회”회의('96.12.4.)

사할린에 거주하다가 모국으로 영주귀국한 동포들에게 지원되는 모든 비용을 국고에서 지원하기로 결정

지원대상

○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 및 1세의 배우자․장애인 자녀

※ 사할린 한인 1세가 아닌 1세의 배우자․장애인 자녀는 2세로 통칭

 

 지원내역

◇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선정 및 지급절차

☞ 외교통상부(대한적십자사)가 사할린 거주 한인 중 대상자선정 → 국토해양부(대한토지주택공사) 거주지 마련 → 거주지별 대상자명단 해당

시군구청에 송부 → 입국 → 정착 → 수급자신청 → 수급자조사 및 책정 → 급여지급(생계·주거비, 특별생계비 등) → 항공료 및 집기비품비 지급

지자체 협조사항

○ ’13년말 기준 사할린 한인 현원추계 외교통상부 보고 : ’13. 6월말까지

※ 사할린 한인  입국자 중 역 귀국자 등 현황 철저 파악하고 그간 변화 추이를 검토·분석 후 보고 → ’14년 예산(안) 작성 시 그 오차 최소화 필요

※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정착비 지원」사업의 예산 편성‧집행 시 “연례적 불용 발생, 예산 편성안 근거인 입국자 수, 임대주택비용의 추계 근거

불명확”은 국회(’10년도 결산 검토보고서, ’12년 예산 상임위 검토보고서) 지적사항임

1.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정착비 지원

◈ 영구 및 국민임대주택 거주자에 특별생계비 매월 7.5000원(월 임대료 및 아파트관리비) 지원

3.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대상 복지급여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급여 지원

○ 사할린 한인은 영주귀국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의 특례수급권자로 지정 가능

– 소득만 조사하여 소득평가액을 산정 후 최저생계비 이하인 경우 급여 결정 및 지급

– 재산은 소득으로 환산하지 않으며, 부양의무자 기준은 미적용

※ 특별생계비(영구임대주택 임대료 및 관리비)는 소득으로 미산정

◇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의 배우자 및 장애인 자녀의 경우

(사할린 한인  2세)

– 입국 후 국적취득(귀화) 전까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의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서 생계비를 지급 받음(1세와 동일하게 적용)

– 다만, 귀화에 필요한 “한국 1년 거주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귀화하지 못한 경우 지원 불가

– 국내 적응기기간을 감안하여 3년간 자활사업 참여 조건부과가 유예되며, 3년 경과 후 근로능력자(만 18세이상 만 64세 이하)인 경우에는 근로조건

미이행시 생계급여 중지 및 추정소득 부과

○ 지원내역(2013 년 기준)

① 생계급여 : 37.7817원(1인 가구), 64.3309원(2인 가구),

② 주거급여 : 9.0636원(1인 가구), 15.4327원(2인 가구)

※ 생계․주거급여는 다른 소득이 없을 경우 지급 받을 수 있는 최고금액으로 소득인정액이 존재할 경우 해당 금액만큼 차감하여 지급됨

 

구 분

관계

지 급 액

비 고

2인 가구

부부

79.7636원

사실혼 관계 포함

 

타인

46.8453원×2

 

     
       
       

 

③ 장제급여: 수급자 사망 시 1인당 75.0000원

※ 기초노령연금 지급시 기초노령연금액 제외 후 생계비 지급(이중지원 배제)

◈ 기초노령연금법에 의한 기초노령연금 지원(2012년 기준)

