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학과 이희팔

 

 

 

 

 

 

 

«박노학» 시리즈 3

박노학과 이희팔

박승의

故박노학회장기념사업추진위원회장

 

 

 

이희팔은 1923년 경북 영양군에서 태어나 1943년 5월23세에 영양 청기면사무소에 게시된 카라후토 인조석유주식회사의 갱외부

«모집»에 지원하여 일본의 노무자로 선출돼 경산에 있는 교육장에서 3개월동안 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다음 2년의 계약으로 사할린에 건너갔다. 약속했던 2년이 지나자 재징용됐다. 사할린 탄광에서 2년 3개월 동안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 후 일본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살았다.

1946년부터 시작된 일본국으로의 귀환에서는 조선인 약 43000명이 대상외가 됐다. 이씨는 일본인 아내를 맞이했기 때문에
특별히 귀환이 인정되어 가족과 함께 1958년 1월에 마이즈루항에 상륙했다.
1956년에 하토야마 일본내각에 의해 일소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져 소련에 억류됐던 일본인이 석방돼 본국에 송환되게 됐다. 
그와 더불어 전후 사할린에 남겨진 일본인들도 그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의 귀환이 허용됐다. 1956년 «일∙소 공동선언»으로1
957년8월부터 1959년 9월까지 7회에 걸쳐 시행돼 총 2345명이 송환됐다. 그 대부분은 일본인 부인과 그 한국인 남편, 그리고
 자녀들이다. 이런 가운데 그 후 일본에서 사할린 잔류 한인 귀환운동의 중심이 되는  일본에 들어온 사할린 한인들 중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씨 등이 각기 가족과 함께 1957년 10월에서 1958년 1월에 걸쳐 사할린의 홈스크항을 떠나 일본 마이즈루항에 
들어왔다. 이들 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동포 한국인들이 자신들도 빨리 귀국할 수 있도록 운동해 달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에 요청해 달라고 얼마나 간청하며 눈물을 흘렸는가를 강조했다. 그래서 박노학은 이미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송환선

안에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 앞으로 사할린에 남겨진 한국인들의 송환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작성하여 5명의 서명을 받았다.

먼저 1957년에 일본에 도착한 심계섭이 미리 한국 대표부의 소재를 확인하는 등 준비를 했기에 박노학과 이희팔이 각기 부인의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했으나 심계섭이 동경이 일자리도 있고 동포의 귀환운동도 추진하기 쉽다고 해서 동경에서 체류하게

됐다. 이렇게 이후 30년간 귀환의 중심이 될 3인이 모두 동경도 아다치구의 송환자 기숙사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박노학과 이희팔

두 사람은 마이즈루항에서 동경으로의 이삿짐을 풀 겨를도 없이 심계섭과 함께 사할린 동포의 귀환운동에 착수한 것이다.

1958년 1월 20일에 또 다른 귀환 한국인을 포함한 4명이 동경의 한국 대표부를 방문해서 최규하 참사관을 만나 박노학이 귀환선

안에서 작성한 탄원서를 제출하고 사할린 동포들의 귀환의 실현을 호소했다. 그들이 주축으로 1958년 2월 6일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의 3인을 비롯한 약 20명의 사할린 귀환 한국인이 모여 «화태억류 귀환자 동맹본부» (이후 «화태억류 귀환 한국인회»,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로 개명)을 결성했다.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인 부인에 딸린 더부살이와 같은 존재로서 일본에의

입국이 허가된 것에 불과했고 그들에게는 일본인과 같이송환자 금전상 원조도 지급되지 않았다. 송환자에게 제공되는 주택도

«함께 귀국한 부인이 다행히도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 주택에서 같이 살게 한다는 답변을 중의원 예산위원회 제2분과에서의

정부위원에서 받았다. 가장 한심한 예는 송환 열차 내에서 가족 단위로 지급된 도시락 수는 한국인 부친의 몫 한 사람분이 제외된

것이다. 이것을 보고 박노학은 이때 «이건 정말 너무 무자비한 처사군»이란 말을 흘렸다고 한다.  

전전이후에도 일본의 국적법은 부계 혈통주의를 취하고 있었다. 즉, 부친이 일본 국민이면 아이들도 일본 국민, 부친이

외국인이면 아이들도 외국인. 모친이 일본인지 어떤지 무관계. 이것이 당시의 국적법의 규정이었다. 일본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인 부인도 이미 일본 국민이 아니다. 전전의 법률하에서는 호적은 내지호적과 외지호적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혈통적으로는 일본인 여성이라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면 한국인의 호적에 입적하도록 돼 있었다. 전후 한국의 독립에 따른

국적처리는 이 호적을 기준으로 행해졌다. 한국 호적에 들어가 있었던 자는 혈통상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거주지가

어디든간에 모두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기 때문에 일본 국적을 상실한다. 이것이 1952년 4월의 민사국장 발언에 나타난 일본

정부의 입장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환시 일본인 부인과 아이들에게는 일본 국적을 인정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피이다.