○ 65세 이상 노인 중 소득·재산조사를 거쳐 일정수준 이하*인 경우 지급

– 1인당 최고 94,600원(부부가 모두 지급받을 경우 151,400원) 수령

* 선정기준(지급대상이 되는 노인가구의 소득 재산 수준): 노인단독 78만원, 노인부부 124.8만원

※ 2013년 4월경 2013년도 기초노령연금 지급 기준액 발표 시에는 이에 따름

※ 다만, 기초생활보장법의 타법지원 우선원칙에 의하여, 기초생활보장에 의한 수급자로서 생계비를 지원받는 경우 노령연금 금액을 소득 산정하여

생계급여에서 차감함

◈ 장애인복지법에 의한 장애인연금 지원

○ 귀국 후 국적취득과 주민등록 발급 후 의료기관에서 장애판정 후 장애 등급에 따라 지급

◈ 의료급여법에 의한 의료급여 지원

○ 기초수급권자로 선정된 경우 의료급여 수급권자로 선정

○ 근로능력유무에 따라 1종(근로능력 없는 세대) 및 2종(근로능력 있는 세대)로 구분하여 차등지원

○ 단, 외국 장기거주로 인한 언어적·문화적 차이점으로 인해 취업활동 참가가 사실상 어려운 점 등을 고려하여 수급권자 최초선정일로부터 3년간

종별에 예외를 두고 의료급여 1종 부여

– 유예기간 경과 시 근로능력 유무에 따라 1·2종 구분

구분

1차(의원)

2차(병원,종합병)

3차(지정병원)

약국

PET등

 

없음

없음

없음

없음

 

1,000원

1,500원

2,000원

500원

5%

10%

10%

10%

10%

 

1,000원

15%

15%

500원

15%

                 

 

○ 다만, MRI 등 특수촬영이나 고가 치료제 등은 급여기준에 따라 비급여 또는 전액 본인 부담

◈ 사망시 천안 소재 국립 “망향의 동산” 납골묘에 무료 안장

 

< 수급자격 관련 유의사항 >

 
   
 

◦생계비 등 국가로부터의 보조는 모두 통장으로 입금되며, 6개월간 통산하여 90일 초과 해외 출국시 생계비 지급 불가

– 취직이나 부업은 상시 가능하나, 신고소득 발생시는 생계비의 일부 또는 전부 삭감

– 승용차 구입이나 운용은 생계비 지급 곤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사전에 지자체의 사회복지전담공무원과 협의 요망

– 입주지역 외 타지역으로 이동이나 아파트 동·호수 변경은 정부의 허가를 얻은 경우에만 가능. 다만, 개인적으로 주택을 구입하여 이전은 가능하나, 이 경우 생계비 지급받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

 

※ 영주귀국사할린 한인 지원사업 및 해당부처

지원내역

지원금액

해당부처

항공료및집기비품비(1회)

항공료: 895천원(실비) 집기비품비: 1400천원

사할린 한인  1세: 일본 정부 사할린 한인  배우자 및 장애인자녀 등2세: 보건복지부

임대아파트 제공

국토해양부

입주비용(1회)

가구당 1.7700천원

(2인1가구 기준)

보건복지부

특별생계비

월 75천원

보건복지부

생계․주거비

일반수급자동일

보건복지부(시․군․구청)

장애수당, 장애인연금

보건복지부(시․군․구청)

기초노령연금

보건복지부(시․군․구청)

의료급여

보건복지부(시․군․구청)

 

일본 정부 지원

∘80 년대 말–현재까지 약 72억엔 지원

1. 사할린 잔류 1세 모국 방문 지원

– 1989–2010 년간 총 1.7279 명 지원,

– 7박8일간 체재비 및 왕복항공료 지원을 하는데 일본은 해마다 일방적 방식으로 일시모국방문 차수(1990년도 13차부터 2005년과 2006년 4차수까지)

를 줄이고 있다.  일본은 일시모국방문인원수를 2006 년 410 명에서 2007 년 100 명까지 축소를 하고,  2005 년 8 월부터는 한인노인1세들이 동반자를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다.

2. 1990 년–2013까지 총 4115 명 귀국

(개별귀국 포함)

– ‘안산고향마을아파트’ 및‘인천요양원’ 건설비 32억엔 포함

3. 영주귀국자 사할린 역방문 지원은 2 년에 한 번 일본 적십자사에서 러시아행 비행기 티켓을 지원하지만, 이 마저도 한인 1 세로 대상이 제한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예산은 매년 5월경 한일 적십자 회의에서 결정되어 입금되므로서 대한 적십자사는 지원금을 받아

티켓구매를 여행사에 맞겨 역방문 시기가 9–11 월에 진행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원금 대상자들은 70–80 대 고령자이기 때문에 한 여름 무더위를

피해 7–8 월을 사할린에서 체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고, 초 겨울인 10–11월에는 불편하다고 하지만 대한 적십자사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 2001–2009 년간 총 2822 명 지원(2010 년 680 명 예정)

– 왕복항공료 및 여행보조비(100$) 지원

4. "사할린 문화센터" 건설: 5억엔


6)남겨진문제들

 

(1) 일본의사할린한인에대한귀환책임과관련하여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전후 처리문제에서 만큼은 철저히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기대어 전쟁책임과 식민지 과거청산에

관한 면죄부를 얻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이미 전후보상과 과거청산은 마무리 됐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965년 한일기본협정의 체결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였던 한국 식민지화가 합법적이었다는 생각과 그 이후의 법적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됐다는 주장은 모두 일맥상통하는

제국주의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할린 문제는 한일협정에서 논의 된 바 없는 미청산의 과제임이 분명하다. 성립할 수 없는 가정이지만, 일본 정부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패망 이전, 사할린 한인이 아직 일본 국민으로 인정되고 있던 시기(1946–1949)에 귀환작전에서 그들을 배제했던 사실이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일본국적을 박탈한다고 결정하기 이전에 그들이 보인 반인륜적 불법적 행위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남게 된다.

더구나 일본군 헌병대나 일부 민간인들에 의한 학살사건 등의 사건도 일본 정부의 책임이 크다. 최근의 국제법적 흐름이나 식민주의 청산의 흐름에서도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나 식민지 인식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 국제적 공론이라는 측면에서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변화가 요구된다.

그동안 사할린 한인의 귀환에 대하여 일본은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이들의 귀환에 대하여 "지원"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고, 한국도 일본이 1차적인

책임자라는 기조에서 일본의 조치가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조치를 취하는 상태이다. 일본 정부는 그 동안 사할린 한인의 모국방문사업

(일시방문, 영주귀국, 영주귀국자 사할린 역방문)에 대해 약 700억원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지원"으로 이제 할 만큼 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도 이러한 일본 정부에 대하여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의 영주귀국문제는 이제는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1945년 종전 당시 43,000명의 한인이 사할린에 억류됐다고 하는데,

1 세의 90% 이상이 사망했고, 그 나머지가 생존해 있다. 아직도 한국으로의 영주귀국을 희망하는 사할린 한인 1세가 남아 있으며, 현실적인 이유로

한국으로의 영주귀국을 포기하고 사할린에 그대로 잔류하고자 하는 사할린1세도 있다. 이들은 그동안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가 이들에게 영주귀국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낸 결과 이제는 고령화되어 건강이 따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다. 물론 그 사이에도 영주귀국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사망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사할린 한인의 영주귀국문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조속히 실현해야 할 사업"이다.

사할린 한인의 귀환책임의 문제는 시간이 진행되면서 다시 2가지로 발전됐다.

첫째는 종전 당시와 같이 귀환실현책임의 문제이다. 그 동안 일본과 한국이 양국 적십자사를 통한 모국방문사업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둘째는 귀환실현책임 불이행에 대한 책임문제이다. 즉 사할린 한인을 적시에 귀환시켜야 했어야 하는데, 현재는 사할린 한인 4세가 출생한지도 20년

정도가 됐고, 이미 90%이상의 1세대가 사망했다. 따라서 이제는 이들에 대한 귀환실현책임 불이행에 대한 책임이 새로이 성립됐다고 할 것이다.

아직은 이 두 번째 책임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제시된 바가 없다. 이 두 번째 책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전에 사할린 한인의 영주귀국문제가

조속히 그리고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2) 강제동원중의개인적재산청구권과관련하여

 

사할린에 강제동원 됐던 한인들은 일본의 전시체제하에서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은행 또는 우체국 저금, 국채 등의 매입, 보험료의 납입 등의 여러

가지 명분으로 강제로 예치시키게 됐다. 이 중에서 우편저금에 대하여 2007 년 9 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사할린잔류한인·조선인 우편저금 등

보상청구소송"이 제기됐다. 이 소송은 당시 일본 우편국(우정공사) 저금과 간이생명보험 불입금에 대한 청구소송이다. 이를 주도한 다가키 겐이치

일본변호사는 이 소송은 궁극적으로 일본 사법부로부터 승소판결을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여론형성을 통해 정치쟁점화하여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로부터 일정한 자금의 출연을 통하여 기금을 조성하여 사할린 한인의 한국에의 영주귀국과 정착 사업, 그리고 사할린 잔류자에 대한 지원사업 등에

활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소송에서 대상이 됐던 우편저금과 간이생명보험은 당시 일본이 임금을 강제로 예치한 형태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일본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일괄적으로 해결해야 할 성격이라 하겠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한∙일 과거사에 있어서 재산권문제는

기본적으로 1965 년 소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해결된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반면, 한국 정부는 군대위안부,

원폭피해자, 사할린 한인 문제는 2005 년부터 1965 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기본입장을 표명했다.