한국인 남편에게 송환을 허가한 것은 혈통상의 일본인 부인의 부속품으로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종전 후

사할린에 남겨진 것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아픔도 염려도 느끼지 않았다. 일본 피를 가져 있지 않으니까. 이러한 관념이

지배하는 일본 사회에서 박노학 씨들이 살아가는 것, 나아가 사할린 잔류 한인의 귀환운동을 추진한다는 것은 이루 말할 것 없이

험한 가시밭길이었다. 이들은 가진 것 없이 일본으로 들어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았음에도 일본 국회위원과 적십자사, 부서들을

찾아 다니며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호소했다. 그들 대부분은 날품팔이로 일당을 벌 수 밖에 없었으며 여론에 호소하고 싶어도

자신들의 주장을 체계적을  진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도 않했다. 그들을 지원하는 일본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다치구의

송환자 기숙사에 들어간 직후 아리카와라는 중국에서 온 송환자가 친절하게 도왔다. 아리카와는 동경도가 그들을 기숙사로부터

퇴거시키려 했을 때 얼론기관에 연락하여 그 계획을 포기하게 했고 사회당 시와가미 의원을 소개했다.  시와가미 의원은 일본

국회에서 사할린에서 송환된 한국인의 문제 심의를 제기, 처우개선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인들은 극히 예외였다.

외무성, 후생성, 법무성, 일본적십자사 등 여러 일본기관에 닥치는 대로 탄원서를 제출하고 방문했지만 반응은 거의 없었다.

한국 정부와 대한적십자사, 소련 정부와 유엔 등에도 거듭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에 있어서는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는 우선 순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는 1959년 일본에 대해 이 문제에 일본 정부가 노력해 줄것을 요청한 바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 정부의 대일 교섭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박노학 그룹이 이 문제를 1965년 한일회담의 의제로 채택해

주도록 거듭 청원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할린 현지에서는 잔류하고 있던 일본인마저 돌아가고, 일부 한인들도 일본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남겨진 사람들은 점차 귀환에

대한 요구를 강하게 표출한다. 사할린에서 귀환운동은 1960년대 중엽부터 일어난다. 그러나 단지 개인적인 요구로, 조직적인

활동이나 단체결성 등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허조 (사할린 토마리시)씨나 김영배 (사할린 코르사코프시)씨가 수십 명이 서명한

귀환청원서를 관련기관에 보내, 두 사람 모두 일본 정부가 입국을 인정하면 출국을 허락하겠다는 사할린주 내무국의 회답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국적 상실»이란 이유로 입국을 거부하여 귀환이 성사되지 못했다. 허조는 박노학의 한국인회에 무려 103통의

편지를 끊임없이 보내고 유치장에 구속되면서도 굽히지 않고 귀환운동을 계속했다. 토마리 당국의 해석을 듣고 모스크바 일본

대사관에 편지를 보냈는데 다음과 같은 회답을 받았다:

소와 38년 8월 8일

허조귀하

 

편지에 따르면 현지 소련 관헌이 귀하에 대해 일본측의 입국 허가만 얻으면 소련으로부터의 출국이 즉시 허가할 테니 당 대사관에

대해 여권을 신청하라는 취지입니다만… 종전후 한국은 독립되고 이에 따라한 국인은 일본 국적을 이탈 했기 때문에 귀하의

도일은 일본측에 있어 미귀환 일본인의 송환에 해당 되지 않으며 또한 현재 외국인인 귀하에 게  일본 여 권을 발급할수도

없습니다… 순전한 한국인인 귀하의 영주를 목적으로 한일본에 의도항은… 신청해도 허가될가 능성은 없다고 사료됩니다.

(사할린재판 (갑) 제 77호증거)

 

박노학 그룹은 1965년 경부터 사할린 동포 귀환운동에 있어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은 작업을 시작했다. 사할린에 남겨진

한국인과 한국의 가족의 사이의 서신 연락의 중계였다. 국교가 없는 소련과 한국 사이에도 국제우편의 교환은 원칙적으로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웠다. 보낸 편지가 도착하지 않는 경우도 빈번했고 사할린 한인들에게 있어서는 한국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나 사할린에서 편지를 박노학 그룹을 통해서

주고 받는 것이 제일 안전했다. 1965년에 코르사코브 당국이 김영배에게 “일본이 입국을 허가하면 무국적자인 사할린 한국인은

일본에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사할린 전체에 퍼져 박노학 앞으로 귀환 희망자들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 중에는

코르사코브시의 희망자 239명의 명부가 포함돼 있었다. 박노학은 이 사실에 대해 한국 “동아일보” 기자에게 밝히자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는 한국 국내에서 관심을 일으켰고 1966년 2월에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대해 공식 요청을 행하게 됐다.