이와 관련 헌법재판소는 2011 년 8 월 군대위안부와 원폭피해자의 재산권 및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라는 기본권의 중대한 침해가능성, 구제의

절박성 등을 고려할 때, 한국 정부의 그동안 행태가 위헌임을 판시하며 분쟁해결에 한국 정부가 적극 나서도록 촉구했다. 이와 더불어, 2012년 5월

대법원은 미쓰비시 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의 한국인 피징용자 그룹이 제기한 소송의 최종판결에서, 1965년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피고 기업은

이들의 미지불 임금을 지불할 의무가 있고,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강제징용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견된 조선인 노동자 임금 미지불 공탁금 내역서ⓒ 이국언]

 

이처럼 사할린 한인의 문제는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와 그에 따른 문제들과 함께 여전히 미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강제동원과 미귀환이라는 두 가지

문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문제이며, 따라서 반드시 일본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하는 문제임과 동시에 이를 방치해 온 한국

정부 또한 그 책임을 져야하는 문제인 것이다. 한국 국회 역시 그 동안 미온적이었던 태도를 반성하고 사할린 한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의 분단, 전쟁, 산업화라는 고된 시절을 지내면서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한민족의 아픈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아픔의 치유를 위해 늦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그 첫 걸음은 그동안 제정되지 못했던 "사할린 한인 지원 특별법"의 제정이

될 것이다.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자 가구 지원 한계 혹은 문제 영주귀국자 지원 사업의 내용이나 방식 중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과 그 해결 방안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영주귀국자 대상자는 "1945.8.15 해방 당시 사할린 거주 또는 출생자",

◦인도주의 차원에서 2008 년부터 1 세의 배우자와 장애자녀도 동반귀국 허용,

◦영주귀국시 한 세대는 2–3 인으로 구성, 1 인 거주 불가,

– 남․남, 여․여 동성 거주, 또는 남․녀 부부거주 형식,

◦영주귀국자 대상이 되기 위해 형식적으로 부부가 되거나 동성(여․여) 짝을 맞추어 거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격차이로 갈등과 충돌이 잦음,

◦대부분 자녀와 손자․손녀를 러시아에 두고 왔으니 그들과 떨어져 생활하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큼,

◦경제적인 측면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로서 정부지원금에 의존하고 있으며, 지원금이 충분치 않음,

◦사할린을 자주 방문하지 못하는 것, 경제적 문제가 가장 불편함,

◦이런 점을 해소하기 위해 연금지원과 가족 친지 방문기회 확대(2001 년부터 사할린 친지방문을 실시하여 2010 년까지 3,484 명),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2 년 만에 한 번씩 무료로 러시아로 갈 수 있는 기간이 영주귀국자들에게 맞지 않다는 것이다. 학생들, 대학생들의 러시아

지역 방학기간은 6 월 1 일부터 8 월 31 일까지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녀, 손자녀를 방문하는 기간은 방학기간이어야 한다. 9–10 월에 왜 갔다

와야 하는지? 영주자들은 한국 여름 날씨가 매우 더울 때, 사할린에서 자녀∙손자들이 집에 있을 때 가서 가족과 함께 있으려는 소망을 이루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영주자들이 필요할 때 갔다 올 수 있게 표 값을 주면 해결될 문제가 아닌지 궁금하다. 정부차원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역방문 지원 사업 방식 개선 방안으로는 지원 1 세 한인 당사자만 지원되고, 그 배우자인 8.15 이후 출생자, 비한인 배우자는 지원되지 않으므로,

비지원 배우자 항공권 비용부담으로 인해 부부가 함께 역방문을 포기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의 특정 항공사 티켓(아시아나)

구입 대신, 역방문 용도 일정액 계좌입금 혹은 전자바우처 형태로 비용 지급을 희망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보다 저렴한 항공사 이용으로 배우자

항공료 추가 부담분이 줄어들어 경제적 이유로 역방문을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한 역방문 시기 역시 가족 상황에 맞추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 더 큰 기쁨을 맛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방문희망자가 원하는 시기에 그리고 가급적 배우자가 같이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데,

국적기 이용이 원칙이라면, 아시아나 티켓을 사할린 항공 수준으로 할인되도록 정부가 협상, 또는 지원을 통해 가급적 배우자도 같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사할린 동포 관련 예산은 매년 5월경 한일 적십자 회의에서 결정, 일본 적십자의 예산집행으로 한국 적십자에 예산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역방문

등의 사업실행이 어려운 것이 현실태이다.

◦영주자들 중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건강 상태가 괜찮은 어르신들에게는 할 만한 일을 줬으면 하루하루를 보람되게 살 것같다.

◦또 일을 하면 차별 없이 현지인들만큼 주면 좋겠다. 현재 3–4 세대가 이주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게 되면 외국인으로서

차별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아이들이 차별을 모르게 다닐 수 있게 어른들이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문화, 여성단체에서 해결하도록

도와주면 한국에서 계속 살면서 공부할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신적 타격을 덜 받으면 나라에도 좋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사할린 한인 동포의 자녀․손자가 조부모를 찾는데 왕복 항공료를 지원,

◦한국어 교육 방안 실시,

◦체류동안 한국 문화와 역사 탐방을 지원,

◦사할린 3–4세대가 한국어교육을 받고, 한국문화를 체험하고, 한국사회를 이해하면서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한국지역사회가

할일 일이라고 본다. 한국 많은 도시에 사할린 영주귀국자들이 거주하고 있고, 사할린에서 이미 한국어교육을 하다 영주귀국한 선생들이 있다.

국내 여성, 다문화지원센터들이 전 사할린 한국어교사들, 다문화강사들과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작성해서 연수기간을 정해놓고 정기적으로 서로

배워가면서 3–4 세대를 교육 시키는 것이 적당하다.


7)  1사할린한인과  강제징용후손들

 

 2차 대전 종전 후, 사할린 한인이 귀환에서 빠진 상태로 6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은 일본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며 끝내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한국 정부의 역할과 책임이며, 또한 소련(현 러시아) 정부의 역할이다.

 해방 후, 국내정세의 불안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해외의 자국민(일본 본토의 강제동원자와 사할린 강제동원자 등) 귀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한반도의 조국 정부의 지금까지의 행태는 납치당한 자식을 돈 없고 힘이 없다고 모르는 척 버려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막은 한 부분에는 구소련 정부의 다분히 의도적인 귀환 방해책이 있었다는 여러 정황들을 볼 수가 있다.

사할린은 천연자원의 보고로 개발의 여지가 많았던 만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지역이다. 구소련 정부로서는 일순간에 빠져나가는 사할린의 노동력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속에서 명백한 일본인이 아닌, 그리고 일본으로부터의 귀환 요구도 없었던 조선인들의 귀환에 협조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구소련 정부는 자국 국적법을 들어 잔류 조선인들에 대하여 무국적자로 규정하고 귀환을 막았다. 이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됐던 한인들이 다시 사할린으로 이주해 오고, 북한지역의 노동자가 새로 유입되면서 오늘날 사할린 한인사회가 형성됐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살아남기 위하여 러시아국적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던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자손들의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과 2차 세계대전의 풍랑 속에서 비롯된  사할린 한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 일본, 러시아가 지난 역사와 인권에 대한

진정성 있는 접근을 바탕으로 다각도의 외교적 노력을 기해야 할 것이다.

 현재 사할린 한인들의 현실적인 요구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 희망자에 대한 한국으로의 영주귀국 조치.

둘째, 사할린 현지 정착 지원.

셋째로 강제동원 피해 보상 및 노역 당시의 저축금, 연금 등의 지급을 위한 일본 정부의 배상.