박노학에게는  한국으로부터 문의가 쏟아졌다.

 

  사할린에서 온 편지들 -2012년 8월 국가기록원 전시회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 회원들은 사할린으로부터 온 편지들을

정리하여 한국에 보내는 활동도 하였다. 국교가 없는 한국과 소련

사이에서 우편배달부 역할을 한 것이다. 이 편지들은 한국에서

박노학씨의 아들 박창규씨가 받아 전달했고, «가라후토 억류교포

귀환촉진회» (이후 «중소이산가족회»로 개명)가 만들어지면서 이 활동이 이어졌다. 이들을 통해 전달된 편지들로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고, 편지를 받은 면사무소 직원들이 일일이 수소문을 하여 이산가족의 소식을 답장을 통해 알리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검열을 한 후에야 체신부에서 편지를 받을 수 있었고, 사할린 현지에서는 아예 다 개봉된 편지를 받아야 했다. 1967년에 이르러

박노학은 이들 서신을 근거로 1744세대 6924명의 귀환 희망자 명단을 완성했다. 이 명단은 한국, 일본, 소련 정부에 제출되어

귀환 협상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또 박노학씨는 사할린 동포를 위한 방송을 KBS에 호소하여, 1972년부터 매일 밤 사할린에서

들을 수 있는 라디오 방송 (이른바 «박노학 코너»)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민간 차원에서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공-반일주의가 극심했던 이승만 시절에는 이렇다 할 한∙일 협상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1965년 한일협정 당시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는 아예 포함조차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희팔은1975년부터 타카기 켄이치 변호사 등이 일본국을 상대로 카라후토 잔류자 귀환요청 소송 (사할린 재판)을

일으키자 스스로 원고로 나섰다. 사할린 탄광에서 1945년 해방전까지 강제노동을 한 이씨는 급여 대부분을 우편 저금 명목으로

빼앗겼다. 통장과 인장은 료장(숙소 주인)이 가지고 있었으며 저금한 사람은 실제로 얼마나 저금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이희팔이 이야기한다. 1975년 이씨는 동료 11명과 함께 일본 정부에 우편 저금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지만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으로 이들의 청구권도 소멸됐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남은 이씨는 중·소 이산가족협회장 및 사할린 거주 한국인의 국내

영구 귀국 사업을 위해 노력하여 한국에 정착촌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1988년 3월 박노학 씨가 타계한 후 그의 부인

호리에 씨가 단기간 회장직을 맡았다가 1989년 2월에 이희팔 씨가 회장이 됐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모란장»

국민훈장을 받았다. 사할린 현지에서 한인들의 귀환 요구가 날로 높아지자 1970년대에는 소련 정부도 이에 대해 반응하기

시작한다. 앞서 일본인 아내와 일본으로 입국한 손정운씨의 아버지 손치규씨가 1971년 일본을 경유, 한국으로 최초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1972년 조업 중 나포되어 1년 이상 사할린에 억류된 문종하 선장이 송환되는 등 정세의 변화 속에서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가 부상하게 된다. 이후 1973년 일소적십자회담에서 소련 적십자사의 토로얀 총재가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그들의 일본 거주 또는 일본을 경유한 한국 귀환을 허가한다면 그 출국에 협력하겠다고 발언하였다. 이를 계기로

1974년 일본 정부는 47세대 201명의 귀환 희망자 명단을 한국에 전달하고, 이들을 한국이 받아들인다면 대소교섭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자 일본은 소련에 출국 허가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돌연 소련 측에서는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는 일∙소 간 교섭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한국 정부가 재일동포의 «북송»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처럼,

이번엔 북한 측이 사할린 한인의 한국 귀환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좌절을 겪으면서도 1976년 3월 최정식, 6월

김화춘씨가 단독으로 귀환에 성공하는 사례들이 생기면서 희망은 남아있는 듯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사할린 강제이주 피해신고자 1만여명

중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판정불능이나 보류 결정을 한 2천200여 명에 대해 재조사를 할 계획이다.

국가기록원에서 수집해 넘겨준 일본의 «사할린 귀환 재일한국인회»의 활동기록인 «이희팔 기증기록물 자료»와 한국의

중소이산가족회 활동기록인 «중소이산가족회 기증자료» 덕택에 피해상황에 대한 증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자료에는 각

개인의 사할린 이주동기와 방법, 시기 등이 대체로 조사돼 있다. 위원회 관계자는 «새로 확보된 자료를 통해 일반피해자로

분류됐던 사람이 위로금 지급 대상으로 바뀔 수 있고, 사망확인이 안 됐던 사람이 사망자로 확인될 수 있다»면서 «최대한 빨리

재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2014년 6월 30일까지 위원회의 활동시한을 늘렸다. 추가로 확보된 증거는 바로

피해조사에 구체적인 성과를 안기는 만큼, 증거 모으기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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