 그 요구들은 사할린으로 강제동원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또한 긴 세월 방치해 왔던 한국 정부가

사할린 한인들의 역사성을 인식하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일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할린 한인들의 이 같은 요구는 역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또한 국제법적으로도 지극히 당연한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사할린 1 세 잔류한인들에 대한 생계비 지원을 강경히 요구하는 분들도 있다. 80 세 이상의 잔류 어르신들은 이중국적 허용문제도 내세우고 있다.

사할린 1 세 잔류한인들을 위한  한국에서의 의료검진이라든가 치료사업이 시급하다는 의견도 있다.

2014–15 년 사할린동포영주귀국 사업에 대한 일본과의 협의는 완료되지 않았다. 현재 사할린에 180여명의 영주귀국희망자가 있다. 전에 일본은

  2013 년에 영주귀국 사업을 마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영주귀국사업은 사할린 한인들의 가슴에 또 다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있다. 현재의 사업은 영주귀국 대상자를 1945 년 이전 출생의

1 세 동포로 한정하고 있어 자식, 손자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새로운 이산가족을 양산하고 있다. 더구나 혼자서 귀국하면 고령의 노인들을 돌볼 수가

없다는 이유로 배우자가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새롭게 부부로 결합하여 귀국하도록 하고 있다. 수십 년간 각자의 자녀들과 힘들게 살아오신 노인들에게

낯모르는 사람과 한집에서, 그것도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인도적일 수 없다. 들어 올 차례를 기다리다 돌아가시는

분도 부지기수이다. 또 오직 고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일념으로 자식들을 두고 한국으로 영주귀국을 했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향수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시는 분과 가족이 그리워 영주귀국을 포기하고 사할린으로 다시 돌아가는 분도 적지 않다. 여러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나마 영주귀국사업은

사할린 한인들의 소망을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지만 현지 정착이나 미지급 임금 환수와 강제동원 피해 보상은 여전히 요원한 일로 남아있다.

현재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노무자들의 우편저금은 1만6천 여명분 1억8700만엔(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조4천506억원)이라고 일본 정부가 밝혔다.

사할린 우편저금은 공탁금과 달리 양국 모두 1965 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본은 “가입자들의 통장 원본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사할린 우편저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은 이제 한국 국적이므로 한일협정을 소급

적용하여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이 국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자회를 중심으로 약 2천5백 여명의

사할린 동포들이 사할린으로 강제동원 된 이후 임금 및 적립금 등 미수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일본과의

교섭을 하지 않는 것은 "기본권 침해"라는 것이다.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방치하는 것을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고,

대법원에서도 일제 징용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는 판결이 있었던 만큼 그 결과가 주목된다. 사할린의 한인 문제는

좁게는 전시 강제동원에 의한 피해뿐만 아니라, 일제의 남사할린의 개발을 위해 식민지 한인에게 정책적으로 이주노동자가 되기를 강요했던 책임도

있다 하겠다.

일본군의 사할린 한인 대량학살 근거와 함께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한인 1만2천 여명의 명부와 서신, 가족관계 관련 기록이 공개됨에 따라 관련

보상신청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위원회)에 따르면

현재까지 사할린 강제동원 보상 신청건수는 2천225 건이며, 이 중 보상금 지급 결정이 난 경우는 1천292 건에 불과하다. 방일권 교수는 "사할린

한인들은 잃어버린 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상신청이 급물살을 타기도 하겠지만 당시 강제징용자 개인에 대한 정보가 확보돼 사할린에서 사망한

선조를 찾는 유족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보상신청에 더해 유엔차원의 진상조사 요구와 대일 보상청구로까지 파장은 확대될 수

있다고 관련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위원회»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을 했던 일본기업들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앞서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은 이미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발생한 일본의 사할린 학살사건 2건에 대해 유엔이

진상조사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낸 바 있다. 결의안은 사할린 한인 학살사건에 대한 일본인의 처벌과 피해보상을 위한 유엔 차원의

진상조사를 촉구하고, 유엔 인권위원회가 관련 당사국들과의 외교협상 및 조사를 통해 일본이 거부한 보상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다.

2013년 4월 17일 외교통일위원회에 전해철의원 등 17인이 제안한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이 상정됐다. 제 315회 국회(임시회) 제4차

전체회의에서 상정/제안설명/검토보고/대체토론/소위회부가 이루어졌다. 이날 제출된 검토 보고서의 종합의견에서

"이들과 그 가족의 귀국·정착을 지원하고 일본 등 관련국과의 외교적 노력을 통해 사할린 잔류 희망자의 권익을 보호하도록 규정한 본 법안은

사후에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과 지원을 한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러시아국적을 가진 사할린동포의 동반가족에 대한 귀국·정착지원을 법률에 규정하는 것은 관련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초래할 수 있는바,

이 같은 조항을 법률에 명문화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를 통해 정책적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나 "다수부처가 관계된 사할린동포 지원사업을 외교부에서 총괄·조정할 권한이 없고, 동 법안의 주요내용인 사할린동포 지원과 관련한 예산이

보건복지부 소관(영주귀국항공료, 초기 정착지원, 생계급여, 의료급여, 특별생계비, 국민임대주택 입주비, 기초노령연금 등)이어서 우리 위원회에서

제대로 된 심의를 하지 못한 채 임기만료 폐기됐는바, 이를 감안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는 의견을 내었다.

지난 18대 국회에서 위원회 대안까지 만들어진 상황이었는데, 한미 FTA 처리과정 등에서 법안 처리가 못되고 임기만료 폐기됐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심의를 하지 못한채 임기만료 폐기"됐다는 언급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법안 논의를 촉구하는 바이다.

 

 

8)맺음말

 

본 연구는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인들의 한국생활의 일반적 특성, 귀국 전 생활, 귀국 후 한국생활, 그리고 정부정책에 대한 태도를 분석했다.

연구대상자의 일반적 특징을 살펴보면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인 1935–44 년 사이에 90%이상이 이주했고, 1 세대의 모집동원이나 강제징용보다는

어린나이에 가족과 함께 이주하거나 사할린 현지에서 출생한 2 세이다. 이들 1.5 세와 2 세들은 사할린에서 한글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어 한국어

사용에 문제가 없다. 그리고 직업 역시 육체노동관련 직업보다는 상대적으로 전문직, 회사원, 자영업 같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했다. 사할린에서

생활수준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크게 경제적 문제로 어려움 없이 생활했지만, 민족차별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연구대상자의 92%는

자녀와 손자·손녀를 두고 있으며, 영주귀국 후 사할린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절데 다수 크다.

귀국 후 영주귀국자들은 귀국시기에 따라 거주지역이 다르게 정해졌고, 귀국 이유로는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서적 심리적 이유가 켰으며, 귀국에

대한 후회는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귀국후 대부분은 배우자와 생활하고 있었으며, 연세가 들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거주지역은

아파트에 생활하면서 아파트 시설에 대해 대부분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이들은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로서

정부지원금에 의존하고 있으며, 지원금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이 사망하여 친인척이 없었으며, 있더라도

자주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사할린 가족과의 연락은 더 많이 나타났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이들은 집안에서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며, 외부 활동이 적게 나타났다. 외부 활동하기에는 복지관내 여가 프로그램이 부족했으며, 있더라도 프로그램이 한정적이어서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현재 이들에게는 사할린 자주 방문하지 못한 것,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불편한 점이고, 이에 따라 불편한 점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연금지원확대와 사할린 가족·친지 방문기회 확대다. 미래에 사망 후 장지는 자연장을 선호하며, 사할린 자식 곁에 장지를 원한다. 한국 정부에 대해

유족의 유해 봉환에 대해 부정적이며, 그 이유는 이장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 기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 정부에 강력하게 이중국적을

역시 2세, 3세까지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의 한국 정부에 대한 요구는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에도 일관성 있게 강조하고 있다. 생계비

지원보다는 가족 동반귀국, 이중국적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사할린 현지 문제에서도 이들은 역사적인 한일문제,

한인 1 세 생계지원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사할린 영주귀국 동포의 생활실태조사에서 문제점을 살펴보았고, 이들의 불편함과 필요한 것, 그리고 개선해야 할 것들을 지역사회와

국가가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적인 문제, 영주귀국동포의 재정적 지원, 사할린 잔류 한인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필요하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사할린 영주귀국동포의 생활만족 증진을 도모하기 위해서 정부차원의 정책적, 제도적 지원과 전문적인 사회사업적 개인이

요구되는 바이며, 무엇보다도 이들을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려는 합의된 사회적 인식과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